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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44)
첫 집정관 재직과 삼두 정치
집정관 선거에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몇 년 전에 카이사르와 함께 조영관직을 맡은 바 있다), 루키우스 루케이우스 세 후보가 출마하였다. 선거는 깨끗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지지를 청하였으며 부유한 루케이우스와 제휴하였으나, 체제의 주류 세력은 보수파인 비불루스를 밀어주었으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카토조차도 그를 지지하여 뇌물을 썼다고 한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는 기원전 59년에 임직하는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
카이사르는 이미 크라수스에게 정치적인 빚을 지고 있긴 하였으나, 폼페이우스에게도 손을 내밀었는데, 그는 자신의 퇴역병에게 준 동방의 정착지와 농지를 원로원에서 비준받기 위해 싸우고 있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70년에 함께 집정관직을 역임한 이래 적대 관계였으며, 카이사르는 만약 자신이 한쪽과 손을 잡으면 다른 한쪽의 지지를 잃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화해하고자 하였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은 충분한 자금과 더불어 공공 사업을 장악할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의 비공식적 정치 제휴를 제1차 삼두 정치라고 하는데,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와 폼페이우스가 결혼하면서 공고해졌다. 카이사르는 재혼하였는데, 이번 배우자는 다음 해 집정관으로 당선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딸인 칼푸르니아였다.
집정관에 취임하자 카이사르는 현대의 신문격인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를 광장에 붙였다. 악타 디우르나로 원로원과 민회의 의사록이 그대로 민중에 공개됨으로써 민중파인 카이사르의 입지는 더욱 강해졌다. 또한 공직자가 1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선물을 받지 못하게 하는 율리우스 레페르토리(공직자 윤리에 관한 율리우스 판례법)을 제정하여 공직 생활의 정화를 도모하였다. 카이사르는 빈민에게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농지법(lex iulia de agraria)을 제안하였는데, 그라쿠스 형제가 제출하려했던 농지법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유지 임차권은 상속할 수 있으나 20년동안 남에게 양도할 수 없다.
2. 국유지 임차 신청자격은 폼페이우스와 5년 종군한 자와 3명의 자녀를 둔 무산자로 정한다.
3. 250헥타르 이상 부정 임차지를 환수하는 비용은 폼페이우스가 미트라다테스 전쟁 후 국고에 납입한 2억 세스테르티우스로 한다.
4. 부정 임차지 반환에 따른 보상금 액수는 재무관이 결정한다.
5. 임차 농지 재분배는 20명의 상설위원으로 구성하고 법안 제출자는 그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는다.
카이사르는 그라쿠스 형제와는 달리 기존체제에서 개혁을 실시하려 했기 때문에 보수파를 회유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보수파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삼두의 강력한 힘을 이용했다. 삼두의 일파인 폼페이우스는 필요할 경우 무력도 불사하며 지지했으며, 크라수스도 마찬가지로 지지하여 삼두 정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불러들인 그의 병사들이 도시에 운집하였으며, 삼두정의 반대자들을 위협하였다. 비불루스는 불길한 전조(前兆)가 있었다고 선언하여 법을 무효화하려 시도하였으나, 카이사르의 무장 지지자들이 그를 포룸에서 쫓아내 버렸다. 비불루스의 릭토르(lictor)들이 들고 다니는 속간은 부러졌으며, 그와 함께 있던 호민관 두 사람이 다쳤고 비불루스 자신도 똥 한 바가지를 뒤집어썼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는 집으로 물러나 그 해 내내 틀어박혀 지내다가 이따금 나쁜 전조를 선언하였다. 이렇듯 카이사르의 입법을 방해하려는 시도는 별 소용이 없었다. 로마의 풍자가들은 이때부터 그 해를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해"라고 불렀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가 처음 선출되었을 때,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집정관 임기를 마친 다음 해에 맡을 전임 집정관 자리로 속주 총독직 대신 이탈리아의 목초지와 숲을 맡겨서 장래에 그의 권력에 제약을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피소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나중에 이 조치는 취소되고 삼두 정치가 입법시킨 '바티니우스 법'에 따라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이탈리아 북부)와 일리리쿰(발칸 반도 서부)의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나중에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도 맡겼고 그에게 4개 군단을 주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그가 맡을 전임 집정관 임기는 단 1년이 아니라 5년으로 정해졌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법정 기소가 면제되었다. 카이사르는 푸블리카누스의 속주세 예납제도를 폐지하여 속주세의 공정성을 실현하였다. 또한 폼페이우스가 정복한로마세계의 동방을 재편성하는 법안을 가결시키고 게르만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자'(socius e amicus populi romani)로 임명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집트에서 쫓겨난 상태였으므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부하인 가비니우스를 파견하여 그를 왕위에 복귀시켰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3천 탈렌트를 받았으나 크라수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이 돈의 절반을 써야했다.