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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우병우(禹柄宇, 1967년~ ) 국정농단의 거물
법조계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인물
대한민국의 전직 검사. 인품에 대한 평판은 안 좋으나(아래 '기타' 문단 참조) 사냥개로서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아 2015년 1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가 아래 서술된 것과 같은 논란에 휘말린 끝에 결국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책임을 이유로 2016년 10월 말 사임하였다.
간략한 인생사와 성향은 이 기사를 참조. 국정조사에서 "박근혜와 김기춘을 존경한다"고 밝힌 바가 있다. 이로 인해 "리틀 김기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래 서술된 것과 같이 수많은 논란에 휘말려 있으나, <신동아> 기자의 논평을 빌리면, "우 수석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공직자이자 화제의 중심에 선 인물이지만,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는 강남 땅 매매와 관련해 몇 마디 한 것 말고는 언론 앞에서 입을 연 적이 거의 없다." “우병우 사단? 검사 20년 했는데 없다면…” 위 보도는 민정수석 취임 몇 달 후인 2015년 4월 6일 몇몇 기자들과 식사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를 폭로한 것인데, 이를 보면 언론에 대해 '나에 대해 좋은 기사를 거의 안 쓴다' 라며 매우 부정적인 속내를 서슴없이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평생의 행적, 특히 민정수석이 된 후의 행적을 보면, 아무리 봐도 언론이 좋은 기사를 써 줄 구석 자체가 없어 보인다.
비록 당사자는 아니라지만, 간접적으로 넥슨 게이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등에 모두 연루되어 있는 인물인줄 알았는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모가 점점 더 드러나면서 그 장본인 중 하나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문제의 스캔들의 내용 중 가장 심각한 부분이 바로, 민정수석실의 협조가 없이는 일어날 수가 없었던 일이기 때문.
검사로서는 매우 유능했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민정수석비서관으로서는 설령 법적 책임은 없더라도 낙제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민정수석의 업무인 민심 동향 파악, 사정 및 공직 기강 확립, 법률 보좌, 인사 검증 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었기 때문.
끝내 구속을 면한 것은 "혼자 죽지 않겠다"라고 검찰에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법조계에까지 파다하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이른바 우병우 사단에 대한 대폭적인 좌천이 이루어짐에 따라 '다 같이 죽게' 생겼다.... 라기도 뭐한 게, 이 일당이 쌓아놓은 법조계 인맥과 재산 규모를 고려하면, 이 정도로는 '죽는다' 는 표현은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2017년 6월 16일 열린 첫 공판에서 '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정치적 책임은 통감한다.'라는 취지로 말했는데, 이는 그의 롤모델인 김기춘이 10여일 후 피고인 신문에서 한 진술과 같은 취지의 발언이다. 그러나 그가 이날 공판정에서 "이 자리를 통해 국민들께 깊은 사죄를 드린다"라고 한 말을 진심이라고 받아들이는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2017년 12월 13일 검찰은 우 수석에 대해 3번째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구속에 대한 확신이 있다"며 구속의지를 확신했다.
2017년 12월 15일 오전 1시경 우 전수석에 대한 3번에 걸친 구속영장 끝에 결국 구속되었다.
1967년 1월 28일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가곡리에서 초등교사 우용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인터넷상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실제로는 1965년생이라는 설이 있다. 84학번인데 1967년 1월생이라는 건, 호적에 출생신고를 늦게 했다는 것이다. 그 뒤 영주시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시절부터 장래 희망이 검사였다. 고3 때 담임의 회고에 의하면, “우 수석에게 왜 검사를 하려고 하느냐 물었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와 부정부패가 없는 국가를 만들겠다"고 당돌하리만큼 또박또박 말했다. 참 독특한 학생으로 기억한다.”
