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장 24절)"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장 16절)
♥†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가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장 7, 8절)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여러분은 복음이 부끄럽습니까? 안 부끄럽습니까?
대중식당에서 눈 감고 큰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나요? 거리나 전철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렇게 전도하는 사람을 보면 슬금슬금 피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같이 “할렐루야!” 이렇게 하십니까?
우리는 교회 안에서는 복음을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티를 안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제 자신에게 솔직히 물어보면 어떨 때는 부끄러워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만큼 큰소리치며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다 싶다가도 어떨 때 보면 정말 비겁한 베드로와 같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장 16절)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 17,18)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복음이 곧 십자가의 도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가 복음이고,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바울이 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느냐 하면, 반대로 다른 누군가는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왜 부끄러워할까요? 무엇을 부끄러워합니까?
십자가에 누가 달려 돌아가셨습니까? 주님이시지요. 그러면 십자가가 있기 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끄러워했습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사람들은 주님을 자랑하고 높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오르시자 그 십자가가 부끄러워서 전부 다 도망가버리고 맙니다.
십자가가 없는 예수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지지 않을 때는 주님을 다 따라다녔는데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시고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는 요한을 뺀 다른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현상입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 우리 중에도 십자가를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중간에 도망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예수를 배반하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제일 큰소리친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이 없을 때 십자가가 없을 때는 다 따라옵니다.
그런데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망칩니다. 건축을 하거나 선교를 하거나 아주 부담스러운 일들이 시작되면 정말 도망갑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편한 상황에서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누가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 같은 경우,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모아 복음을 전하면 그 자체가 범법입니다.
그런 위험 가운데서도 복음 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는 너무 자신만만합니다. 정말 큰소리 뻥뻥 칩니다. 그런데 진짜 십자가를 져야 할 때 그 십자가를 따라가야 할 때는 겁을 내고 내뺍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라는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붙잡아야만 주위에서 아무리 욕하고 비웃어도 괜찮다 하고 십자가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해도 따라나서서 주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나는 복음(십자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을까요? 바울은 십자가를 멸시하고 천대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핍박했던 행악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가 만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수 있으려면 우리도 그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누가 뭐라 해도 부활하신 주님을 꼭 만나야 됩니다.
이 마지막 때는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신앙을 다 잃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마지막 배교의 때에 정말 핍박이 오고 환난이 올 때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큰소리쳤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본심입니다. 주를 위해 죽겠다고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십자가 앞에 서면 십자가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연약한 우리입니다.
그 베드로가 나중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21장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이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나야 진짜 신앙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꼭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살려내심, 윤치영 / 규장)
† 기도 : 저희들이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붙잡고 따라 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