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 카이사르는 변칙적으로 정한 직무 때문에 기소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하고 서둘러 임지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속주 총독은 착취 나 위험한 군사 원정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휘하에 4개 군단이 있었으며, 임지 중 두 곳 일리리쿰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는 북방의 미정복지와 접경하고 있는데, 이곳의 독자적인 갈리아인들은 불안정한 상태로 알려져 있었다. 로마의 동맹인 갈리아의 하이두이족(Haedui)은 전에 하이두이의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아리오비스투스가 이끄는 게르마니아의 수에비족(Suebi) 분견대의 도움을 받은 다른 갈리아 부족에게 패하였으며, 헬베티족이 이주를 위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로마인들이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새로이 두 군단을 조직하고, 프로빈키아 통과를 요청한 헬베티족의 요구를 거절했다. 헬베티족은 하이두이족의 승인을 얻고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려 했으나 다툼이 벌어졌고 이에 하이두이족은 헬베티족을 적대하며 동맹국인 로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하이두이족의 족장 둠노릭스는 헬베티족과 연락을 취하다 카이사르에게 발각되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형이자 하이두이족의 족장 디비키아쿠스가 동생을 대신해 용서를 바라자 둠노릭스를 용서했다. 카이사르는 손 강에서 헬베티족을 기습공격했고 큰 손실을 입은 헬베티족은 디비코라는 강화사절을 보냈으나 그는 카이사르가 요구한 인질제공을 거부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카이사르와 헬베티족은 비브락테 전투에서 맞붙었다. 헬베티족은 밀집대형으로 진격하였지만 로마군이 투창공격을 퍼붓자 방패에 창이 박혀 방패를 버리고 싸워 크게 손실을 입었다. 보이족과 툴링기족이 곧 로마군을 공격했으나 제1열을 헬베티족과 싸우게 하고 제2열은 보이족과 툴링기족과 대적하게 했다. 이렇게 한바탕 치열한 전투에 이루어지고 결국 카이사르가 헬배티족을 격파했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에게 헬베티아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이루어지자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수에비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을 시도했다. 그때 로마군에서 게르만인에 대한 공포가 퍼졌으나 카이사르의 연설로 그들의 사기는 다시 올라갔다. 카이사르는 제10군단을 이끌고 아리오비스투스와 브장송에서 직접 만나 회담을 했고 그 협상은 게르만인들의 도발행위로 인해 결렬되었다. 이후 카이사르는 사절을 보냈으나 그들이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사로잡히자 그와 전투를 벌였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전투에서 질것이라는 게르만 여인의 점에 따라 전투를 바라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적군포로를 심문하여 이 사실을 알아내었고 게르만인들의 전투의욕이 적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더 과감하게 공격했고 아리오비스투스는 어쩔수없이 로마군과의 회전을 준비했다. 게르만족은 배후에 아녀자가 탄 마차를 포진시켰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로마군 우익은 적군의 공격을 버텨냈으나 좌익은 적군의 수적우세에 밀리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아끼는 부하이자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전투에 동원되지 않는 제3열 군사를 이끌고 좌익을 지원했다. 힘을 얻은 로마군의 공격에 게르만족은 다수가 죽고 아리오비스투스는 게르마니아으로 달아났다. 게르만인들의 배후에 강이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게르만족이 죽거나 아리오비스투스를 비롯한 소수의 요인들만이 전장을 탈출할 수 있었다. 아리오비스투스의 두 아내와 한 딸은 죽고 다른 딸들은 사로잡혔다. 이 해의 모든 전투를 끝내고 겨울에는 세콰니족 영토로 군대를 물렸는데 이는 즉 카이사르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바깥 영토에 관심을 둔 것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
겨울 동안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신규로 2개 군단을 또 편성하여, 임기 2년째에 카이사르는 처음보다 배가된 군사력을 갖추었다. 이런 자의적인 군 편성은 적법성이 의심스러웠는데, 키살피나 갈리아인은 로마 시민이 아니었기 대문이었다. 작년 카이사르의 군사 활동에 대응하여 갈리아 북동부의 벨가이 부족들이 무장을 시작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와중에 레미족은 반군들을 배신하고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다. 수에시오네스족장 갈바를 중심으로 통합된 벨가이 동맹군 29만명은 레미족의 영토에 주둔하고 있던 카이사르와 레미족을 향해 귀갑대형을 이루고 진격해왔다. 로마군 진영 근처에 비브락스(Bibrax)라는 이름의 레미족 도시가 있어 벨가이군은 이 도시를 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브락스의 상황이 위급해지자 카이사르는 누미디아인과 크레타인으로 구성된 궁수들과 발레아레스 투석병을 비브락스에 구원병으로 보냈다. 벨가이군은 이들의 구원에 힘을 얻은 레미족의 거센 반격에 공성을 중단하고 로마군 진지를 공격했다. 로마군 진영은 강을 끼고 두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벨가이인의 공격을 받는 쪽은 카이사르가 직접 지휘했고 강 건너편의 지휘는 사비누스가 맡았다. 벨가이군은 강을 건너 사비누스를 공격하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진지 안에 있던 다리를 건너 강 건너편에서 접근해오는 적과 싸웠다. 로마군은 물속에서 움직임이 둔해진 벨가이군을 무찔렀다. 벨가이인들은 패전소식과 식량부족에 통합된 벨가이 병력을 각 부족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각 부족으로의 귀환은 소란스러운 것이 패주에 가까워 벨가이인들은 카이사르가 보낸 기병대의 공격을 받고 다시 크게 전사자를 내었다.
