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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임금님이 시골로 행차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임금님을 한번 보고 싶어합니다. 지금처럼 사진도 많고, 텔레비젼도 많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옛날에는 실제로 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든 먼데서든, 모두들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가로 모여듭니다. 한편, 멀리서 이 소식을 들은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자리에 누워 있어 거동이 불편한지라, 이 노인은 아들에게 부탁합니다. “얘야, 나 말이다 임금님 얼굴 한번 뵈었으면 좋겠구나.” “예, 그렇게 하시지요.” 효자 아들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고는 어머니를 업고 70리길을 걸어서 임금님 행차하시는 길까지 왔습니다. 제 어머니를 아기 업듯이 단단히 받쳐 업고서, 어떻게든 어머니가 임금님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애썼습니다. 임금님이 지나가다가 이 모자(母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멈춰라!” 그리고 아들에게 물어봅니다. “어떻게 된 사연이냐?”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고 싶다 하셔서 제가 모셔왔습니다.” “참으로 효자로고.” 임금님은 그 자리에서 효자 아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자, 이 소문이 퍼지자 다른 마을의 아주 못돼먹기로 소문난 불효자는 배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안가겠다는 제 어머니를 강제로 업고,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목에 가서 떡하니 서 있었습니다. 역시나 임금님이 이 모습을 보고 흐뭇해합니다. “이 근방에는 효자도 많구나. 기특한 일이로고. 너는 무슨 사연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왔느냐?” 불효자는 효자의 말을 그대로 흉내내어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네사람들이 “아닙니다, 임금님. 저놈은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라고 일러바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을 껄껄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흉내라도 좋아. 효도를 흉내내는 것은 좋으니라.” 그리고 불효자에게도 상을 후하게 주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 흉내라도 내보세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시 5:6
제목:요단에 들어서라 여호수아 3:1~13
주제:믿음 논지: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굳건한 믿음, 성실한 믿음, 정결한 믿음, 성결한 믿음, 도전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위대한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에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받고 담대하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땅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서 결코 안일하게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예기치 않았던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가 직면했던 난관을 극복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요단을 건너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땅으로 가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야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고 요단을 건너가서 가나안 땅, 약 속의 땅을 점령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사실 그때의 이스라엘의 민족의 형편을 보면 그들 가운데는 모압 지방에 그대로 진을 치고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40년 동안 광야 생활로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제는 좀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고생하거나 전쟁을 하는 위험 부담을 안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마침 모맥을 추수하는 절기로 헐몬산에서 눈녹은 물이 많이 흘러 요단강 물이 붕어나 넘쳐흐르기 때문에 건너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또 어떻게 해서 건너간다고 해도 거기에는 가나안 7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쌓아 올린 성곽은 높았습니다. 그들이 우거하는 산악은 험해서 설사 요단강을 건너간다고 해도 그 땅을 점령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성경을 상고해 보면 루우벤 지파와 갓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는 이미 요단강 이편에서 분깃을 허락 받은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자연히 요단 강을 건너야겠다는 의욕이 적어진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향하여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요단을 건너라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40년간이란 긴 세월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모압 평야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 평지에 머물러 있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요단강의 물이 높아졌고 가나안 땅에 거하는 사람들이 강하다고 해도 그 요단강을 건너야 되고, 가나안 땅을 점령해야 되고, 그 후에 위대한 민족이 되고, 거기에 위대한 나라를 세워서 제사장 나라를 삼으려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경륜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까지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빨리 요단을 건너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어려워도 요단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요단을 건너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수아가 한 일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교회창립 주일을 맞이하여 이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요단강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단강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향해 전진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건너야만 했던 첫 번째 난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단강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를 성취하는 일에 있어서 항상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난관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귀하고 의미 있는 좋은 일이라고 해도 어려운 일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귀한 일을 하면 반드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인 우리를 위해서 좋은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풍성한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훌륭한 목표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에 도달하는 길을 쉽게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미워서 힘들게 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의 모험이며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궁극적으로는 이기는 싸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장이 되시면 반드시 이깁니다. 그러나 그 싸움의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건너야 할 요단강을 어떻게 건널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위험, 불안, 반대에 우리가 어떻게 꿋꿋이 서서 이 삶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습니까?
요한 번연은 그의 책 ‘천로역정’에서 이것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가는 그리스도인은 그 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렵고 위험한지 모릅니다. 유혹도 많습니다. 그래서 가는 도중에 몇 번이나 쓰러지고 상처가 나고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또 새 힘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갑니다. 이것이 순례자의 길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영도해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어떻게요?
