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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도 어느 날 우연히 교회의 주소록을 보다가 어느 여목총회에 있는 송운선 목사님을 보게 되었다. 총회신학교동지로서 합동 총신을 나왔는데,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30년 동안 교수를 하셨던 그리고 통일교와 수년째 재판 소송을 벌이고 있는 신사훈목사의 제자로서 총회 서기를 한다는 목사님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어 전화를 하고 만났는데, 총신을 졸업하고 또 장신대를 졸업하여 여목총회에서 활동하던 중 새로운 각오로 신사훈 교수님의 뜻을 받들어 남자와 여자들도 목사를 줄수 있는 총회를 하나 창단하자고 하여 합동측 총회신학을 나온 목사님 6명이서 중앙위원으로 하고 합동제일총회를 창단하게 되었다.(그 때에는 장로교에서는 여목을 인정치 않았고, 목사안수를 줄 생각을 하지도 못했을 때다. 지금은 통합측에서는 몇년 전부터 여목을 주기로 하고, 합동측에서도 금년부터 여자목사를 주기로 가결했으니 우리 총회야 말로 선견지명의 약 20년을 먼저 여자목사를 주는 선구자적 총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신학교를 설립하고 공부를 많이 한 송 목사를 학장으로 추대하여 교단 신학교로 대학원 편입학 학생 중에 졸업식도 함께 있었고, 총회와 신학교가 잘 되어가고 있었다. 나도 그 신학교의 교수가 되어 여러 과목을 가르치며 공부를 더 많이 하였다. 주로 <전도학 성령론 교회사 히브리어 헬라어 비교종교학 등> 을 가르쳤는데, 그렇게 열심히 신사훈 박사님 장국원 박사님 그리고 훌륭한 교수님들께 배운 학문을 몇 배나 더 많이 연구하여, 조금씩 전문가가 되어 갔다. 열강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전라도 사투리가 쏟아져 나온다. 강의실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기도 하고 내가 경건예배설교를 하거나 강의를 마치고 나면 강단에는 침이 한 바가지나 튀겨 있다면서 침을 삼켜가면서 강의를 하고 설교를 해야지 숨도 쉬지 않고 침도 삼킬 여유도 없느냐면서 학장은 늘 흉을 보고 한다. 사실은 나의 성경책은 침을 하도 많이 튀겨서 성경책이 두꺼워져 오래 사용할 수가 없다. 설교원고는 손바닥보다 적은 메모지 한 장 아니면 머릿속에 다 있다. 교수 방침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유명한 글이 있다. 여기 이 교재 중에 유명한 교수님의 강의가 있으니 잘 읽어보면 내가 가르친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이나 내가 하고 있는 강의는 이 시간 지나가면 다시는 들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노트에 반드시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출석은 절대로 여러분의 학점에 50% 반영하겠다. 레포트 작성은 노다. 레포트 대신 노트는 반드시 제출 하여야 한다. 물론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써먹는 일이 거의 없더라도 꼭 배워 두어야 하기 때문에 필수 과목이고 더불어 독일어와 라틴어도 읽을 수는 있도록 알파벳을 가르쳐 주기도 하여 호응을 얻고 반응도 좋아하여 많은 학생들이 내 강의시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진다고 하였다.