1967년 1월 28일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가곡리에서 초등교사 우용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인터넷상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실제로는 1965년생이라는 설이 있다. 84학번인데 1967년 1월생이라는 건, 호적에 출생신고를 늦게 했다는 것이다. 그 뒤 영주시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시절부터 장래 희망이 검사였다. 고3 때 담임의 회고에 의하면, “우 수석에게 왜 검사를 하려고 하느냐 물었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와 부정부패가 없는 국가를 만들겠다"고 당돌하리만큼 또박또박 말했다. 참 독특한 학생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우병우는 어린 시절의 다짐과 달리, 부정부패한 사회와 정의가 없는 국가를 만들었으며, 고3 때의 저 발언도 진정성이 없는 것이었다고 의심받게 하는 일화가 존재한다. 영주고등학교 재학 중, 우병우는 당시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교사가 있었는데, "그 교사에게 문제가 있으니 바꿔 달라"고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이사장에게 직접 가서 요구한 것이다.
결국 이사장이 이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어, 교사는 교체되었다. 고등학교에서 명문대 합격생을 많이 배출하면 학교의 위상이 달라지며, 영주고등학교는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이사장으로서도 잘하면 서울대학교 입학도 노릴 수 있는 최상위권 성적을 가진 학생들의 말을 들어준 것이다. 물론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문교부 간부인 조부의 힘도 연관 있는 듯. 이를 그것이 알고 싶다에 제보한 고교 동창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당시 나도 그렇고 병우도 그렇고 고등학교 때 싸가지가 없었고, 그게 잘못된 거라고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 싶은 교사의 교체요구는 학생의 정당한 권리라고 볼 수 있기에, 해당 교사가 꼬투리를 잡힌 이유를 알기 전에는 속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해당 내용을 다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이 교사가 왜 꼬투리가 잡혔는지를 정확히 짚고 가지는 않았다. 사립학교는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률을 위해서 물불을 안 가리는 공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사 채용에 비리가 판을 치기도 하며 능력 미달 교사가 이사장이나 이사회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자리보전을 하는 경우도 흔한 이중적인 공간이라는 점 역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교 동창의 '우리는 싸가지가 없었다.'라는 발언 또한 이미 우병우가 나쁜 놈으로 밝혀진 후의 인터뷰이니 진정성을 담보하기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우병우가 고3 이전부터 썩어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에 있어 이 일화의 사용은 다소 부적합하다.
이후 영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력고사 전국석차 53위의 탁월한 성적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 3학년 재학 중인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최연소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20세였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나이가 10살 많은 이종걸이 사법시험 기수로 따지면 우병우보다 1기수 후배다. 당시 29회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자는 1949년생(당시 만 38살)이었다. 게다가 보통 이런 식으로 이른 나이에 사시 합격한 경우는 대부분 변호사로 바로 빠지기 마련인데, 우병우는 그 경쟁률도 뚫고 검사직에 올라섰다. 사시 합격 후 신체검사에서 고도 근시에 의한 ‘질병 또는 심신장애’를 이유로 신체등급 5급 제2국민역 판정을 받았다.
1990년 사법연수원 제 19기를 차석으로 수료하고 검찰에 들어가서 주로 특수부 계통의 검사로 활동했다.
어린 나이에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재벌집 사위로 장가갔으며 친일파 조부를 두어서 그랬는지, 그의 거만함을 빗대어 목에 깁스를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젊은 시절 별명이 "깁스"였다고 한다. 사실 그도 그런 것이, 대한민국 검사라면 수사권과 기소권이라는 중대한 권한을 전부 가지고 있는 인사다. 또한 1980년대 후반 90년대 초 이 당시에는 검사란 직책은 내무부, 안기부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권력의 최정점으로 인식되던 분위기였다. 판사는? 지금도 권력의 최정점이긴 하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우병우는 사법고시 최연소 합격한 당시 수재 중의 수재에 앞날이 보장된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친구들이 대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이미 기업인들에게 대우받고, 정부 인사들과 술자리를 같이 하는 인물이었다.
검찰 내에서 수사능력만큼은 정평이 났던 우 전 수석이 부천지청장(차장검사급) 시절 평검사 등 후배검사들의 수사력 약화를 지적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지만, 그의 권위주의적인 성향을 보여준다는 증언이 나왔다.
