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하는 대로 판단 받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지기 몇 해 전, 오하이오주의 큰 농장에 한 초라한 소년이 찾아와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주인은 일손이 모자랄 때라 소년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3년 뒤 이 ‘머슴’이 자기 딸과 사귀는 것을 알고 내쫓았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뒤 주인은 낡은 창고를 수리하다 그 소년의 짐을 발견하고 내용물을 살피던 중 소년의 이름이 제임스 A 가필드라는 것과 현직 20대 미합중국 대통령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농장 주인은 대통령 사위를 맞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도 단점이 아주 많습니다.
노아도 술주정꾼이었고 모세는 말더듬이에 용기 없는 사람이었고 삼손은 호색가였으며,
다윗은 호색가에 살인자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호색가에 우상 숭배자였으며 우리의 첫 교황님인 베드로는 하루에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사람이고 바오로도 교회의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 역사의 큰 획을 그으신 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대한 인물로 세우셨는데 우리가 어찌 그들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심판자는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강도의 이야기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란 이름은 ‘늘리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앗티카라는 지방에 살면서 자기 영지를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아 쇠 침대 위에 누이고 결박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몸을 잡아 늘여 침대 길이에 맞추고,
반대로 길이가 침대보다 길면 긴만큼 잘라버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이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 그가 여행자들에게 했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라는 말은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융통성이 없다는 뜻의 관용구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 안에 그런 침대가 있다면 빨리 버립시다.
언젠가 그 침대 위에 내가 누이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조: 한태환, 예화포커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하시며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율법을 심판하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자가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정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이기에 이웃을 심판한단 말입니까?” (야고 4,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