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도 창의군 [十三道倡義軍, 1907년~1909]
"총칼로 국권 침탈에 맞서다"
동대문밖 30리까지 진격한 의병
1908년 1월 허위(許蔿)가 이끄는 의병 부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육박하였다. 이 부대는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의 선발대였다. 13도 창의군은 전국에서 모인 의병들이 편성한 연합부대였다. 허위가 동대문 밖에 육박한 것은 13도 창의군이 전개한 서울진공작전의 일환이었다. 이 작전은 을사늑약 이후 다시 일어선 항일 의병들이 전개한 피어린 항쟁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의병들의 투쟁은 이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향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의병들은 연해주, 간도 등 국외로 이동하여 교민사회를 근거지로 한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였다.
항일의병 다시 일어나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이에 맞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은 대부분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로 이 가운데 상당수는 10년 전 을미사변에 반발하여 이미 의병을 일으킨 바 있었다. 이들이 10년 만에 다시금 재기한 것이다. 이 의병을 을사늑약이 계기가 되었다고 해서 10년전의 을미의병과 구분해서 을사의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충남 홍주에서 거병한 민종식(閔宗植), 전북 태인에서 거병한 최익현(崔益鉉) , 태백산 호랑이라고 불리던 신돌석(申乭石) 등을 들 수 있다.
1907년은 일제의 국권 침탈에 있어서 또 하나의 고비가 되는 해였다. 헤이그특사사건, 고종퇴위, 한일신협약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일제는 이를 통해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고종(高宗)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이 대한제국의 국정을 확실히 움켜 쥘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대한제국은 망국의 길에 한걸음 더 바짝 다가서게 되었다.
한일신협약의 후속조치 가운데 하나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교묘한 방식으로 아무런 저항 없이 대한제국의 무장력을 해체시키려고 하였다. 시위대(侍衛隊)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이에 반발하여 자결하였으며 시위대가 들고 일어나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지방에 주둔한 진위대(鎭衛隊) 병력도 연쇄적으로 봉기하였다.
원주진위대 병력이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나 의병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이동휘(李東輝)가 이끄는 강화분견대와 홍주분견대도 의병에 참여하거나 탈영하였다. 이렇게 그 동안 의병 진압에 동원되던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함에 따라 의병들의 전투력을 현격하게 강화되었다. 이렇게 의병전쟁은 군대 해산 이후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는데 이를 정미의병이라고 한다.
13도 창의군의 편성
1907년 9월 이은찬(李殷瓚), 이구재(李九載) 등이 해산 군인 80여명이 포함된 500여명의 병력을 모집한 후 문경에 거주하는 이인영을 찾아가 총대장이 되어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인영이 이 호소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13도 창의군의 긴 도정이 시작되었다.
이인영은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되어 본격적인 의병활동에 돌입하였다. 본격적인 전투행위에 돌입하기 위해 군사를 모으는 한편 김세영을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에 비밀리에 호소문을 보냈다. 그는 이를 통해 의병부대는 애국단체이니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관동창의대장의 명의로 해외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인 「Manifest to all C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포들이여. 우리들은 단결하여 우리 조국을 위해 몸 바쳐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잔인한 일본인들의 통탄할 만한 악행과 횡포를 전 세계에 호소해야만 한다. 그들은 교활하고 또 잔인하며 진보와 인도의 적이다. 우리들은 모든 일본인과 그 스파이 앞잡이 및 야만의 군대를 쳐부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여야 한다.”
이인영은 원주를 거점으로 무장활동을 벌이면서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각도에 격문을 보내 양주에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취지는 모두 힘을 합쳐 서울로 쳐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호소에 따라 1907년 11월 각도의 의병부대들이 양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경기도의 허위, 황해도의 권중희, 충청도의 이강년(李康秊), 강원도의 민긍호(閔肯鎬), 경상도의 신돌석, 전라도의 문태수(文泰洙), 평안도의 방인관(方仁寬), 함경도의 정봉준(鄭鳳俊) 등의 의병장이 모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격문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방인관이 평안도에서 80여 명, 정봉준이 함경도에서 70여 명을 거느리고 자진하여 참여하였다. 집결한 병력의 숫자는 1만 여 명이었지만 주축은 민긍호, 이구재, 이은찬이 이끄는 강원도 지방의 의병 6천 여 명이었다. 이 가운데 신식 소총을 가진 해산 군인도 상당수 있었다.
서울진공작전
양주에 집결한 의병들은 1907년 12월 6일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전 병력을 24개 진으로 하는 13도창의대진소를 편성하였다. 총대장에는 이인영이 취임하였으며 허위가 군사장을 맡았다. 각 도별 의병대장의 진용은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朴正斌), 진동창의대장 권중희, 관서창의대장 방인관, 관북창의대장 정봉준, 호남창의대장 문태수 등이었다.
13도 창의군은 서울진공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들은 부대별로 분산하여 서울로 진격하여 같은 날 동대문 밖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허위가 선발대를 이끌고 먼저 출발하였다. 의병부대의 지휘부는 위정척사사상으로 무장한 유생들로 구성되었던 만큼 세밀한 작전계획은 없었다. 일본은 이러한 의병들의 동향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한강의 선박 운항을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배치하는 등 경계를 강화하였다.
일본은 의병들이 집결한 양주 방향으로 부대를 파견하여 의병의 진로를 차단하는 한편 선제공격을 통해 기선을 제압하려 하였다.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 300명이 계획대로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일본군과 곧바로 교전에 들어갔다. 여러 시간 싸웠지만 기다렸던 후속 부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는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의병부대는 개별 부대별로 항쟁을 계속했다. 총대장인 이인영은 문경으로 귀향하여 부친상을 치른 1909년 6월 7일 충북 황간군 금계동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군사장 허위는 가평과 적성 방면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1908년 6월 11일 양평 유동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이 벌어진 1907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에 이르는 시기는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1908년에는 강원도 의병이 가장 강력했고 1909년에는 전라남도 의병이 가장 강성했다. 일제는 한국침략에 대한 저항을 멸절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이른바 ‘ 남한대토벌작전’이란 이름으로 전개된 살육전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살아남은 의병세력은 국내에서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연해주나 간도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