2.2. 검사 시절
1990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평검사 시절 서방파 행동대장 이양재, 대전진술파 두목, 이화여자대학교의료원 수련의 임용과정에서 돈을 받은 피부과장 등을 구속했다. 비슷한 시기 서울 시내 폐수·소음·진동을 배출한 환경오염업체 55곳에 이어 세균폐수를 방출한 을지병원·백병원·차병원·중앙대학교병원을 적발했다.
1992년 8월 대구지방검찰청 경주지청 검사로 부임, 1993년 경주대학교, 서라벌대학교 이사장 김일윤 전 의원을 학교공금 53억 원 횡령혐의로 기소하고, 아파트 감리와 관련해 청탁한 경주시 건축과장 등을 구속하는 등 정권 핵심에 친분이 있는 지역 유지를 수사하다가 창원지방검찰청 밀양지청으로 내쳐졌다고 한다.
그 후 1994년 2월 수원지방검찰청 검사, 1997년 2월 제주지방검찰청 검사를 거쳐 1999년 2월부터는 법무부 국제법무과에서 근무하고, 2001년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형사6부에 부임했다. 이때 영화배급을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직배영화사 전 대표와 영화사 대표를 구속했다.
2001년 12월부터 2002년 3월까지는 이용호 게이트 특검팀 특별 수사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 당시 송해운·윤대진 검사와 함께 ‘이용호 게이트 특검’(차정일 특검) 특별수사관 3인방으로 불렸다.
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송금 특검'과 함께 가장 성공한 특검으로 평가받는 이용호 게이트 특검은 당시 신승남 검찰총장의 동생인 신승환을 구속함으로써 신승남 총장의 조기퇴진을 가져왔다.
영월지청장 시절의 우병우
2002년 춘천지방검찰청 영월지청장으로 부임했고, 2003년 8월에는 서울지방검찰청 부부장으로 올라왔다. 그 시절 이정일 민주당 의원, 이상국 KBO 사무총장을 긴급체포하거나 구속했다.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도 소환조사했고, 배기선 열린우리당 의원을 불구속 기소했다. 김광식 전 강원랜드 대표와 권오정 전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 이사장, 심기섭 농수산물유통공사 감사 등도 그의 칼날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전·현직 국회의원들과 관련해서는 '봐주기 수사'라는 지적이 나왔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사건 수사에 참여했을 때는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삼성그룹은 특수2부 부장검사부터 평검사까지 모든 인맥을 동원해 사람을 붙였으나, 유독 부부장이던 우병우만 삼성그룹 사람들을 절대 만나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결국 신상규(서울중앙지검 3차장)-채동욱(특수2부장)-우병우·박용주로 이어지는 수사진은 2003년 12월 업무상 배임의 공소시효(7년)를 하루 앞두고 허태학·박노빈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을 전격 기소했다.
당시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전환사채 헐값 발행에 직접 관여한 일부 인사들을 '표본'으로 기소해 공소시효를 정지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낸 이가 바로 우병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우병우 검사가 수사의 구슬을 뀄다"라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당시 검찰은 '참고인 중지 결정'을 내려 이건희&홍라희 부부를 수사대상에서 제외하는 '중대한 오점'을 남겼다. 어쨌든 이러한 분리기소는 2007년 '1심보다 더 무거운' 항소심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2004년 6월 대구지방검찰청 특수부 부장으로 발령받았다. 이용호 게이트 특검 수사 등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특수통 검사'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이때 대구 유니버시아드 휘장 비리 사건을 수사하며 강신성일 의원, 박주천 전 의원, 김명규 가스공사 사장, 박명환 전 의원 등을 구속시켰다.
2005년 부터는 법무부 법무실 법조인력정책과 과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재직시 한 언론과의 전화인터뷰다.