어느 날 길에서 전단지를 하나 받았는데, 장도선 목사님의 부흥회 전단지였다. 사진까지 나와 있어서 금방 알아봤다. 너무 반가워서 전화를 하고 찾아갔다. 우렁차게 울려나오는 장 목사님의 설교소리는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시골에서 주먹깨나 쓰던 목사님은 어느덧 성자의 길을 걸어 삼각산에서 수년간 기도를 하였다는데, 그의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원고도 없이 거미줄처럼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
기도하러 다니다가 김 용숙 전도사님을 만났다. 김 전도사님은 노원역 근처 상계동에서 기도원을 하고 있었다. 내가 기도원에 가서 교회를 하면 어떻겠느냐? 물으니 좋다고 하여 우리 수정교회와 합하자고 결론을 내리고 내가 상계동 아파트 건축이 시작 될 때부터 다니며 건물을 얻어 교회를 개척 하려고 했지만 하지 못하고 미아리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는데, 잘 되었다면서 수정교회의 모든 비품을 가지고 기도원으로 들어가면서 초대교회라고 이름을 짓고 교회가 세워졌다. 미아리의 수정교회는 누가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 그냥 그대로 비워 두었다. 목요은사집회 라는 현수막도 내 걸고 열심히 하여 기도원도 교회도 날로 부흥이 되기 시작하여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신학을 마친 원장 전도사님의 여동생이 와서 같이 전도사를 하고 또 다른 신학생이 와서 교육전도사를 하여 교회학교도 맡게 되어 날로 부흥하기에 이른다. 전도의 사명을 받은 신학생들을 신학교에 보냈는데, 개인택시를 운영하던 남자 전도사도 와서 열심히 출석하게 되었고, 원장 전도사님도 신학교 대학원에 편입학하여 다니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흘러 벌써 2년이 지나가고 원장 전도사님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을 받았다. 성도들도 40여명으로 늘어나 재미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부여에 기도원도 지어 매주 목요일마다 그 기도원에 가서 집회를 하였다. 어느 날 나에게 자기가 담임목사가 되고 나에게 부목으로 내려앉기를 청했다. 나는 이제 서로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다녔던 임마누엘교회 구 목사님과 장모님이신 김 권사님을 찾아가 이야기를 하니 자기 교회를 담임하라는 것이었다. 포천 이동에 산을 하나 사서 기도원을 크게 지었는데, 임마누엘교회는 너무 멀고 두 곳을 다 경영하기에 힘이 든다면서 미아리 성북시장 입구에 있는 3층 60평 정도를 맡아 새로운 이름으로 찬양교회를 세웠다. 신도들이 하나 둘 모이고 날마다 찬양교회답게 찬양을 많이 부르며 기도회를 가졌다. 찬양을 잘하는 양 승란 여 전도사도 와서 찬양을 인도했고, 김명숙전도사도와서 교회학교와 학생회를 담당했다. 신학을 졸업한 나이가 지긋한 권사님도 심방전도사로 임명하였고, 같이 잘 지내던 여자 전도사님도 심방전도사로 임명하여 일을 잘 하고 그 밖에도 신학생들이 두어 전도사님들이 있어서 합심하여 날로 찬양소리는 높아만 갔다. 찬양전도사는 노방전도를 하였는데, 앰프 시스템을 준비하여 지하철역 입구에서 주로 하였고, 신촌에서는 백화점 앞에서 청량리역에서 일산에 꽃 박람회에서도 길거리에서 찬양을 부르며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노방전도의 대가들이 같이 모여 이곳저곳 남산에서도 어깨띠를 두르고 전했고, 사월 초팔일에는 종로에 불교 조계종을 차량으로 돌며 스피커에서 요란하게 울려나오는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다가 “예수천국 불교지옥” 나의 주특기인 노방전도설교가 온 길거리와 불교인들의 귓전에 쟁쟁하게 울려 퍼져나갔다. 차량은 15인승 승합차와 12인승 승합차 두 대로 삼각산에서 노숙을 하던 강 베드로 목사가 지원을 해 주었다. 몇 번을 차량으로 돌다가 우리 그러지 말고 길거리 행진을 하자고 하여 모두 메가폰을 들고 비가 제법 내리기에 우산을 들고 이십 여명이 행진을 하며 조계종 정문으로 돌진하여 한꺼번에 “예수천국! 불교지옥!” 하고 메가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자 뚱뚱하고 건장한 청년들 이십 여명이 몰려나와 메가폰을 빼앗아 땅에 내리 치니 다 망가졌고, 우리를 강제로 끌고 사찰로 들어갔다. 나이가 든 목사님 집사님들 서너 명이 끌려가고 나도 한 건장한 청년이 강제로 붙들어 가려는데 나는 죽을힘을 다 하여 몸부림을 치며 버텼다. 우산을 접는 순간 손가락 하나가 우산 쇠로된 살에 끼어 상처를 입고 피가 제법 많이 흘렀다. 