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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시작입니다. 문득 한 때 유행어였던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가 떠 올랐습니다.
살림살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단순히 금전적인 문제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었지요. 삶의 양이든 질이든 금년에는 작년보다 더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연초니까 좀 화사하고 즐거운
작품들을 만나 볼까 합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낸 줄리우스 르블랑 스트워트
(Julius LeBlanc Stewart / 1855 ~ 1919)의 작품 속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죠.
1897년형 푸조 브와츄레이터를 타고 블로냐 숲을 가는 골드스미스 자매들
The Ladies Goldsmith to the wood of Boulogne in 1897 voiturette Peugeot 80cmx125cm/1901
요즘이야 자동차가 널리다시피 했지만 20세기 초 자동차는 부의 상징이자 최첨단의 상징이었겠지요. 더구나
자동차를 모는 사람이 여성이고 보니 그림 속 여인들의 생활이 어떤지 짐작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골드스미스
라는 성이 어울립니다. 자동차 바퀴의 굴러 가는 모습과 바람에 날리는 스카프 그리고 모자를 잡은 여인의
동작에서 속도감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정작 스피드를 마음껏 즐기고 있는 것은 같이 탄 개입니다.
한쪽으로 들린 귀와 바람 때문에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있지요. 정말 늘어진 ‘개 팔자’입니다. 여인들이 개를
데리고 차를 타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군요.
스트워트는 필라델피아의 설탕사업으로 백만장자가 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훗날의 아버지의 행적을 보면
유능한 사업가이자 미술에 대한 감각도 뛰어 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트워트가 열 살이 되던 1865년, 아버지 윌리엄은 식구를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 파리로
이사를 갑니다. 그러니까 스트워트를 키운 것은 필라델피아가 아니라 파리가 되는 셈입니다.
스페인 소녀 Spanish Girl / 76.2cm x 114.3cm / 1875
연주가 끝났습니다. 구경을 하던 사람들을 향해 소녀는 작은 접시를 내밀었습니다. 조그만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소녀의 얼굴에는 일상의 나른함과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었습니다. 그러나 비굴함은 없습니다. 비굴함은
내 것을 나누어 주지 않고 남의 것을 넘볼 때 나타납니다. 적어도 소녀는 탬버린을 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주었겠지요. 그 것은 소녀가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당한 것이지요. 물론
받지 않았다고, 그 것도 나누어 준 것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 좀 부끄럽지 않을까요?
스트워트의 아버지는 포루트니 (M. Fortuny)와 마드라조 (R. Madrazo)와 같은 스페인 낭만파 화가들의 후원자
이자 미술품 수집가 역할을 했습니다. 또 초기 바르비종파들의 후원도 맡았는데 어린 스트워트에게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스페인 화가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실제로 그들로부터 직접 미술에
대한 지도도 받았습니다.
무도회가 끝나고 After The Ball / 100.3cm x 67.9cm / 1877
무도회는 끝났지만 무도회의 잔 떨림이 아직 여인을 놓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여인의 얼굴을 보니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도회에 참석 해 본적이 없으니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지만
동화 책 속에서는 연인과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더군요. 고개를 한 쪽으로 돌리고 있는 모습은 뭔가
깊은 생각이 필요할 때 나타나는 행동이지만 그림 속 여인의 표정은 망연자실한 그 것입니다. 화려한 의상과
예쁜 얼굴로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 남녀 사이이기는 하지만 보는 저는 안타깝습니다. 인연이 아니었다라는
말은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말이 됩니다. 살아보니까 그랬습니다.
핑크 소파 위의 여인 Lady On A Pink Divan / 49.5cm x 62.2cm / 1877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머리를 돌렸으니 이 여인도 심사가 불편하군요. 무슨 일인가 봤더니 바닥에 구겨진
편지가 보입니다. 그렇다면 여인을 저렇게 한숨짓게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구겨진 것은 편지보다
여인의 마음이겠지요. 그냥 헤어지자는 편지였으면 아마 구겨버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혹시 아시는지요? 구겨진 것은 아무리 잡아 펴도 흔적이 남더군요. 애초에 구기지 말아야겠지만
살면서 주먹 불끈 쥐게 되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닌데----, 그렇다면 잘 산다는 것은 끝없이 마음의 주름을
펴는 것이겠지요.
스트워트는 에콜드 보자르에 입학, 장 제롬 밑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섬세한 묘사와 대형 작품의 구성은
아마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겠지요.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 작품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1876년, 스물 한 살의
나이였을 때입니다. 처음에는 초상화를 주로 그렸지만 곧 풍속화와 이야기가 담긴 작품들을 시작했습니다.
1878년 스트워트는 드디어 파리의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합니다. 세인들의 평가 속으로 뛰어 든 것이죠.