카이사르는 적군 연합부대를 크게 격파하자 차차 각 부족을 하나씩 정복하였다. 우선 수에시오네스족을 격퇴하고 벨로바키족과 암바니아족과 강화를 맺었다. 벨로바키족은 부족내의 반로마파가 모두 브리타니아에 도망쳐 버렸다고 주장했다. 로마군은 이어 벨가이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을 가진 네르비족과 싸우게 되었다. 그들은 매복해 있었으며 로마군의 군량수송부대에 첩자를 두었다. 카이사르가 그들의 영토에 도착하자 기습공격을 하여 로마군의 허를 찔렀다. 로마 기병대는 이미 격파되었고 카이사르도 한번에 여러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로마군은 카이사르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빠르게 전투를 시작했다. 로마군의 제9군단과 제10군단은 좌익에 포진해 있다가 아트레바테스족을 쳐부수었고 제11군단과 제8군단은 우익에서 비로만두이족을 격파했지만 로마군 중앙의 제12군단과 제7군단은 좌우익이 빠져나가 노출된 곳에서 보두오그나투스가 이끄는 네르비족의 공격을 받았다. 카이사르는 중앙의 병사들 간의 대열이 좁아 전투에 방해가 됨을 알아차리고 대열을 넓힐 것을 명령했다. 방진을 짤것을 지시했고 로마군은 측면과 배후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라비에누스가 제10군단을 보내 이들을 지원하러 오자 네르비족은 열세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로마군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로 네르비족의 전투력은 궤멸되었고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볼모제공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어 아투아투키족의 수도인 아투아투카를 공격했고 로마군의 공성기에 놀란 아투아투키족은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무기를 버릴 것을 요구했고 아투아투카의 전체 무기 중 삼분의 일 가량만 버려졌다. 아투아투키족은 남은 무기를 들고 로마군을 기습했으나 4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였다. 카이사르는 5만명이나 되는 아투아투카 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넘겼다. 카이사르의 공적에 로마 원로원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15일 감사제를 올렸다. 그러는 사이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지휘하는 1개 군단이 아르모리카 반도(Armorica)의 부족들을 정복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기원전 56년 봄에 삼두 정치 인사들은 갈리아 키살피나의 루카에서 회합을 열어 만났다. 로마는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클로디우스의 민중 선동으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사이가 나빠진 상황이었다. 회의에서 삼두 정치를 갱신하고, 카이사르의 전임 집정관(총독) 임기를 5년 더 늘렸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다시 집정관에 오르기로 하고 이후에는 카이사르처럼 장기 전임 집정관직을 맡기로 하여, 임기를 5년으로 크라수스는 시리아를,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맡는 것으로 정하였다. 아르모리카 정복은 카이사르의 부하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베네티족을 해전에서 무찔르면서 완수하였으며, 젊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남서부의 아퀴타니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56년에 군사 작전을 종결하면서, 해안 저지의 모리니족(Morini)과 메나피이족(Menapii)만 저항하였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의 최강의 부족 수에비족에게 밀려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마니아의 우시페테스족(Usipetes)과 텡크테리족(Tencteri) 문제를 교섭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우비족(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은 게르만 부족)의 영토를 제공할 것이니 갈리아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두 게르만 부족은 그 제안을 고려할 것이니 사흘간의 여유를 줄것을 간청했고, 카이사르는 이것이 게르만인의 기병대가 아직 갈리아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물을 보급해야 한다면서 군대를 조금만 전진시키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대로 카이사르는 로마군 기병대를 전진시켜 그들에게 게르만인들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오게 했다. 게르만 기병의 급습을 받아 기병을 74기나 잃었다. 게다가 이 희생자 중에 피소라는 이름의 카이사르의 갈리아인 친구가 있었다. 교섭이 깨졌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게르만인들을 공격했고, 병력이 43만명이나 되는 두 부족은 전의를 잃고 대부분이 죽거나 일부가 게르마니아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추격하여 라인강에 가교를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으며 돌아올 때 다리를 해체하였다.
이 전투가 로마에 전해지자 카토는 카이사르가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게르만인을 기습한 것은 부당한 처사이고 따라서 카이사르를 게르만족에게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늦여름에 모리니족과 메나피이족을 정복하면서 브리타니아 섬(오늘날의 브리튼)에 건너가서 기원전 57년에 벨로바키의 반로마파가 브리타니아에 달아났으며 지난 해에 브리타니아 사람들이 베네티족을 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섬에 대해 잘 몰랐으며, 켄트에 상륙 거점을 얻어 어렵게 브리타니아인을 격파하였으나 기병대가 도착하지 못하여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또한 배가 파손되어 이를 복구해야 했기 때문에 더 나아갈 수 없어서 겨울에 갈리아로 돌아갔다. 다만 브리타니아인들을 다시 격파하고 강화를 맺은 다음, 인질을 요구하여 이들을 갈리아로 보내겠다고 하여 브리타니아를 떠나는 명분을 명확히 했다.
