남해 게스트하우스 ‘생각의 계절’에서 내려다 본 평산항
2018년 7월 30일. 서울에서 버스로 4시간을 달려 남해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여수나 통영은 적잖이 다녀봤지만 남해는 처음이다. 지붕 낮은 상가들과 높고 푸른 산. 나와 아들은 반나절 만에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낼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독일마을~다랭이마을~금산, 남해 명소 누비기
터미널에서 예약한 렌터카를 받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해안도로 일주였다. 섬 북쪽 해변을 따라 달리던 중 갈현마을 앞에서 두 팔 벌린 채 서 있는 거인 로봇을 만났다. 신기한 마음에 마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 보니 곳곳에 샤갈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알록달록 벽화와 각종 업사이클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시골길에서 이토록 세련된 공간을 만날 줄이야. 남해의 첫인상이 강렬하게 남았다.
갈현마을의 알록달록한 풍경
독일마을의 탁 트인 경치를 보며 맥주 한 잔!
독일마을에 도착한 때는 늦은 오후였다. 카페에 앉아 낙조가 드리운 독일마을과 쪽빛 남해를 바라보며 크롬바커 흑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늦게 온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의외로 일몰 시간의 운치가 마음에 들었다. 아쉬운 점도 있다. 독일마을은 1960년대 외화벌이를 위해 독일로 떠났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은퇴 후 귀국해 정착한 곳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체성이 흐려졌다. 외지인들이 하는 것은 기념사진을 찍거나 맥주를 마시는 것뿐이다. 독일마을의 역사적 의미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시설이나 예술 공연장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랭이마을의 아름다운 풍경
다랭이마을도 사정은 비슷했다. 다랭이마을은 척박한 설흘산 비탈길에 석축을 쌓아 개간한 계단식 논이다. 실제 주민이 사는 민가보다 게스트하우스, 밥집, 카페가 훨씬 많다. 조상들의 억척스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원형을 그대로 남겨뒀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오게 되면 근처 몽돌해안에서 멍게를 이용해 손으로 조그마한 물고기를 잡는 체험이라도 꼭 해 보고 싶다.
[왼쪽,가운데/오른쪽]금산에서는 평범한 음식도 별미가 된다. / 다른 듯 닮은 아들과 아버지
남해까지 와서 금산(681m)을 보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날이 흐리고 더워서 등산을 피하고 싶었으나 제2복곡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데는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주말에는 사람이 많아 매표소에서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니 가급적 평일에 오는 것이 좋다. 정상의 금산산장에서 나물볶음밥과 컵라면, 맥주를 곁들여 남해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겼다. 내려오는 길에는 보리암에 들러 유명한 해수관음상을 보고 소원도 빌었다.
남해, 그 쪽빛에 빠져드는 시간
남해에서의 일주일동안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곳은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을 다섯 곳이나 방문했다. 그중에서도 설리 해수욕장은 이름이 특이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눈 설(雪), 마을 리(里). 이름 그대로 해수욕장 모래가 눈처럼 희다는 뜻이다. 스노클링 명소 20위 안에 손꼽는 청정해수욕장이라지만 날이 너무 더워서인지 피서객을 찾기 힘들었다. 파라솔 아래 누워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한참 누워 있었다.
[왼쪽/오른쪽]해변에서의 시간은 유독 느리다 / 서촌해변 야영으로 누리는 소확행
서울은 폭염에 열대야가 한창이었는데, 고맙게도 이곳 바닷가는 밤이 되면 선선했다. 사촌해수욕장에 작은 텐트를 치고 야영을 준비했다. 내가 살던 익숙한 곳을 떠나 여행을 하면서 이것저것 보는 것을 관광이라고 한다. ‘빛을 본다’는 의미다. 내 생각에 관광은 인증샷을 찍는 게 아니라 자연의 빛을 보는 것이다. 그 빛에 반응하는 나 자신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사촌해수욕장에서 야영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쏨뱅이 납시오! 직접 잡은 생선으로 뜬 회 한 접시
바다에서 해수욕만 즐긴 것은 아니다. 몇 해 전부터 낚시 좋아하는 후배를 따라 다니다 보니 이젠 바다만 보면 낚시를 하고 싶어졌다. 낚싯배 가격을 알아보니 2시간 체험에 35,000원. 일주일 동안 두 번 배를 탔다. 사촌해수욕장 근처 선착장을 떠나 수심 10m 해역에 닻을 내리고 보리멸이나 모래무치를 잡았다. 나는 운 좋게 양태와 쏨뱅이까지 잡았다. 태풍이 왔다 간 후라 잦은 입질에 재미를 쏠쏠히 봤다. 잡은 고기는 유튜브 동영상을 봐 가며 직접 회를 떴다. 다용도 칼로 두툼하게 썰어낸 생선살을 초장에 듬뿍 찍어 먹으니 정말 꿀맛이었다.