세느강의 고요한 어느 날 Quiet Day on the Seine / 63.5cm x 100.08cm / 1880
엄마가 든 빨간 양산이 너무 매력적입니다. 아이는 낚싯대를 들었습니다. 배가 닿은 모습을 보니 배를 저어 온
사람은 아이입니다. 자신의 키 보다 훨씬 더 긴 노를 어떻게 저었을까나 ---. 강은 호수처럼 잔잔합니다.
흐름이 멎은 듯한 강은 자신의 위에 떨어진 모든 것들을 잘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인
여인의 모습이 강을 닮았습니다. 강은 여러 갈래가 모여서 하나를 이룹니다. 그 것은 우리가 꿈꾸는 완벽한
소통의 세계이죠. 수 많은 말들이 모여 하나의 말이 되는 세상, 그림 속에 엄마와 아이 사이에도 하나의 말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림 속 풍경은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살롱전에 처음 출품된 스트워트의 작품은 대중들의 인기와 관심을 끌었습니다. 물론 본격적인 성공은 그 후의
일이지만 나름대로의 성공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시작된 살롱전 출품은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가
풍속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친구였던 장 베로 (http://blog.naver.com/dkseon00/140058538242)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는데 같은 풍속화지만 그의 작품은 ‘확실히 미국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미국적’이라는
단어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는 아마 화려하고 풍요롭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큰 소리로 읽기 Reading Aloud / 130.8cm x 96.5cm / c.1883
책을 읽는 자세가 참 편안해 보입니다. 그러나 표정은 자세만 못하군요. 좋은 책을 같이 볼 수는 없고
아마 소리를 내어서 읽어 주기로 한 모양입니다. 읽는 사람은 글자를 읽지만 듣는 사람은 책 속에 펼쳐진
상상의 세계를 읽습니다. 왼쪽 여인의 눈은 이미 들려 오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가끔은 시각
보다는 청각이 영혼의 세계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묵상을 할 때도 눈을 감습니다.
보는 것이 방해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세상살이는 자꾸 귀를 닫게 합니다.
여인들의 화려한 의상과 고급스러운 실내의 묘사는 스트워트 작품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독서 Reading / 91.44cm x 64.77cm / 1884
작년 가을 허정도 선생의 ‘책 읽어 주는 남편’을 읽었습니다. 아픈 아내를 위해 곁에서 읽어 준 책의 내용과
서로 주고 받은 이야기 그리고 연결되는 저자의 일상을 담은 것이었는데 읽는 내내 가슴이 한 없이 편안하고
따뜻했습니다. 읽는 남편 옆에 누워 책의 내용에 따라 웃고 우는 아내의 모습과 그 모습을 바라보고 같이
공감하는 남편의 모습이 그림처럼 떠 올랐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 이렇게도
좋을 수 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림 속 남자는 여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고요한 숲, 무엇인들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을까요, 더구나 책 읽는 모습은 언제 봐도 좋은데요.
살면서 저럴 때도 있어야겠지요.
스트워트는 부유한 집안 환경으로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가 속해
있는 계층이 상류사회였기 때문에 당시 파리 상류 사회의 일상을 생생하게 묘사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지요.
때문에 그의 작품 속에는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들의 모습이 포함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파리의 엘리트를
위한 최고 초상화가 중 한 명이라는 세인의 평도 당연했습니다.
여우 사냥꾼들의 무도회 A Hunt Ball / 124.46cm x 200.66cm / 1885
여우 사냥꾼들의 무도회에 참석하는 남자들은 다홍색 상의를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우 사냥꾼들의
무도회에 젊은 아가씨들이 잔뜩 모였군요. 제목을 곰곰이 읽다가 웃고 말았습니다. 여인들을 보고 여우 같다고
하는데 남자들의 모습을 보니 ‘여우 사냥’에 벌써 성공한 ‘꾼’들도 보이고 아직 ‘사냥감’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람도 보입니다. (혹시 여성분들 오해 안 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또 한쪽에는 ‘사냥꾼’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여인들도 있습니다.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여우와 늑대’들의 무도회는 열기가 가득합니다.
이 작품으로 스트워트의 명성은 확고해졌습니다.
스트워트는 존 싱어 서전트와 함께 미국에서 건너온 화가로는 가장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둘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부유한 집 안에서 태어났지만 유럽에서 성장하고 교욱을 받고 명성을 쌓았다는 점들
이죠. 그런 스트워트에게 붙여진 별명 중 하나는 ‘필라델피아 출신 파리지엔’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영향력은
1894년 살롱전에 미국 화가들을 위한 코너를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테라스에서 On The Terrace / 100.3cm x 53.3cm / 1884
테라스를 볼 때 마다 그 공간이 주는 의미 때문에 생각이 많아 집니다. 테라스는 실내인가요, 실외인가요?
