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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죽음[13]
성경: 마14:1-12절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의 헤롯 왕을 대 헤롯이라고 하는데 그는 죽기 전에 나라를 셋으로 분할하여서 세 아들이 그 땅을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헤롯은 그 셋 중 한 사람으로, 본 이름은 헤롯안티파스이고, 성경은 헤롯안디바 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헤롯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문둥병이 낫고, 중풍병자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뿐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살렸다는 것입니다. 헤롯은 이 말을 듣자 예수는 자기가 죽인 세례요한이 다시 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전에 그가 로마의 동생 집을 방문했는데 배다른 동생으로 권력에 대한 의지가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아내를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 여자가 헤로디아인데 이 여성은 왕 헤롯을 보고는 권력에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이 헤로디아는 남편을 버리고 이스라엘로 와서 함께 살았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 결혼에 대해서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4절)라고 합니다. 이 일로 마가복음 6장에 보면, 헤롯도 요한을 미워했지만, 헤로디아는 그를 원수로 여겼습니다(막6:19-20)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을 증오하며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 왕은 요한을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의 생일날 갈렐리의 귀족들이 초청되었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춥니다. 모두 넋이 나간 것입니다. 이때 헤롯은 내가 원한다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살로메는 그 어미 헤로디아에게 무엇을 구할까를 묻습니다. 세례요한 머리를 요구합니다. 세례요한은 이렇게 죽음을 당합니다.
왕의 마음을 빼앗은 헤로디아는 아름다웠지만 악녀였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아내인 아라비아의 왕 아레다(Aretas) 4세의 딸을 내보내고, 헤로디아와 결혼을 한 것입니다. 이 일로 나중에 전쟁까지 일어납니다. 그렇게 헤롯안디바는 헤로디아를 자기 여자로 삼은 것입니다. 그녀가 데리고 온 살로메는 매혹적인 춤을 추어서 헤롯과 그 잔치에 초청된 사람들의 마음을 홀려놓습니다. 여러분 아름다워도, 춤을 잘 추어도 용서할 수 없는 여성 두 사람이 오늘 성경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여성에게 빠져서 양심의 소리를 따를 수 없었던 헤롯 왕이 나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분명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워도, 춤을 잘 추어도, 왕이란 권력이 있어도 죄는 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결단을 못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당시의 최고의 지도자들인 바리세인들이나 사두개인들에게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찍어 불에 던진다는 경고를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의 분봉 왕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가 같이 사는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질문을 했는지, 혹은 세례요한이 볼 때 이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판단이 되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왕으로 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다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왕도 이 일이 잘못된 것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책망을 듣는 것이 괴로웠지만 동시에 그것을 달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아직 살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과감히 이것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세례요한을 죽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5절)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좋아하고 따르기 때문에 그는 두려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비슷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 사람은 빌라도 총독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예수를 놓아주면 로마황제의 충신이 아니라고 겁박했습니다.(요18장). 결국은 사형판결을 내리고 손을 씻는 것입니다. 그런 인물이 또 있습니다. 바울에게 의와 절제와 심판의 복음을 들었던 벨렉스 총독입니다. 이 사람도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면서도 결국은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않았던 사람입니다.(행24:25)
오늘 성경의 헤롯 왕이 세례요한을 죽인 후에도, 자신이 한 악행이 양심을 괴롭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말씀이 들려지고 양심의 자책이 왔을 때 그 죄를 정리하거나, 어떤 결단을 했다면 그는 전혀 다른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실패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압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결단하지 않습니다. 주저주저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죄에 점점 깊이 빠져서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믿는다면 각자가 어떤 결정을 해야 합니다. 내가 결심 할 것 그것이 무엇인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본인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자기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순종을 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미적미적 거리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은 아닌데,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것은 혹시 없습니까.
국회의원이었던 작가 김홍신 씨가 “인생사용 설명서”에서 자신이 담배를 끊은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37년 6개월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폐암의 위험이 있거나, 간접적인 살인 행위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 번쯤 끊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 오래 피운 담배를 끊지 못했습니다. 원고를 쓸 때는 하루에 보통 서너 갑의 담배를 피웠고, ‘죽는 날에도 담배를 입에 물고 죽겠다.’는 수필까지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스승이 “쥐는 쥐약인 줄 알면 먹지 않는데, 사람은 쥐약인 줄 알면서도 먹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독인데, 나는 쥐보다 못한 것인가. 김홍신 씨는 결심을 합니다. ‘내가 세상을 끌고 가도 시원찮은데, 담배한테 끌려 다니다니,’ 그는 37년 6개월간 백해무익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담배에게 끌려 다녔는데 이제 더 이상 끌려 다니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가 담배를 끊었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이 ‘넌 참 독한 사람’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김홍신 씨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독극물을 날마다 삼키는 사람이 독한 사람이지, 어찌 독을 버린 사람이 독하다는 말이냐”라고 말입니다.