1. 부지런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그들이 직면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맨 처음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사명을 받은 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과 성을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을 내놓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일해야 합니까?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까? 열의와 성의가 있어야 합니다. 열의가 무엇입니까? 열렬한 마음과 뜨거운 정신입니다. 불같이 뜨거운 마음으로 일에 열중하는 것입니다. 소극적이고 피동적이고 타율적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생에 열의를 가지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강자의 생활태도입니다. 인생에서 정열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인생의 대업은 모두가 정열의 소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일에 성의를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이나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인간은 정성에 감동하는 동물입니다. 정성없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정성의 반대는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것입니다. 무책임과 무성의 속에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여호수아더러 백성을 이끌고 들어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땅이 언제 주어질 것입니까? 그 땅에 들어가서 정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약속하셨지만 약속하신 그 땅을 내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내가 땀을 흘려야 하고 고된 훈련을 통해서 전쟁기술을 익혀야만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인생철학을 가지고 산 사람입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힘든 일입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생활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네 것이라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승리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전쟁을 앞에 두고 최선을 다하려고 나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면 소 부지런히 일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대접을 받고 빈둥빈둥 노는 사람은 푸대접을 받는 사회, 그것이 바람직한 사회입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일하는 것을 상민으로 취급하고 일하지 않는 것을 양반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내려오는 노래 중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하는 노랫말이 있었습니다. 남들은 뛰는데 우리는 팔자 걸음으로 걸어다녔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앞을 달렸는데 우리는 뒤를 따라갔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애들을 일 시키지 않고 자란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일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부끄럽다는 것조차 못 느꼈습니다. 사위를 맞을 때 장모되는 사람이 사윗감에게 뭐랬는지 아십니까? “여보게, 우리 애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손 끝에 물 한 방울 안대고 자랐네.” 이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기독교 정신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육신의 아버지 요셉을 도와서 목수일을 부지런히 했습니다. 공생애를 사실 때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했습니다. 근면의 나무에 번영의 잎이 무성하고 부강의 열매가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부지런하게 열심히 그리고 정성껏 사십시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실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여호수아 3장 2절 이하를 보세요.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2천 규빗빛 쯤 되게 하라”
여러분 아시는 대로 2천 규빗이면 약 800미터쯤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궤를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8백미터 이상 떨어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언약궤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잘 압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언약궤는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표시했습니다. 언약궤가 앞장서 갈 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인도하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언약궤는 성소에서도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언약궤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언약궤를 백성들로부터 2천 규빗이나 멀리 떼어놓으라고 했을까요? 그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온 백성이 언약궤를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언약궤의 뒤를 좇으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앞장서 가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요단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그 강을 건넌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안해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직접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너희의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 보지 못하였음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언제나 그의 백성의 삶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이 얼마나 든든합니까!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어느때 보다도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를 요청하는 시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걸어가야 하는 그 길은 미지의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불안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은 두려움의 길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살아가는 길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길을 갔던 것처럼 우리는 매일 매일 낯설고 불안한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앞서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느끼는 것 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을 만한 분명한 이유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의무 앞에서 주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용기와 담력과 결단을 주십니다. 우리가 실패하여 낙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희망을 주십니다. 우리가 슬픔과 탄식의 길을 걸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위로와 평강을 약속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이처럼 어려운 길을 걷게 하십니까? 우리를 강하게 훈련시키기위해서 입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버립니다. 수고하여 얻은 것일수록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탄한 길로만 인도하시지 않으십니다. 쉽고 가벼운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는 때로는 거칠고 괴롭고 험한 길이지만 망하지 않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사실일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3. 성결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하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 앞에 서 있는데 그 강을 건너는 문제가 제일 큰 것이 아닙니까? 그럴 때 그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강을 건너는 방법에 대해서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대하는 대답과는 달리 엉뚱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왜 이 말씀을 주셨을까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그 전략이나 방법에 관심을 두지 말라. 더 중요한 것은 네 삶이 거룩한가, 네가 내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는가, 내가 너를 쓸 만한가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 우주를 다스리시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철 넘치는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그 강을 건너는 방법을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너희 스스로 성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미국이 흑노 해방문제로 남고 북이 한참 전쟁을 하고 있을 때 북군의 사령관 에이브러햄 링컨의 참모 한 사람이 링컨에게 와서 “각하, 이 전쟁에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편에 계실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북군의 전세가 매우 불리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링컨은 그 참모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 하나님이 우리편에 계신가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말게.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가, 이것이 문제네.” 옳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성결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크고 작은 그릇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싸고 비싼 그릇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도중 홍해가 가로막혀 얼마나 당황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시켜 그 손에 있는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가르게 하지 않았습니까? 지팡이가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지팡이로도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을 말해 줍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4. 요단에 들어서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8절과 13절을 보세요.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강 물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여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너희가 요단강가에 가면 강이 갈라질 것이다. 그 다음에 건너라.” 하지 않았습니다.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물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길이 생길 것이다.”하는 말씀입니다. 요단강 물이 넘치고 있습니다. 언덕까지 물이 넘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여호수아의 명대로 요단에 이르러 그 발이 물에 잠기자 그 강은 쫙! 갈라졌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문제가 해결되면 믿겠다는 사람에게 믿으면 해결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직도 물이 창일하고 있지만, 아직도 희망이 보이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이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물에 발을 들여놓는 행위 그 자체가 바로 믿음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걸음으로 이 환난과 어려움에 도전하면 시작하자마자 길이 생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도 밝은 날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 앞에 어두운 구름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행진을 계속합시다. 주님을 믿고 요단강 물 속에 우리 발을 잠깁시다. 우리 발이 잠기자 마자 볼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을 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어둡고 절망스럽습니다. 염려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인생의 온갖 난관을 의미하는 요단강 물이 창일하여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가 그 땅을 정복하여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땅은 반드시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지런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며, 우리 스스로 성결케 하고, 말씀 믿고 요단에 들어섭시다. 그때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 강물이 쫙 갈라지면서 요단을 건너게 되고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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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무지 감사해요
존재 목사님, 만경강 목사님 함께해 주심에 감사드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