2007년 2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장검사 자격으로 예금보험공사에 파견되어 부실채무기업특별조사단 단장을 맡았다. 2008년 3월에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금융조세조사2부 부장검사로 활약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장 시절이던 2008년 7월 이명박 대통령의 처사촌 김옥희의 공천 청탁 금품 수수 사건을 수사했다. 이명박 정권이 공식 출범한 지 5개월 만에 일어난 친인척 사건이었다. 결국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을 미끼로 30억여 원을 받은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로 같은 해 8월 김씨를 구속했다. 그리고 김평수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을 구속했는데, 그 과정은 집요하다 못해 지독할 정도였다. 구속영장이 2번이나 기각된 김평수에 대해 반 년 이상 추가 수사를 벌여 결국 배임수재 혐의로 3번째 영장에서 구속시켰다.
2.2.1. 검사장 승진 탈락
2009년 1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중앙수사1과장으로 역진하였다. 중수1과장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박연차 로비 사건을 기소를 담당하는 주임검사로서 수사하였다. 이 당시 이인규 중수부장, 홍만표 수사기획관과 함께 수사의 핵심이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취조하였다. 우병우는 윗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고 그 여파로 임채진 검찰총장과 이인규 중수부장이 사직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병우는 법무부 법무실 법조인력정책과장 시절 법무실장으로 함께 근무했던 김준규 대전고검장이 신임 검찰총장으로 임명되면서 2009년 8월 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 2010년 7월 대검찰청 수사기획관 등 검찰총장의 최측근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김준규 검찰총장이 퇴임한 이후 2011년 8월 인사에서는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해 인천지방검찰청 부천지청장으로 좌천되었다. 2012년 7월에는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가게 되었고 2013년 4월 검사장 승진에서도 탈락하였다.
아무래도 2009년 박연차 게이트 관련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너무 무리하게 수사했던 것이 약점이 되어 2013년 검사장 인사에서 탈락했다는 소문이 당시 파다했다. 검찰 안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너무 심했다"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강했다는 얘기다.
한편 그의 검사장 승진 탈락에 대해 ‘너무 많은 재산’이 더 큰 악재였을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리고 그때 우병우 검사장 승진 문제로 우병우를 감찰, 검증했던 당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바로 조응천 現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조응천 의원은 이후 김어준의 파파 이스등에서 우병우에 대해 "내가 우병우 잘랐다. (선천적 4가지 결핍증은 둘째치고) 노 대통령 강압수사의 직접적 책임이 있는 자이고 야당의 비토가 센데 뭐하러 정치적인 부담을 떠안으면서 우병우를 승진시키냐. 절대 안됨." 하고 밝혔다.
어쨌든 그렇게 검사장 승진인사에서 탈락하자, 검찰을 박차고 나왔다. 나가면서 "승진은 다른 놈 다 시켜주고!"라고 하는 등 매우 억울해 했었다.
처가에 관한 행보
검사로 임관한 이후 결혼했는데, 장인은 엘빈 스미스 이상달 정강중기·건설 회장이었다. 이상달은 딸만 넷을 두었는데, 우병우는 차녀인 이민정과 결혼하였다. 이상달은 원래 사채업으로 재산을 쌓아 중기건설업을 시작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씨에 대해서는 " 「장래성」있는 인사들에게 수시로 접근, 친분관계를 쌓은 뒤 요직에 앉으면 인사에 개입하거나 자신의 사업에 비호세력으로 이용해 왔다"는 평이 있다. 그리고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최태민이 우병우의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1993년 이상달이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장인 이상달은 기흥컨트리클럽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원래 기흥컨트리클럽은 전두환 정부 시절 퇴직 경찰관의 모임인 재향경우회가 사업권을 받아 만든 골프장 사업체였다. 그런데 이 사업 지분의 과반수 이상이 이상달과 그 지인에게 넘어간 것이 드러나자, 1993년 5월 경찰은 이상달이 전직 치안본부장 옥기진 등 경우회 간부에 뇌물을 공여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3년 6월에는 전 치안감이자 경우회 이사인 옥기진이 이상달에게서 다방운영권을 넘겨받아 이익을 챙긴 게 드러났다. 이로 인해 전직 치안감인 옥기진은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때 우병우의 장인 이상달도 함께 구속되었다. 당시 이상달 회장을 구속한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장은 정홍원 국무총리였다.