이듬해 그는 더욱 준비하고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에 돌아왔으며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내륙으로 진격하였으며, 트리노반테스족(Trinovantes)의 만두브라키우스 왕과 동맹을 맺고, 그의 적이자 브리타니아 연합군 총사령관인 카시벨라우누스와 전투를 벌였다. 카시벨라우누스는 부족간의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자로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생각보다 강한 것을 알자 게릴라전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통상적인 것과 다르게 기병을 먼저 보내지 않고 보병과 같이 진격시키게 하여 브리타니아인의 기습공격을 막아내고 곧 반격해 그들을 격파했다. 카이사르가 카시벨라우누스의 본거지를 공격하자 카시벨라우누스는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로마군을 격퇴하지 못했다. 결국 브리타니아인들은 본거지에서 로마군에게 패하였고 카시벨라우누스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에부로네스족(Eburones)의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반란이 퍼져 작황이 나빠지자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군사 작전에 나서야 했으며, 전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당시 로마군의 군량이 부족해져 카이사르는 군대를 분할하여 갈리아의 여러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그 중 군단장 사비누스와 코타가 이끄는 9천명의 로마군은 에부로네스족의 땅에 배치되었다. 에부로네스족장 암비오릭스는 로마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사비누스와 코타에게 로마군을 공격한 것은 본의가 아니었고 지금 갈리아 각지에서 크게 반란이 일어났으며 자신들이 로마군을 호위할테니 진영지를 떠나고 카이사르와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그전까지 로마에 우호적이던 암비오릭스의 속임수에 두 군단장은 속고 말았다. 사비누스는 진영지를 떠날 것을 주장했고 코타는 진영지를 지키며 버티는 것이 낫다고 했으나, 결국 사비누스의 뜻대로 진영지를 떠나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진영으로 향했다. 행군 도중에 그들은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라비에누스의 진영지에 도착했다.
암비오릭스의 선동으로 네르비족과 아투아투카족은 퀸투스 키케로의 진영을 공격했고 그 수가 6만면에 달했다. 당시 병이 든 키케로는 적의 십분의 일 밖에 미치지 못하는 병력으로 분전했고 키케로의 구원요청을 받은 카이사르는 7천명의 군대를 급조하여 키케로의 진영지에 도착한 뒤, 적군을 유인하여 격파했다. 많은 수의 갈리아인이 죽었으나 로마군의 손실은 없었다. 카이사르가 키케로의 병사들 중에 다치지 않은 자가 전체의 10분의 1 정도였다. 한편 라비에누스는 트레베리족의 인두티오마루스를 격파하고 죽이는데 성공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로 다시 진격하고 암비오릭스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암비오릭스를 무찌르면서 카이사르는 이제 갈리아를 평정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반란음모를 꾸민 카르누테스(Carnutes) 족장 아코를 사형시켰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 있을 때,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카이사르는 조카의 딸인 옥타비아를 남편 가이우스 마르켈루스와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그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거절하였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침공하다 카라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로마는 폭력 사태로 치닫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비상 수단으로 1인 집정관에 임명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정적인 퀸투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고,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아 일단 질서를 회복하였다. 이로써 삼두 정치는 결렬되었다.
기원전 52년, 족장을 잃은 카르누테스족은 본거지인 케나붐에서 로마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갈리아 중부 아르베르니족(Arverni)의 베르킨게토릭스가 일으킨 반란이 또 한번 크게 번졌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부족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초토화 작전으로 로마군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북이탈리아의 카이사르가 중부 갈리아에 있는 그의 군단과 합류하였고, 비투리게스족의 수도인 아바리쿰이 카이사르에게 점령되었지만 반로마군의 총사령관 베르킨게토릭스의 입지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족의 수도인 게르고비아로 향했고 이즈음에 로마의 동맹부족이었던 하이두이족이 베르킨게토릭스에게 돌아섰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족의 근거지인 게르고비아를 공격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게르고비아를 한 차례 습격하고 철수하려 했다. 그러나 습격한 뒤 퇴각하는 과정에서 선발대에게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이들을 공격하여 700명을 전사시켰다. 그중 로마군 백인대장은 46명이나 죽었다. 게르고비아 공략이 실패하자 카이사르는 퇴각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추격하여 한 차례 회전이 벌어졌다. 갈리아 기병이 세 갈래로 나뉘어 공격했으나 카이사르는 방진을 이루어 이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전투에서 패한 베르킨게토릭스는 만두비족의 도시 알레시아로 들어갔다. 카이사르는 이를 알고 즉시 알레시아를 포위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전역에 지원군을 요구하였고 이에 26만에 달하는 대군이 편성되었다. 이들은 알레시아를 포위한 카이사르의 군대를 다시 포위하였다. 알레시아의 농성군은 7만명으로, 갈리아전력은 총 33만이었다. 반면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12개 군단 5만명이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이중포위전 알레시아 전투가 기원전 52년 9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카이사르가 공들여 준비한 공성 작전으로 양쪽의 갈리아군은 완전히 차단되어 농성하는 갈리아인들은 지원군이 도착한 줄도 몰랐다. 전투는 기병전으로 시작되었고, 카이사르의 게르만 기병의 활약에 갈리아 기병은 퇴각했다. 기병전에서 패한 후, 갈리아인들은 공성기를 이용하여 로마군 진지를 공격했으나 재빠르고 유연하게 대처한 로마군에게 패배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 베르카시벨라우누스가 이끄는 6만명의 갈리아 정예병이 다 완성되지 않은 로마군의 북쪽 포위망을 공격해왔지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를 보내 이들을 막게하면서 포위망 여기저기에 지원군을 보냈다. 북부에서 적이 강하게 공격해오자 카이사르는 신속하게 북부 전선에 도착했다. 카이사르와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치열하게 싸웠고 카이사르는 기병대를 갈리아군 배후로 보내 그들을 격파하였다.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생포되었고 부관은 전사하였다. 6만명의 정예병은 궤멸되었고 나머지 갈리아인들도 각자의 부족으로 패주하였다. 이를 안 베르킨게토릭스는 마침내 로마에 항복하였다. 이듬해에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났으나, 이로써 갈리아는 사실상 정복되었다.