나는 웃으며 그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고 손가락에 흐르는 피를 그 청년의 얼굴에 바르며 한마디 하였다. “어이 청년 우리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한마디 하였더니 그 청년이 갑자기 힘이 쭉 빠지면서 멱살을 놓고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서 그냥 획 돌아서 사찰내로 들어가 버렸다. 아직도 대원들의 목이 동원된 깡패들의 손에 붙들려 쾍 쾍 거리며 “예수천당! 불교지옥!” 의 외침소리는 계속되었다. 잡혀간 대원들도 어쩌지 못하고 그냥 풀어주었고, 우리는 그 길로 다시금 차량전도가 계속되었고 남산으로 향하여 전도를 쉬지 않았다. 강 베드로 목사님은 홀로되어 교회도 없고 돈을 벌지 못하여 삼각산에서 기도만 하고 거기서 자고 하시는데, 어떤 권사님께서 노숙하는 목사님께 폐차에 가까운 15인승 승합차 한대를 주면서 세금은 자기가 낼 것이니까 삼각산 입구 길목에 세워두고 거기서 잠을 자고 추위를 견디라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거기가 강 베드로목사의 잠자리가 되었고, 일산에 꽃 박람회에도 전도하러 갔는데 그 낡은 차량을 수리하여 갔다 왔고, 또 어떤 권사님께서 조금 타고 다닐만한 12인승 승합차를 주어서 전도대원들이 모여 그 차량 밑에 스피커를 달아 마이크로 전국을 누비며 노방전도를 하였다. 나중에 기도를 하다가 삼각산에 기도하러오신 사모님을 만났는데, 사모님 오라버니가 은행 지점장이어서 일억의 돈을 빌려주어 땅에 묻어 두었는데, 그게 너무 많이 올라 수십억 재산이 되어 부자가 되었다. 또 한사람 송 세현 목사님은 일산에 사시는데, 얼굴은 빡빡 얼었지 키도 조그마한데다 먹지를 못해서 빼빼 말라 겉으로 보기에는 금방 쓰러질 것만 같은데도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지만 말도 혀가 짧아서 일반 목회는 못 하였다.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해 사모님도 못 먹고 굶어서 빼빼 말랐고 아이들도 못 먹어서 빼빼 말라 그 집은 모두가 빼빼 마른 집안이었다. 늘 산에만 다니고 전국적으로 노방전도만 다니니 돈이 어디서 나올 것인가! 그의 어깨에는 항상 <주 예수를 믿으라!>라는 어깨띠가 매어있고 손에도 조그마한 나무십자가에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써서 가지고 다니며 외쳤다. 너무 많이 굶었다. 너무 많이 외쳤다. 그래서 그는 담대했다. 그의 앞에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가난도 집 없는 고초도 가정도 하나님께 다 맡겨버리고 오직 복음만 전했다. 하루는 남대문 시장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께서 “야! 너 저기 가는 남대문 깡패 오야지 저놈한테 복음을 한번 전해봐라.” 하더랍니다. “그냥 말로만 전하지 말고, 등짝을 한번 내리 치면서 위엄 있게 야! 너 예수 믿어 엉” 하고 힘차게 전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따 하나님도 저 깡패 우두머리한테 한 주먹감도 안되는데 맞아 죽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그래요?” 하고 생각이 들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오는 느낌의 말씀을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어서 지나쳤던 그 사람 자기의 두 배 더 큰 사람 그 깡패 오야지 뒤를 따라 갔답니다. 무조건 마음의 감동대로 손바닥으로 있는 힘을 다 해 등짝을 후려치면서 “야! 너 예수 믿어!”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어어 예예 알았습니다. 예수 믿을 랍니다.” 하고서 도망을 가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도 도망을 치듯 그곳을 나왔는데, 그 뒤로는 만나면 “형님! 형님!” 하면서 밥을 사주고, “그런데 형님은 누구세요?” “나 노방전도 하는 송 목사야!” “아 네 형님! 그러셨군요. 난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형님처럼 그렇게 무서운 분은 처음입니다. 아직까지 남에게 맞아본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형님이 손바닥으로 내 등짝을 내리 쳤을 때 큰 쇠망치로 내리 치는 것보다 더 아팠습니다. 맞는 그 순간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라고 고백하더랍니다. 