1993년 7월에는 이인섭 전 경찰청장 역시 이상달에게 1천만 원을 받았다며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되었다.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21부는 이상달에게 배임 및 뇌물공여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했는데, 사건 자체가 전직 치안총수가 구속되는 등 큰 파문을 일으켰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범인 이상달이 달랑 징역 3년형에 그친 것은 검사 사위 우병우가 무마해준 덕이라는 말이 나왔다.
2008년 6월 이상달이 사망하고 2개월 뒤, 아내 김장자와 딸 넷 등은 기흥컨트리클럽의 운영사인 삼남개발의 대주주인 SD&J홀딩스를 설립해, 자신들의 지분을 회사소유로 돌렸고 현재 지분을 각각 20%씩 나눠 가졌다. 우병우 검사의 아내, 처형, 처제들은 강남역 인근의 부동산 1,020평을 상속 받았고, 우병우 검사 부부도 부동산 임대 업체 3곳의 주식을 상속받았다.
2008년 골프장들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 수사했다. 골프장들의 불법행위에 대해서 명성대로 샅샅이 뒤지면서도, 정작 처가의 기흥컨트리클럽에 대해서는 모로쇠로 넘어갔다. 기흥컨트리 클럽 안에는 건축물대장에 직원기숙사로 등록해 놓고 가족이 사적으로 사용하는 불법 별장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처가가 상속세를 납부하지 못하자 부동산들에 근저당이 설정되었고 결국 강남역 부동산을 매물로 내놨다.
2011년 3월 넥슨에 처가의 강남 부동산을 매각했다.(후술)
변호사 시절
2013년 5월 '홍만표 법률사무소'가 10층에 위치한 서울 서초동 오퓨런스 빌딩 1111호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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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년 뒤 조선일보 기자가 바로 이 건물 옥상에 기어올라가 우병우 본인의 황제소환 사진을 찍는 초대박을 터트린다.
이후 홍만표와의 ‘도나도나 다단계 사기사건’과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사건’ 등 몰래변론 의혹이 생긴 시점도 이 때다. 검찰은 홍 변호사와 우 수석이 공동 변론한 사건이 2013년 한 해 8건인 것으로 파악했다.
변호사가 된 후 모교가 있는 영주시의 재경 향우회에 얼굴을 내미는 등 정계 진출을 염두에 둔 듯한 행보도 보였다. 그에 대한 검찰 내부의 평가도 썩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특히 변호사로 개업한 후, 후배 변호사들에게도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이런 사유로 후일 인사권에 문제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리고 변호사 활동 때, 수임료 내역을 숨겨 탈세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변호사로 활동했던 2013년 ~ 2014년의 1년간 62억 순소득을 벌었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의 차남 조현문 전 부사장과 그의 형 조현준 사장의 ‘형제의 난’ 관련 민사사건을 수임하고도 해당 내역을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2014년 뇌물 공여 혐의 사건 등 검찰의 내사 단계에 있던 최소 3건을 수임한 것으로 확인됐다. 통상적으로 내사는 수사기관이 최대한 은밀하게 범죄 혐의 추적을 시작하는 단계여서 피내사자가 본인이 내사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 전 수석이 어떤 경위로 이 내사 사건을 수임하게 됐는지에 의구심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또, 변호사로 개업하자마자 2년 전 자신이 수사했던 사건의 핵심 피의자가 관련된 사건을 수임한 것으로 확인됐다.
민정비서관 시절
청와대 7시간 의혹이 불거지고 민정수석실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이 해임된 후인 2014년 5월 대통령비서실에 민정비서관으로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인사검증 결과 '불가' 판정을 받았는데 안봉근 제2부속실 비서관의 압박으로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평가 점수를 높여 준 것으로 드러났다.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재산을 공개했는데, 총재산액이 423억 3,230만 원이나 되어 화제가 되었다. 재산 대부분은 골프장을 운영하던 장인 이상달 회장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에서 일하면서 김기춘 비서실장으로부터 높은 신임을 얻었다. 청와대 문건유출사건 등 까다로운 일들을 무난히 마무리한 덕분이었다.이때 상관인 김영한 민정수석을 제치고 김기춘 실장에게 직보하는 일이 잦았다. 호랑이를 키웠네 이 때문에 김영한 민정수석이 국회 운영위원회 증인 출석을 거부한 뒤 사퇴하는 등 '항명사태'를 일으킬 정도였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조직을 다잡고 일을 밀어붙이는 기질 면에서 김기춘과 우병우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있다”고 하였다.