전임 법무관 지위의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전쟁 동안 가장 고참인 군단장이었다. 그 밖에 두각을 드러낸 카이사르의 다른 부관으로는 친척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형제인 마르쿠스, 키케로의 동생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데키무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전쟁 기간 동안 로마군이 3백만 명의 적과 싸웠으며, 그 가운데 1백만은 죽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300개 부족이 복속되었으며, 800개 도시가 파괴되었다.(물론 과장된 기록이다.) 아바리쿰(부르주) 시의 전체 주민 총 40,000명이 살육당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헬베티인 368,000명이 고향을 떠났으며, 이 가운데 92,000명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군 작전 이후 총 110,000명만이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일단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보고는 선전의 목적을 띄고 있었으며, 고대 문헌에서는 보통 숫자를 과장해서 쓰기 때문에 적 전투원의 총 수효는 특히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푸르거-군티(Furger-Gunti)는 헬베티 군대의 병사 수가 60,000명이 넘는 것은 기록된 전술을 고려했을 때 전혀 있을법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실제 수효는 총 이주민 수가 160,000명에 전투원 수는 40,000명 정도로 추산하였다. 델브뤽(Delbrück)은 전체 주민 수가 100,000 이하일 것이며, 그 가운데 전투원은 16,000명에 불과할 것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보면 켈트인 군대의 병력은 당시 30,000명 정도였던 로마군의 절반 수준이 된다.
갈리아 전쟁은 서유럽에 로마문화를 전파하는데 막강한 영향을 주었다. 갈리아 전쟁 이후, 갈리아는 빠르게 속주화되었고 로마의 문명을 받아들였다.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정복한 전 지역을 "갈리아 코마타(Gallia comata)"라는 하나의 속주로 두었다. 결국 갈리아 일대는 카이사르의 세력기반이 되어 그가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일조했다.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에게 전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으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두 번째로 출마하려는 집정관 선거에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하였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면책권이 없거나 군사력이 없는 상태로 로마에 들어간다면 기소되고 정계에서 밀려나리라고 생각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7일,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켈루스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켰고, 그 전권을 위임받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과 대역죄 혐의로 고발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단 일개 군단만 이끌고 루비콘 강(이탈리아의 북방 경계선)을 넘어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카이사르가 직접 저술한 「내전기」에서는 루비콘 도하가 단순히 '아리미눔 도착'으로만 적혀있으며, 이때 카이사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아테나이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인 "주사위를 던져라!(ἀνερρίφθω κύβος)"를 그리스어로 인용하였다고 썼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문장을 라틴어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고 썼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휘하의 10개 대대 4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넌 후, 제일 먼저 아리미눔에 입성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는 5개 대대를 떼어줘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레티움을 공격하고 쿠리오에게는 3개 대대를 주어 아드리아 해를 따라 피사우룸, 파눔, 안코나를 공격하게 했다.
1월 12일 쿠리오는 피사우룸, 1월 13일 파눔, 1월 14일에는 안코나까지 함락시키고 1월 15일 안토니우스도 아레티움에 입성했다. 이에 원로원에서는 현직 법무관 로시우스와 카이사르의 친척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최종 권고를 전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후임자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임명해 2개 군단이 주둔한 카푸아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로시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통해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양자 회담을 벌이고 동시에 군단 해산을 제안하는 내용의 서한을 폼페이우스에게 보냈다.