구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던 이유는 결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는 하였지만 양다리를 걸치고 살았습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상숭배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까. 아직도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들 말입니다. 정말로 순종하고 따라야 하는데 내 맘대로 하고 있는 것 없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세월을 살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부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색한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왔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서 헌금 생활을 바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보다 돈을 좋아하고, 자신의 제물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다면 회개하십시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욕심의 함정에 빠지고, 불신앙의 함정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함정에 빠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부모도 형제도 안 보입니다. 여기에 아간이 빠졌고, 아합이 이것 때문에 사람을 죽였으며, 가롯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욕심은 끝이 없고, 인간의 치부도 끝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평생을 살면서 장학금 한번 준일이 없고, 큰 연보를 한번 해보지 못하며, 선교 이야기를 그렇게 들으면서도 선교헌금을 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항상 돈이 부족하다, 없다, 힘들다, 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진짜 힘들고 어려운 것은 의식주(衣食住)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 잘 곳이 없거나, 입을 옷이 없거나, 먹을 양식이 없는 것이 진짜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해결 되었다면 너무 어렵다, 힘들다. 없다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욕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을 물질적인 생활에도 나타나야합니다.
2. 예수님을 나타낸 세례요한
세례요한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누가 죽였습니까. 두 여자가 죽였습니다. 어미 해로디아와 그 딸 살로메입니다. 이 두 여성은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소반에 얹어 달라 요구했습니다. 여자들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이 세례요한의 참수형은 헤롯의 생일 축하 이벤트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으로 보면 참 허무하기 그지없고, 수치스럽고, 억울한 죽음 같습니다. 그때 그 나이가 33세입니다. 어찌 의인의 최후가 이럴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 실패자 같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는 일찍 죽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끝난 그가 위대하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어느 누구도 알지도 못했고, 관심을 갖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오직 한 사람이 그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요. 전령입니다. 여러분 제비꽃이라는 꽃이 있습니다. 이 꽃이 피기 시작하면 언제나 제비가 돌아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꽃은 우리 조상에게 긴 겨울이 끝나고 만물이 생동하는 봄의 전령사였습니다. 이 제비꽃을 다른 말로 오랑캐꽃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북으로부터 겨울 난 중국 오랑캐들이 쳐들어와서 국토를 유린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알리는 제비꽃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3:3절)
성경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고, 세례요한을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리’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합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의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고 보니까. 말씀이신 예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소리는 실체가 나타나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요한은 왕이 아니라, 사신이며, 메시지가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께 사람들을 주목케 하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요한은 예수님만을 들어내었습니다. 사실 그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인줄 착각할 정도입니다. 그때 세례요한의 어떻게 대답합니까.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요1:27)
세례요한 자신은 예수님의 종노릇하기도 부족한 사람이라는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신랑이고 자신은 신랑의 들러리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과 동시에 소리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저 사람을 보라.”라고 메시아를 소개하고 자신은 퇴장한 것입니다.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동물들의 세계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자가 총지휘관이 되었고 동물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동물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수군거렸습니다. “당나귀는 멍텅구리라서 전쟁에 방해만 될 테니 돌아가는 게 낫다.” “토끼 같은 겁쟁이가 어떻게 싸움을 한다고 온 거야, 한심하다.” “개미는 작고 힘이 없어 어디 쓰겠어.” “코끼리는 덩치가 커서 적에게 금방 들통 나고 말걸.” 이때에 총지휘관인 사자가 “시끄럽다. 모두 조용히 해라, 당나귀는 입이 길어 나팔수로 쓸 것이다. 그리고 토끼는 걸음이 빠르니 연락병이다. 개미는 작아서 눈에 안 띄니 적진으로 들어가라, 코끼리는 힘이 세니 전쟁 물자를 운반하는 일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 각자 은사에 따라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직업이나, 직장도 일종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배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직업의 종류가 2만개 정도가 되는데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어떤 사람의 배역은 너무 좋습니다. 탤런트 중에는 하인이나 식모역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원주 씨는 사미자, 선우용녀가 왕비 역할을 할 때 시녀, 무수리역을 합니다. 또 무당, 식모역만 하다가 늦게 코메디의 부자 집 사모님 역을 하면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대본에는 나쁜 배역이 없습니다. 우리 눈에는 좋은 배역이 있고 나쁜 배역이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는 모두가 주인공들입니다. 그 배역이 무엇이든지 간에 최선을 다하면 하늘나라의 스타가 됩니다.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끝내고 하나님 앞에 곧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맡겨주신 역할에 충실해야합니다. 신앙으로 자기배역을 소화해야합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자신의 배역을 잘 감당한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구속사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례요한은 일찍 죽어야 하는 조연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죽는 순간까지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오로지 주인공이신 예수님만 드러냈습니다. 결국 죽음으로 배역을 완수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조연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받습니다. 어찌 세례요한뿐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땅에 보내시면서 배역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합한 배역을 맡기시고 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역할과 직분에 불평하지 마십시오.