그리고 사람이 치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하나님께서 치신 것처럼 커다란 손으로 친 것처럼 느끼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많은 자기의 졸개들에게 권하여 예수를 믿게 하였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즉 하나님의 일을 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처럼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하여 각 교회에서는 일일 강사로 부흥회를 하게 해 주었고,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도 일일 부흥강사가 되어 집회를 하기도 하였다. 혀가 좀 짧은 소리 때문에 말이 좀 분명하지 않지만, 무조건 전도하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예수 믿고 살판났네.> 라는 책도 한권 냈다. 한 권사님이 은혜 받고 일산에 빌라를 하나 주셔서 그 집에서 온 식구가 잘 살고 있었는데, 우리 대원들도 초청하여 밥을 먹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 일을 하는 자는 결단코 그냥 두지 않으시고 풍족하게 하여주신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 권사님이 돈을 일억을 빌려 주어 땅을 사서 거기도 부자가 되었다. 나에게도 돈 있는 대로 땅을 사 두라고 일렀다. 그 뒤로 땅값이 수 십 배로 올라 부자가 되었다. 나중에 이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검색하여 보니 전 세계적으로 집회를 인도하러 1천 여회나 다니셨고 책도 한권 더 쓰셨는데, <불덩어리 전도행전>이라는 참으로 사도행전 다음가는 전도 여행기를 쓰신 것을 보고 나도 옛날처럼 노방전도에 힘을 써야 하겠다고 생각이 든다.
학장님의 소개로 총회 김 목사님으로부터 15인승 승합차를 하나 폐차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며 주셔서 면허증은 2종 원동기 면허증과 2종 보통 운전면허증으로 운전을 할 수 없는데도 끌어다 놓고 운전연습을 하여 1종 보통 면허시험을 치루는 기간이었다. 한 날은 나 혼자서 차를 끌고 나와 큰 길에는 차가 많이 다니니까 좁은 길로 들어섰다. 너무 좁은 길목인데다가 마치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어서 가지 못하고 있을 때 뒤에서 경찰차가 뒤에 따라오면서 “여보세요 왜 차가 가지 않고 있어요. 빨리 가세요.” 하면서 자기들 끼리 하는 말소리가 “저것 저 면허증도 없는 거 아니야!” 하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하여 흘러나왔다. 나는 무면허 운전으로 걸리게 되면 어쩌나 생각하고 세워둔 차량을 부딪치지 않기 위하여 전봇대를 스치며 차량 왼쪽을 쭉~ 긁고 지나갔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 이라고 왜 그때 경찰차가 올게 뭐람 아이고 혼났네잉” 혼잣말로 중얼거려보았지만 이미 차는 왼쪽 운전석 쪽 옆면이 완전히 긁히고 난 다음이었다. 성우조카가 교회에 나오게 되어 운전을 맡겼는데, 역시 젊은 청년이라 운전면허를 쉽게 따서 초보라도 성도들을 실어 나르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찬양을 잘 하는 양 전도사가 이삿짐을 싣고 온다고 하여 양평을 지나 어느 마을로 향했다. 그의 친구인 김전도사와 셋이서 내가 잘 아는 길로 간다면서 강촌으로 해서 산길을 내려가다가 뒷바퀴에 펑크가 나면서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아 급커브 길에서 그만 수십 길 되는 가파른 산골짜기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도로 옆 콘크리트가드레일을 들이 받고서 차는 간신히 섰지만, 차가 완전 폐차에 가깝도록 찌그러지고 말았다. 나는 괜찮았는데, 옆 좌석에 타고 가던 두 전도사들은 이마로 앞 유리를 들이받고 머리가 크게 다쳤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춘천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를 받고 머리 사진을 찍었지만, 외상만 입었지 목이나 뼈에는 괜찮아서 빨리 퇴원을 하게 되었다. 차는 폐차를 하는데, 그 아래 파출소에서 순경이 와서 사고 조사를 하고 마치 교회 집사님인데,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었다.
첫댓글 좋은 간증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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