그리고 1월 17일 폼페이우스는 수도 로마를 버린 채 200명에 달하는 상당 수의 원로원 의원들과 각종 개인 재산과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 카토 등과 함께 노예, 하인들을 데리고 남하했으나 국고에 들어 있는 재산은 채 옮기지 못하고 도주했다. 이 때문에 국고 재산은 고스란히 남았고 1월 20일 쿠리오는 아구비움에 입성해 플라마니아 가도의 요충지를 얻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이때 폼페이우스의 답장을 받았으나 그가 제안한 양자 회담을 묵살시키고 자신에게만 군단해산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게다가 그는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떠나는 시기를 밣히지 않는 것은 그가 계속 본국에 군사력을 가지고 본국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낸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와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백인대장을 지내고 오리엔트 원정에도 참전한 루키우스 푸피우스가 아욱시뭄에서 군사를 이끌었으나 주민들의 호응에 실패하고 카이사르는 아욱시뭄 근처 킹쿨룸에서 보급을 해 2월 3일 아욱시뭄에 입성했다.
2월 5일 카이사르는 피르뭄에 입성하고 제12군단도 참여했으며 아스쿨라네움으로 행군했다. 이에 기원전 57년의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가 10개 대대를 이끌고 지키고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오자 도망쳐버려 2월 15일 아스쿨라네움도 쉽게 함락되었다.
그러자 폼페이우스가 급파한 비불리우스 루푸스가 13개 대대가 되는 병력을 모아 코르피니움에 주둔했고 곧이어 아헤노바르부스가 20개 대대를 이끌고 행군해 3.3개 군단에 달하는 33개 대대가 모일 예정이었다. 이에 루푸스는 폼페이우스가 있는 루케리아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폼페이우스는 오히려 더 남쪽인 카노사로 남하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 근처의 술모나 주민들의 호응도 얻고 남프랑스 속주에서 갈리아인으로 구성된 22개 대대도 합류해 결국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치려던 아헤노바르부스는 붙잡혔다가 카이사르의 배려로 석방되고 2월 21일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에도 입성했다. 카이사르의 행동에 대해 키케로는 "아군을 버리는 폼페이우스와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는 얼마나 다른가" 라며 카이사르에게도 편지를 보내 카이사르의 관용을 칭찬했다. 카이사르는 답변했다.
“나를 잘 이해해주는 당신이 하는 말이니까, 내 행동에선 어떤 의미의 잔인성도 찾아볼 수 없다는 당신의 말은 믿어야 할거요. 그렇게 행동한것 자체로 나는 이미 만족하고 있지만 당신까지 그리 찬성해주니 만족을 넘어 기쁘기 한량없소.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해도, 나는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거요.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브룬디시움으로 도망치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일행을 이끌고 2월 25일 항구 도시인 브린디시움에 도착했다. 카이사르가 브룬디시움에 도착했을 때, 폼페이우스에게 양자 회담을 통한 강화를 제안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온 이들을 배신하는 짓을 벌일 수 없다며 강화를 거부했다. 6개 군단 60개 대대로 불어난 카이사르 군단이 오는 가운데 잦은 탈영으로 50개 대대로 줄어든 폼페이우스는 3월 17일 카이사르의 저지선을 뚫고 그리스로 본국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를 무혈제패했지만 폼페이우스를 놓쳐 내전은 장기화되었다.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철수시키려고 해안의 모든 배를 이미 쓸어가버린 터라 카이사르는 해군력이 없었고, 폼페이우스의 7개 군단이 주둔한 이베리아 반도는 평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히스파니아로 진로를 돌리기로 하였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로마의 장관으로 남겨놓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호민관으로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을 맡겨놓고, 카이사르는 파비우스의 3개 군단과 합류하여 히스피니아로 진격했다. 카이사르군은 적의 진채를 공격하였다. 카이사르군은 적의 유인책에 빠져 위기에 빠졌으나 특유의 용맹을 발휘하여 위급에서 벗어났다. 카이사르군은 200명 가량의 적을 전사시켰으나 진채를 빼앗지 못하고 그들도 80명의 사망자를 냈다. 곧 카이사르의 6개 군단은 세그레 강의 홍수로 고립되었고 군량보급도 차단되었다. 이런 상태로 한달을 버틴 카이사르는 운하를 파서 물길을 바꾸어 고립에서 벗어났고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가 이끄는 9만명의 폼페이우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식량부족에 빠트리게 했다. 폼페이우스군의 군량이 부족해지자 현지병력의 탈영이 심해졌고 아프라니우스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군의 도주는 카이사르에게 계속 저지되었으며 그들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폼페이우스군의 일개병사들은 카이사르에게 항복을 바랬고 아프라니우스의 아들마저 카이사르군과의 화해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자 페트레이우스는 화해를 거부하며 병사들의 전의를 다시 일깨웠고, 폼페이우스군 진영에 들어온 카이사르의 병사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식량부족으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다. 카이사르는 아프라니우스 휘하 병사들의 군대해산을 명하고 모두 석방시켰다. 또 다른 히스파니아의 사령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싸워보지도 않고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히스파니아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법무관 레피두스를 시켜 독재관에 취임했다. 독재관에 취임한 그는 술라가 반역자로 규정하여 살생부에 올라 망명생활을 하는 자들에 대한 추방형을 폐지했다.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카이사르 함대가 아헤노바르부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 마실리아 연합함대를 격파하였고 폼페이우스의 편을 든 마실리아는 결국 카이사르군에 항복하였다. 