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 바티뇰 그룹의 새 리더가 되다
앙리 팡탱-라투르의 <들라크루아에 바침 Hommage a Delacroix>, 1864, 유화, 160-250cm.
젊은 예술가들에게 우상과도 같았던 외젠 들라크루아가 1863년 8월 타계하자 팡탱-라투르가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새로운 리더가 필요했고, 마네가 들라크루아를 대신해서 리더로 부상했음을 이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미국 화가 휘슬러이고, 오른쪽이 마네입니다. 흰 셔츠를 입은 사람이 팡탱-라투르이고, 마네 오른편으로 화가 발레로아와 판화가 브라크몽, 그리고 시인 보들레르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르노블 태생으로 마네보다 네 살 어린 팡탱-라투르는 1851년에 파리로 상경하여 미술학교를 다닌 뒤 1861년에 살롱에 입선했습니다. 루브르 뮤지엄에서 티치아노와 베로네세 등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회화를 익혔고, 마네와 쿠르베와 교류했습니다.
마네가 1864년에 그린 그림이 1872년 살롱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그 동안 그의 작품에 대한 여론이 별로 좋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젊은 진보주의 예술가들은 마네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겼습니다.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1836-1904)는 <들라크루아에 바침 Hommage a Delacroix>에서 마네를 중앙에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대들보와도 같은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프레데리크 바지유Frederic Bazille(1841-70), 앙리 팡탱-라투르, 폴 세잔Paul Cexxane(1839-1906),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 등 젊은 화가들은 마네의 화실과 그들이 자주 모이던 카페 게르부아, 누벨아텐, 드 바드가가 있는 동네 이름을 따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불렸습니다. 마네가 1864년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바티뇰 불바드 34번지였습니다. 클리쉬 애비뉴 19번지로 엔느퀭의 미술품 재료상 맞은편에 있던 카페 게르부아는 바티뇰 그룹의 본부와도 같았습니다. 이들은 1863년부터 1875년까지 주로 이곳에서 만났습니다. 금요일이면 카페 주인은 문 입구 왼쪽의 두 테이블을 그들을 위해 비워두었습니다.
앙리 팡탱-라투르의 <바티뇰의 화살 Un Atelier aux Batignolles>, 1870, 유화, 204-273.5cm.
팡탱-라투르가 1870년 국전에서 소개한 <바티뇰의 화실 Un Atelier aux Batignolles>에 나타난 것처럼 중앙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의 마네는 이 그룹의 공식 리더였습니다. 동일한 인물들을 모델로 바지유가 자신의 화실 장면을 그릴 때도 마네는 여전히 이젤 앞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프레데리크 바지유의 <콩다미느 가의 화실 L'Atelier de la rue La Condamine>, 1869-79, 유화, 98-128.5cm.
중앙에 서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 바지유인데, 키가 무척 텄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 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오른편에 피아노가 있어 화실이 놃고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네의 <페레 라툴르에서 At PereLathuile's>, 1879, 유화, 93-112cm.
카페 게르부아 바로 옆에 있는 레스토랑 정원에서 햇볕을 받고 앉은 레스토랑 주인의 아들가 여인의 다정한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오른편 뒤에 주전자를 들고 서 있는 웨이터의 모습이 마치 스냅사진처럼 한 순간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마네가 1860년대와 1870년대 파리 카페의 분위기를 묘사한 것으로 그는 매일 오후 늦게 들리곤 하던 바티뇰의 카페들 중 하나인데 카페 게르부아로 짐작됩니다. 이런 것이 카페문화입니다.
인상주의를 연구한 미술사학자 존 르왈드는 “소심한 예술가들이 카미유 코로의 영향을 받은 반면 대담한 예술가들은 쿠르베와 마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마네는 바티뇰 그룹의 리더였지만, 그들과 더불어 유파를 결성하지는 않았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지만 마네가 “한 유파의 우두머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마네에게는 보스 기질이 없었으며 잘난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아르망 셀베스트르가 훗날 회상했습니다.
클로드 모네도 이때 카페 게르부아에서 마네와 자주 어울린 예술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모네가 마네를 처음 만난 것도 카페 게르부아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 자주 간 예술가들로는 1863년에 마네의 초상을 그린 르그로, 팡탱-라투르, 르누아르, 드가, 나중에 레그로와 함께 런던에 안주한 휘슬러, 바지유, 그리고 세잔이 있습니다. 이들의 모임에는 작가이자 평론가인 이들도 있었는데, 이폴리트 바부, 세잔의 고향 친구 에밀 졸라, 에드몽 뒤랑티, 필립 뷔르티였습니다. 이들은 술은 많이 마시지 않고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살롱에 관해 주로 대화하면서 새로운 경향의 미술에 관해 의견을 나눴습니다. 파리에서의 문인과 예술가들의 교류는 그때부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문학과 미술이 함께 발전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