민정수석비서관 시절
2015년 1월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승진했다. 민정수석은 대통령 친인척을 관리하고 공직자 사정을 총괄하는 막중한 자리다. 휘하에 민정비서관, 공직기강비서관, 법무비서관, 민원비서관 등 4명의 비서관을 거느린다. 이들 비서관 밑에는 검찰·경찰은 물론이고, 감사원·금감원·공정위·기무사·행자부 등 사정 관련기관의 최정예 인력이 파견된다.
이로써 노무현 정부 시절 전해철 민정수석에 이어 40대 민정수석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민정수석 보다 직급은 한 등급 위지만 권한이나 위상은 비슷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으로 재직한 사람들이 당시 황교안과 김진태인데, 이들보다 10살 넘게 어린 나이로 민정수석이 된 셈이다.
당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소년등과(少年登科)를 해서인지 검사 때부터 추진력은 있으나 너무나 당돌해 반대세력이 많았다"라며 "하지만 청와대에서는 '잘한다'는 평가가 많고, 실제로 청와대 실세로 평가받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 당시 대구광역시 출신인 김수남이 대검 차장에 임명되고, 경북 청도군 출신인 박성재가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청와대 민정수석-대검 차장-서울중앙지검장'이 모두 TK(대구경북) 출신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말이 나왔다.
2015년 2월 검사 관련 인사들은 우병우 라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정의당 노회찬 의원은 편법으로 우병우의 측근들을 청와대에 근무시킨 후 검찰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5년 3월부터 김기춘 실장이 기획한 박근혜 정부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사정을 주도했다. 다만 두 사람이 직접 앞에 나서기는 어렵다는 판단 하에 이완구 총리에게 총대를 메게한다. 이완구는 '부패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2015년 3월 12일 포스코 사정을 시작으로 1주일 뒤 자원외교 비리와 관련해서 경남기업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인다. 그러자 경남기업 회장 성완종은 백방으로 탄원하다가 끝내 자살하고 만다. 결국 성완종 회장이 자살하면서 뇌물 리스트를 남겨 김 전 실장과 이 총리의 경우 도리어 곤혹스러운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관련기사 자원외교비리 관련 수사가 성완종 리스트로 인해 친박계로 번질 조짐을 보이자 몇몇 친이계 인사들에 수사만 집중적으로 벌리고 흐지부지 마무리 하는 모습을 보인다.
김기춘 실장의 후임으로 이병기 실장이 임명되었으나, 온건파인 이병기 실장을 제치고 강경파인 우병우 민정수석이 득세한다는 소문이 나돌더니, 결국 이병기 실장은 20대 총선 후 2016년 5월부로 사임한다.
2015년 봄 메르스(MERS. 중동 호흡기 증후군) 사태 당시, 감염을 피하려 가족들을 미국으로 도피시켰다. 당시는 박근혜 정부가 "괴담 유포자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던 때였다. 비서실장 이원종은 2016년 10월 21일 이에 대해 도의적인 문제이지 법률적인 문제는 아니며, 메르스를 피해 가족을 외국으로 보낸 것은 개인의 '행복 추구권'에 해당한다고 답했다.
2016년 4월 20대 총선은 야권의 분열로 새누리당이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직권상정을 할 수 있는 최저 의석수인 180석을 차지할 거라는 꿈을 깨고 여소야대의 형국을 받아들게 되었다. 이런 뜻밖의 상황에 가장 당황한 사람들 중에 하나가 바로 청와대였는데, 그 전에 미리 짜두었던 계획, 즉 180석 이상 차지해서 무소불위로 밀고 나가려던 계획이 완전히 꼬여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국민들은 최순실이란 이름을 들어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후 현실 적응이 되지 못한 반응들을 계속 보이기 시작했다.