공간으로 보면 실외가 맞지만 몸의 위치를 생각하면 실내가 되는 것 아닐까요?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
보는 여인은 이미 외출 준비가 끝났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얼굴에는 곧 이어질 일에 대한
생각으로 미소가 걸렸습니다. 난간에 걸린 붉은 천이 혹시 여인의 마음은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저렇게 늘 붉은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인 뒤에 드리워진 커튼의 무늬, 정말 예쁘군요.
재미있는 편지 An Interesting Letter / 61cm x 77.5cm / 1890
이제는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 본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예전에는 좋아한다는 말도, 이제 끝장이다라는 말도
모두 편지를 통해서 했었습니다. 편지가 올 때쯤이면 하교 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편지함을 열고
편지를 꺼내고 정신 없이 읽고 또 답장을 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간혹 편지함에서 편지를 꺼내는
꿈을 꿉니다. 더 이상 손 글씨 편지가 오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꿈은 여전히 기억의 창고 속에서
그 때 언저리를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편지지 위에 또박또박 이야기를 적고 봉투에 넣어
보내는 날이 오겠지요. 아니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그림 속 여인들처럼 가슴을 두근거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1883년 살롱전에 출품한 ‘다섯 시의 차 모임’이라는 작품이 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스트워트의 명성은
확실해졌고 뒤를 이어 그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는 작품들이 계속 발표되었습니다. 1893년 시카고의 세계
콜롬비안 전시회와 1895년 베를린 국제 박람회에도 출품한 작품들은 대중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 무렵이
아마 스트워트 인생의 정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세례식 The Baptism / 201.3cm x 297.5cm / 1892
신부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유아세례를 받는 장면입니다. 세례를 축하 해주러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호인수 신부님의 시가 있습니다.
유아세례를 주며
호인수
나의 이 때묻은 두 손으로
하얀 네 이마에 물을 붓는다.
너를 품에 안은 너의 젊은 부모와
세례를 주고 있는 나는 이미
거짓과 탐욕과 미움으로 오염된 몸
영원히 꽃이기를 바라는
바람마저 부끄러워라...
훗날 네가 부모 되어
너의 아기 품에 안고 오늘처럼
내게 올 때
그때에도 우리들은 아기 앞에서
이렇게 부끄러우면 어쩌지?
그런데 그림 속 남자들의 표정은 지루해하거나 시큰둥합니다. 반면 여인들과 아이들은 진지합니다. 하느님이
어린이와 여인을 사랑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아주 세밀하고 화려하게 묘사된 이 가족의 정체에 대해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자료와 반더빌트 (Vanderbilt) 가족이라는 자료가 모두 있습니다. 반더빌트 가족이라면
그림 속 화려함이 이해됩니다. 반더빌트는 19세기 미국의 최고 부자였죠. 한 번은 손님들을 초대하고는
그 앞에서 100달러 지폐에 담배를 말아 피웠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이 1달러였으니까
‘대단한 만행(蠻行)’이었고 자본주의의 밑바닥을 보여 주여 준 것입니다.
스트워트는 1890년 대부터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았던 야외 누드화 작업도 시작하지만
90년대가 저물어 가면서 그의 작품도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대중들로부터도 평론가들로부터도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 시대의 좋았던 시절은 그림 속에 여전했는데 사람들은
이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죠.
요트 나무나호에서, 베니스 On the Yacht, Namouna, Venice / 142.2cm x 195.6cm / 1890
지중해에서 요트 놀이 Yachting in the Mediterranean / 110.5cm x 161.3cm / 1896
흔들리는 배 위에서 중심을 놓친 여인을 잡기 위해서 팔을 뻗은 노신사가 보입니다. 김훈 선생은 바다는 강의
종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는
털어 버리고 돌아 서는 곳이기도 하지만 한 가득 채워 오기도 하는 곳입니다. 그림 속 여인들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채워 올 것인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배가 가르고 나가는 지중해의 푸른 물결은 더 없이 좋군요.
저도 그림 속 요트처럼 그렇게 올 한 해의 푸른 물을 가르고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나라는 이름을 가진 요트는 제임스 고든 베넷 주니어의 것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뉴욕 헤럴드’의
소유주였습니다. 나중에 그가 물려 받게 되지요. 스트워트는 이 요트를 타고 항해와 관련된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스트워트는 적십자 엠뷸런스 부대에서 근무를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주는 참혹함을
목격해서인지 신경쇠약에 걸리고 이 병은 그에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20세기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도 병의 먼 이유가 될 수 있겠지요. 평생 독신이었던 스트워트는 1919년 파리에서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유해는 대서양을 건너 다시 태어난 곳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죽고 나서 머무는 곳은 키워준 곳 보다는 낳아 준 곳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