한편, 아티우스 바루스는 아욱시뭄에서 아프리카로 도망쳐 스스로 총독을 자칭한 다음, 정식 총독으로 임명된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가 아프리카에 상륙하지 못하게 막았다. 심지어 투베로의 병든 아들도 아프리카 땅에 상륙하지 못하게 했다. 카이사르의 부장 쿠리오가 이끄는 4개 군단은 시칠리아 점령을 완수한 뒤 아프리카에서 아티우스 바루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공격했다. 바루스군은 패했고 쿠리오는 카이사르군의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라고 불리었다. 쿠리오의 군대에 아프리카인들이 퍼트린 역병이 퍼지고 탈영병도 몇 있었지만 쿠리오는 연설로 병사들을 단결시키고 코르넬리우스 진지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누미디아왕 유바를 우습게 본 쿠리오는 유바가 렙티스 사람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회군하였고, 유바왕의 부하 사부라가 소수의 군대를 지휘한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바그라다스 강 전투에서 4개 군단과 함께 포위당하고 말았다. 쿠리오는 도주를 권하는 장교의 제안을 거부하고 이렇게 외쳤다. "카이사르의 군대를 잃고 카이사르에게 돌아갈 수 없소" 이 말을 외치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보병들도 모조리 몰살당했다. 바루스는 유바왕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들을 살려주기를 요구했으나 유바는 몇명을 제외하고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는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려 갈리아 군단을 이끌고 폼페이우스군과 맞섰으나 노련한 폼페이우스의 해군장수 리보에게 패하고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이후 카이사르는 스스로 집정관 선거를 열어 두 번째로 집정관에 올랐으며(동료 집정관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였다), 그런 다음 11일 뒤 독재관직에서 사임하였다.
기원전 48년 1월 4일에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고자 동방으로 향했는데, 배가 부족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직접 이끄는 제1진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진으로 나누어 아드리아 해를 건너기로 했다. 제1진은 먼저 출발하여 폼페이우스 해군의 방해를 피하고 대부분의 병력이 그리스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들은 1월 5일에 오리쿰을, 1월 7일에 아폴로니아를 점령했다. 폼페이우스 해군 총사령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군 제1진의 무사통과에 격분하여 해안경비체제를 강화했다. 심지어 총사령관인 비불루스가 배 위에서 자는 등 임전태세를 편 까닭에 카이사르군 제2진은 출항도 하지 못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압수스 강에서 폼페이우스의 지상군와 대치했으나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전투를 치르지는 않았다. 동시에 자신의 진영에 머무르던 비불리우스 루푸스를 폼페이우스에게 보내 강화를 제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수뇌진과의 타협이 실패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병사들과 타협해 볼 생각으로 휘하 장수인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를 보냈다. 바티니우스의 제안에 폼페이우스군 병사들은 이에 반응하였으나 곧이어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나온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바티니우스를 비난하자 병사들은 화가 나 창을 회담장에 던졌다. 이에 몇명의 카이사르의 장수들이 부상을 입었다. 라비에누스는 선언했다.
"카이사르의 목을 가져오기 전에는 강화란 없다."
카이사르는 비불루스와 만나 회담을 벌이려 했으나 카이사르를 매우 싫어하는 비불루스는 카이사르를 만나기를 거절하고 리보가 카이사르와 회담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리보와의 회담으로 강화성사에 기대를 걸었으나 이것도 실패했다. 비불루스가 병사한 후로는 폼페이우스 해군의 감시도 느슨해져서 안토니우스의 제2진도 브룬디시움을 습격한 리보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탈리아를 떠나 3월 26일에 에피루스 북부의 항구 닌페움에 상륙하여 리수스를 점령한 뒤 4월 3일에 제1진과 합류했다. 카이사르는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2개 군단과 500기를 주고 마케도니아로 보냈고,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1개 군단과 200기를 주어 테살리아로, 사비누스에게도 5개 대대와 약간의 기병을 주어 아이톨리아로 보냈다. 그런다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본진인 디라키움과 페트라를 포위했다. 군사의 수가 적음에도 폼페이우스의 진영보다 보루의 수가 많고 더 긴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렇게 몇 달간 대치한 뒤에 폼페이우스군은 말먹이가 부족해지자 카이사르의 포위망을 공격하였다. 당시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으로 떠나 카이사르의 진영에는 총사령관이 없는 상태였다. 원래 카이사르가 직접 포위망 북부를, 안토니우스가 남쪽 포위망을 맡았는데 사령관이 없는 북부전선을 루키우스 술라의 조카이지만 카이사르파인 푸블리우스 술라가 지휘했다. 총 여섯군데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폼페이우스군은 카이사르군의 뛰어난 분전으로 단 하나의 포위망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특히 카이사르의 백인대장 스카이바는 200명으로 폼페이우스군 2만5천명의 공격을 네시간이나 버텨냈으며 스카이바 자신의 방패에는 화살구멍이 120개나 뚫려있었다. 결국 푸블리우스 술라의 구원을 받아 폼페이우스군을 격퇴했으나 술라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술라가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비난했으나 술라는 총사령관이 없는 이상 그가 지시하지 않은 것을 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카이사르 진영에 로우킬루스와 에구스라는 갈리아 트란살피나의 알로브로게스족 귀족 출신 기병 장교가 있었는데, 그들은 휘하 기병들의 급료와 전리품을 강탈하여 부하들의 원망을 샀다. 