의혹 제기와 논란
2016년 7월경부터 각 언론에 의해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리가 연쇄적으로 폭로되면서 사방팔방으로부터 사퇴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박근혜는 몇 달에 걸치는 기간 동안 우병우를 옹호하였고, 심지어는 "국기문란"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우병우를 보호하였다. 그리고 우병우 자신 역시 2016년 10월 20일 자신과 관련한 각종 의혹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하지 않을 일에 대해서 의혹이 제기됐기에 책임지는 게 맞지 않다”며 사퇴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16년 10월 26일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가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청와대 내부에서 비서진 총사퇴 카드가 나왔다. 그러나 안종범과 우병우 두 사람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10% 초반대까지 떨어지자, 2016년 10월 30일 안종범 정책수석 등과 함께 경질되었다. 그 다음날 텔레그램에 가입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카카오톡 사찰 논란 당시 텔레그램을 싫어했던 사람들이 텔레그램을 쓴다는 것에 조롱과 비웃음이 난무했다.
그리고 재산공개 되자마자 자신의 BMW 530i 차량을 처분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외에도 우병우의 가족은 제네시스 G80(우병우의 아내가 주로 사용했다고 하며, 우병우가 청문회 등에 출석할때 의전용으로 사용했던 차량이다.),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우병우가 주로 사용. 마세라티의 플래그십 기함), 포르쉐 911과 포르쉐 파나메라('코너링' 논란으로 유명해진 우병우의 아들이 주로 사용) 등 고가의 고급 차량들과 미니밴인 기아 카니발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우병우가 거주하는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우병우의 동호수로 등록되어 있는 차량이다.
같은 아파트 주민의 말에 의하면 포르쉐는 주로 우병우의 아들이 타고 다녔다고 하며, 제네시스는 주로 부인인 이민정이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청문회에서 포르쉐와 레인지로버는 본인 집의 소유가 아닌 처제 집의 차량이라고 주장하였다.
2016년 7월 18일 조선일보에서, 2011년 경 넥슨에 부탁하여 처가 부동산을 매입시켰는지 모른다는 의혹 기사가 게재되었다. 청와대 측은 이에 대해 즉각 반박 성명을 내고 조선일보를 상대로 고소를 시전했다. 그리고 <TV조선>은 윤상현 의원의 공천개입의혹 녹취록을 폭로했다.
사건 개요 : ‘말죽거리 잔혹사’ 선도부장 우병우, 반장 이석수
22일 대통령 직속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조사에 착수하겠다는 뜻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하면서, 특별감찰관제 도입 이후 감찰 첫 번째 대상자가 됐다. 이에 우병우 수석은 "주말만 지나면 여론이 잠잠해질 텐데 왜 특별감찰로 사건을 키우느냐"며 강력히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특별감찰은 재임 시절 벌어진 일들로만 국한되기 때문에 논란의 핵심인 처가 부동산 문제 등이 감찰 대상에서 벗어나자 검찰 조사 전 시간 끌기 아니냐는 논란이 빚어졌다.
2016년 8월 17일 MBC에서 이석수 감찰관이 감찰 내용을 특정 언론사에 누설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청와대는 바로 다음 날 정작 우 수석의 구설수에 관해서는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은 채 "특별감찰관이 감찰결과를 유출했으며 이는 국기문란이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청와대의 반응에 대해 주요 언론사들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개소리 하지 말라는 사설들을 내었다. 아래 사설 제목들을 살펴보면,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청와대의 반응에 강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선에 따라 논조가 심하게 갈리는 우리나라 주요 언론사들이 일치된 내용의 사설을 낸다는 것은, 그만큼 여론이 엄중하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특히 문화일보는 특별감찰관이 감찰결과를 유출한 것을 비난하는 사설도 내었지만, 그런 문화일보조차 청와대를 성토하는 데에는 예외가 아닌 실정이다.