‘생각의 계절’에 머물다
우리가 남해를 여행하는 동안 머문 곳은 게스트하우스 ‘생각의 계절’이다. 평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하얀 2층 건물이다. 1층은 사장 내외가 운영하는 카페, 2층은 객실이다.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조용하다. 일본에서 오래 유학한 사장님이 타인에게 방해가 되는 행위를 모두 금지하고 있다. 조금 불편해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익숙해져서 오히려 편했다.
아침 식사로 시리얼, 삶은 계란, 토스트, 바나나가 무료로 제공된다. 평소 아침을 거르던 나였지만 머무는 동안 아침 먹는 습관을 새롭게 길렀다. 그리고는 테라스에 앉아 풍경에 빠져들거나 사장님이 손수 내린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생각에 잠기곤 했다. 방 안 서랍장에는 손으로 쓴 엽서와 그림, 방명록이 있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보낸 이들의 추억이 커피 향만큼이나 짙게 다가왔다.
[왼쪽/가운데,오른쪽]깔끔한 외관을 자랑하는 게스트하우스 ‘생각의 계절’ / 투숙객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향긋한 커피와 조식
가끔 평산2리 산책도 다녔다. 어촌의 아침은 위판장에서 생선을 팔기 위한 노부부의 분주한 노동으로 시작됐다. 가지런히 놓은 생선들이 저마다 입을 벌리고 싱싱함을 자랑하듯 거품을 뿜어댔다. 위판장에 들어온 생선이 9시 전후로 팔려나가고 나면 마을은 다시 고요해졌다. 군데군데 폐가도 눈에 띈다. 사람은 살지 않지만 삶의 자취는 그대로 남아있다. 사람이 사는 집엔 할머니들만 남았다. 성장한 자녀들은 도시로 나갔을 것이다. 마을회관 앞 구멍가게는 귀 어두운 할머니가 운영하신다. 음료수와 소주, 몇 가지 스낵을 파는 게 전부다. 2리터짜리 생수 하나를 산 뒤 종이컵을 달라고 하니 몇 개를 그냥 주셨다.
평산2리의 정겨운 풍경
남해의 맛
먹을 땐 터미널로 나갔다. 어지러운 골목 안 봉정식당은 푸짐한 생선구이 백반을 7,000원에 내놓았다. 남해재래시장에서는 해산물 구경을 했다. 전어회와 돌문어도 좋았지만 난생 처음 보는 애플수박 한 통에 더 관심이 갔다. 숙소가 있는 평산항 근처에도 횟집이 여섯 군데 정도 있다. 그중 한 곳에서 첫날 물회를 먹었다. 서비스로 나온 메밀국수 사리를 말아 먹으니 별미였다.
여행 마지막 날, 평산2리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언덕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가도 대단한 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길을 발견한 데서 의미를 찾았다. 남해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낯설게 반응하며 비우고 채우는 과정을 반복했다. 여행이라는 수평적인 공간 이동을 통해 사고의 수직적 깊이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정들었던 평산2리 풍경
“내가 아는 여행은 늘 죽음에 가깝다. 죽음 쪽에서 고개를 들어 삶을 아릿하게 바라보는 시간들이다”
유성용 작가의 <생활여행자> 중 한 구절이 테이블 위에 드리운 낙조같이 와 닿았다. 남해는 생각의 계절임이 분명하다. 일상으로 돌아온 요즘,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꼬박꼬박 아침을 챙겨 먹어서인지 노릇노릇한 토스트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