은평교회 전상우 목사님은 서점을 하던 아주교회 집사였습니다. 서점이 잘되어서 여러 곳에 지점도 내었습니다. 교회에 큰 충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암에 걸린 것입니다. 죽음에 임해서 모든 것이 덧없는 것을 깨닫고 기적적으로 병이 나은 다음 다 때려치우고, 개척한 것이 은평교회입니다. 나하고 나이가 같은데 더 늙어 보입니다. 사모님과 백화점에 가니까 자부와 오셨다고 하더랍니다. 암에 너무 고생할 때 빠진 머리가 다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목사님이 인천으로 이사를 가서 저희들 몇이 집들이를 갔습니다. 대화 중에 자기가 목사가 안 되었으면 목회자를 많이 괴롭혔을 것이라고 합니다. 충성이 대단한 분이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집사 때 자신은 교리를 지킨다고 예배 광고시간에 목회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그 자리에 불쑥 일어나서 그것은 안 된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신앙으로 한다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 생각이 아주 좁았던 것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어릴 때 어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맛있는 것을 많이 사먹고, 간섭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니까. 과자가 먹고 싶지 않습니다. 어른이 지는 책임을 아이들은 모릅니다.
여러분의 중요한 것은 내 자리를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집사는 집사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집사가 목사 역할을 하려고 하면 일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관심 사항은 내 주장이나, 내 생각을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예수님이 들어 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은 상관이 없고 자기가 들어 나기를 소원합니다. 자기 말, 자기주장, 자기이름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여러분들이여 나를 잊어주세요. 나는 종의 자리에도 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점점 쇠하여 지고 예수님이 흥해져야 합니다. 내가 빨리 죽어야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33세의 나이에 꽃잎처럼 떨어지고, 이슬처럼 사라진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무엇이 나타납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정말 예수님이 나타납니까.
3. 사람을 의식한 헤롯 왕
우리는 헤롯이란 인물을 통해서, 우리가 가진 지위나 자존심과 체면은, 오히려 진리를 죽이는데 사용될 수 있음을 알려주고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보다, 자신 자존심이나 체면 혹은 기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말씀으로 책망을 듣게 될 때에, 우리는 그 말씀 앞에 겸손히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수치심을 느끼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오히려 미워하거나 원수 같이 여기는 헤로디아 같이 됩니다.(막6:19), 심한 경우에는 죽여 버릴 마음까지도 품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헤로디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고자 할 때에는, 이 세상 지위나 자리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나의 자존심과 체면을 버려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과거에 내가 누구였고, 현재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 헤롯과 헤로디아와 같이 회개는 고사하고,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지게 될 것입니다(히3:15-16). 그러므로 누구를 통해서든지 말씀으로 우리의 허물이나 잘못을 깨닫게 해준다면,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눅24:47). 그러면 용서를 받고 새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한밤중에 도둑이 빈집을 털고 있었습니다. 손전등을 비추며 정신없이 세간을 뒤지고 있을 때 험상궂게 생긴 괴한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도둑은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그러자 괴한도 똑같은 자세를 취하며 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도둑은 극도로 긴장하며 괴한을 응시했지만 무엇을 깨달았던지 그만 맥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저 놈이 바로 나로 구나. 내가 괴한이었구나” 도둑은 바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놀랐던 것입니다. 이 글은 수필가인 강호연씨가 지은 ‘거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 생각해봅시다. 지금 거울 속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또한 우리는 함부로 맹세하거나 말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헤롯은 순간의 감정에 치우쳐서 맹세했습니다. 그는 그 맹세한 말로 인해서 의인이라 생각한 세례 요한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한 맹세가 세례 요한을 죽게 만든 것입니다.(9절).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입을 열거나,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에, 언제든 우리가 한 말로 인해서 우리가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4."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 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5.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전5:4-5절)
결론
의사들이 치료하기 가장 힘들어하는 환자는 ‘내 병은 내가 안다’고 하는 환자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아서 빨리 낫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인이 간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이분 병세가 심해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해서 그때마다 응급실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조금 나아진 듯하다, 병세가 악화되면 다시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오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 입원을 한 후 시간이 지나서 의사가 건강이 좋아졌으니까 퇴원해도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자와 가족들은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기를 원했습니다. 퇴원하고 나면 다시 병실을 잡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건강이 좋아졌는데도 퇴원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더 이상 치료를 할 게 없으니 퇴원하라고 하는 병원 측과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요1:8-10절)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는 죄가 없다. 잘못이 없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조영호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