• "검찰, ‘우병우 비리’ 수사 더 미적댈 이유 없다"(한겨레),
• "범죄 혐의 포착된 우병우 수석 즉각 경질해야"(한국일보),
• "피의자 된 우병우, 자기 수사 지휘하는 저질 코미디 할 건가"(경향신문),
• "검찰, 수사 의뢰된 '우병우 의혹' 철저하게 밝혀야"(중앙일보),
• "이석수 특감이 검찰 수사 의뢰한 우병우 수석 사퇴가 도리"(세계일보),
• "우병우 민정수석, 즉각 사퇴하고 검찰 수사 받아야"(동아일보),
• "대통령 최측근 우병우 수사 의뢰, '政權 도덕성'에 치명적 상처"(조선일보),
• "우병우 수석, 검찰 가기 전 거취 밝히는 게 옳다"(서울신문),
• "靑 ‘李특감 공격’은 本末 뒤집는 ‘우병우 감싸기’다"(문화일보).
청와대의 반응에 압박을 느낀 이석수 특별감찰관 측은 아래 논란 중 민정수석 시절의 일인 아들의 '꿀보직' 전보 논란, 가족회사 논란에 대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다. 민정수석의 비재임시 의혹에 관해서는 투기자본감시센터에 의해 고발되었다.(자세한 고발 내용) 또한 MBC가 정보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제3자 유출이나 해킹 등 불법이 저질러졌을 가능성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서석구가 대표로 있는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이라는가짜 천주교 신자 모임 보수단체는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특정 언론사 관계자에게 감찰 내용을 유출했다는 의혹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2013년 10월 결성되었는데, 친박인사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단체여서, 그 실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알고 보니 ‘친박’ 인사들 모임?
이에 대해 여당인 새누리당에서마저 "수사를 지휘해야 하는 민정수석이 수사를 받을 수는 없지 않는가" 하는 지적을 하면서 우병우 수석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고, 야권에서는 검찰 곳곳에 '우병우 라인'이 깔려 있어서 제대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지적하였다.
결국 우병우와 이석수 양측을 수사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검찰은 사건 배당도 하지 못한채 특검요청까지 고려하다가 8월 23일에야 특별수사팀을 구성하기로 결정한다. 더불어 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이에 대해 "예를 들어 검찰이 어떤 사건 수사를 하다가, 피의자 편에 있는 시민단체가 검사를 직권남용 등으로 고발한 사건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피의자와 검사를 같은 수사팀이 수사하나? 이건 말이 안 된다. 전형적 물타기다." 라는 지적을 했다.
8월 24일 윤갑근 대구고검장을 특별수사팀장으로 임명했다. 윤갑근 검사에 대해서는 '국정원 증거조작사건'과 '정윤회 문건수사' 등의 사건에서 정권에 면죄부를 던져줬다는 평을 받은 바가 있으며 우병우 전 수석의 사법연수원 동기이며 황교안 총리의 대학교 후배라는 점에서 이 사건의 적임자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와 별도로 24일 오후 참여연대가 우 수석을 공무집행방해죄와 뇌물죄, 업무상 횡령, 조세포탈 혐의로, 부인과 처가 식구들을 업무상 횡령 및 조세포탈, 부동산등기특별조치법위반 등 혐의로 대검에 고발했다.
그리고 28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게 일괄 사표 제출을 지시했으며, 이틀 후인 30일에 결국 사표가 수리되었다.
현재 계좌추적 중이며, 11월 4일 소환통보를 할 예정.
앞서 우병우의 부인 이민정에 대하여 땅 차명 보유·횡령 의혹을 조사하기 위한 검찰 출석 요구가 2차례 있었으나 깔끔하게 불응하고 있다가 우병우가 사퇴하고 검찰이 체포영장 청구를 검토하자, 30일에 비공개로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다.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임에도 비밀스럽게 조사를 받았고, 하루가 지난 다음에서야 조사사실이 알려졌다.
현재 최순실 외 기타인들의 국정농단을 방조한 직무유기 피의자로 입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