결국 기병들이 카이사르에게 이들의 부정을 고발하자 카이사르는 형제를 불러 그들을 나무랐다. 전투가 끝나고 벌을 받을 것 같자 이 형제는 폼페이우스에게로 달아났다. 카이사르군의 첫 탈영병이었다. 기원전 48년 7월 10일 폼페이우스는 이들로부터 카이사르군의 정보를 듣고 방어설비가 약한 카이사르의 포위망 남쪽을 공격했다. 폼페이우스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함락시키며 카이사르군 장교인 마르켈리누스가 이끄는 제9군단을 격파하였다. 제9군단의 제1대대에서는 백인대장 6명 중 5명이 죽을 정도로 위기에 빠졌고,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12개 대대의 구원을 받아 간신히 궤멸을 면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진영을 공격함으로써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이 폼페이우스군이 만든 측벽을 방벽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공격하였고 이로인해 폼페이우스가 구원병력을 데려올 수 있게 시간을 제공하게 되었다. 결국 폼페이우스의 증강된 병력에 두려움과 공황상태에 빠진 카이사르군은 1천명의 사상자를 내며 달아났다. 전투 후,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 포로를 조롱하고 모조리 죽였다.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폼페이우스가 승리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본거지인 디라키움 일대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그리스 동부에 위치한 테살리아로 유인하면서 7월 24일 도미티우스와 합류했다. 그리고 테살리아의 도시인 곤피스와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하자 라리사를 제외한 모든 도시가 카이사르를 지지하였다. 카이사르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다시 강화를 제안했지만, 스키피오는 망설이다가 파보니우스의 혹독한 비난을 받고 제안을 거절했다. 폼페이우스는 테살리아에서 스키피오와 합류했다. 폼페이우스의 진영은 승리에 도취되어 전투에 관한 논의보다는 승리 후에 얻을 보상이나 직위, 카이사르파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아헤노바르부스와 렌툴루스 스핀테르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카이사르가 취임하고 있던 최고 제사장에 자신이 더 적임자라고 논쟁을 벌였다. 렌툴루스는 자신이 가장 고령임을, 스키피오는 자신이 폼페이우스의 장인임을, 아헤노바르부스는 수도에서의 명망을 들며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했다. 비불리우스 루푸스는 아프라니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카이사르와 싸울때 휘하 병사들을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라비에누스는 결전을 망설이는 폼페이우스에게 결전을 치를 것을 주장했다.
"저들이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했던 군대였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때 살아남은 자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정예병사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가을을 보내는 동안 많은 자들이 건강을 잃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본토에 남겨졌습니다. 게다가 적군이 보유한 최고의 병사들은 디라키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습니다."
양군은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만났고 이때 카이사르군은 군단병이 22000명, 기병이 1000기였던 반면에 폼페이우스군은 군단병이 47000명, 기병이 7000기였다. 카이사르는 고지대에 있던 폼페이우스를 평원으로 이끌고 결전준비를 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연설했다.
“잠시 행군을 멈추어라. 그리고 그대들이 매일같이 바라던 적과의 전투를 생각하라!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때가 찾아왔다. 그대들의 마음은 이미 전장에 있지 않은가?”
폼페이우스는 압도적인 기병력으로 카이사르군을 포위섬멸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나의 작전에 귀를 기울이면 더욱 확고한 신념을 품고 전투에 임하게 될 것이오. 본인은 아군기병에게 양쪽 군대의 간격이 좁아지면 카이사르군의 우익으로 돌아 노출된 측면을 공격하고 후방의 제 3열을 포위하여 카이사르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라고 명령하였소. 그렇게 되면 적은 우리군이 무기를 투척하기도 전에 패주하고 말것이오. 이 작전이 맞아 떨어진다면 우리 군은 군단의 피해도 없고 사상자도 거의 없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소. 우리의 기병이 우세하므로 어렵지 않게 승리할 것이오."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의 전술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뒤, 전투에서 진다면 진영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다른 장수들에게도 이 약속을 할 것을 요구했다.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장수들은 이에 따랐다. 폼페이우스의 속셈을 간파한 카이사르는 고참 군단병 2000명으로 제4열 별동대를 편성하여 카이사르군 우익 뒷편에 포진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직 그대들에게 전투의 승패가 달려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카이사르의 제10군단 수석 백인대장 크라스티누스는 비장한 연설을 하였다.
"나의 부대에 있던 병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그대들이 총사령관 앞에서 약속한 성실함과 용맹함을 보여라.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전투가 될것이다. 이 전투가 끝나면 우리들의 총사령관은 지위를 되찾을 것이고, 우리는 자유를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을것이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를 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이시여, 나는 오늘 전장에서 쓰러지든 살아남든 장군의 치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크라스티누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