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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개신교에는 다양한 교파가 있으며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만, 일반인에게는 모두 한통속인 '교회'일 뿐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을 충분히 흙탕물로 만들 수 있듯 한국교회 역시도 그러하다. 문제는 미꾸라지가 한 마리가 아니라는 데 있다. 아니, 너도나도 흙탕물을 만드는 미꾸라지가 되지 못해 안달하는 현실이다. 교회는 자기가 속한 지역사회를 껴안아야 한다 교회는 지역사회와 밀접한 연관을 가져야 한다. 지역사회를 껴안지 않고 '불신지옥 예수천당!'만 외친다면, 이 나라의 현안이나 현상에 대해 성서의 눈으로 해석하지 않고 천국, 혹은 개인 구원만 외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에는 예수도 구원도 없다.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사이비만 있을 뿐이다. 혹은 지역사회의 문제와 이 나라의 현안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가진 자들의 편이나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한다면, 편협할 정도로 가난한 자들과 억눌리는 자들의 편이셨던 예수의 정신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지인이 아는 목사는 서울 강북구에 위치한 교인 100여 명 정도의 작은 교회 담임목사로, 지역사회와 통일 운동 등 사회적인 일들에 이르기까지 나름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다.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크다는 ㅁ교회가 바로 교회 옆 땅을 사들여서 100억 상당의 건축비를 들여 교회를 지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 교회뿐 아니라 주변 작은 교회들은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형 마트가 들어서면 주변의 영세 상인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마치 대기업이 분점을 내는 것처럼 대형 교회들도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하는 것이다. 이미 대형 교회는 기업의 마케팅 전략을 모방해서 기업화 전략을 꾀하고 있다. 전문가 집단에게 막대한 컨설팅 비용을 주고, 그들의 전략에 따라 교회의 양적 성장을 이뤄가는 것이다. 교회인지 기업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이 정계에 진출하고, 그들의 정치적인 행보는 기독교의 이미지와 깊은 관련을 갖게 되었다. 더군다나 정교 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며 70~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던 교회나 목사에게 '빨갱이 집단', 혹은 '정치 목사'라는 딱지를 붙이던 보수 교회의 지도자들은 권력에 빌붙어 철저하게 정치적인 행보를 걸어왔으며, 특정 사안에 대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명확하게 내고 있다. 교파의 다양성과 교단의 분열, 같은 교단 내에서도 자신의 견해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성서를 해석하는 일 등은 개신교 내에서도 일치 불가능한 상황을 가져왔다. 이 와중에 교단 정치는 대형 교회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대형 교회 지도자들은 상당수가 보수적인 태도를 가진 목사들이었고, 미국식 기독교에 충실한 이들이었다. 집단 매도되는 개신교의 현실 이런 이들의 발언이나 불미스러운 행동들은 여과 장치 없이 언론에 보도되고, 너무 복잡한 개신교의 체계는 언론사 기자들조차도 충실한 기사를 쓸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개신교는 가십성 기사와 부정적인 기사들이 주로 이슈화되었고, 나름대로 교회의 본 모습을 추구하는 작은 교회들이나 교단의 일들은 깊이 있게 다뤄지질 않고 표면적으로 다뤄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개신교 내부 갈등도 이를 부채질했는데, 견해 차이 때문에 특별한 사안에 대해서 정반대되는 목소리를 내왔다. 이 과정에서 보수적인 대형 교회의 목소리가 마치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목소리처럼 되어버렸고,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한 막대한 자금까지도 확보했기에 일반인들은 왜곡된, 혹은 변질한 개신교회가 곧 모든 교회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작은 교회들에는 희망이 있는가 작은 규모의 교회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서 대형 교회가 걸어간 길을 추구하고, 될 수만 있다면 그리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저 밑뿌리부터 완전히 썩어져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이들처럼 이들은 '대형 교회를 꿈꾸며,' 대형 교회의 성장 전략 세미나 등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묻기도 전에 교회의 몸짓 불리는 컨설팅에 집중하고, 성공(?)하지 못한(대형 교회로 성장하지 못한) 모든 책임은 본인의 덜 됨에 있다고 자책하는 것이다.
'개독교'라고 부를 때 돌아서라 크게 보면 이런 복합적인 문제들이 한국교회를 위기로 몰고 온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에 예수가 오신다면, 아마도 그는 십중팔구 매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들에 의해 이단아로 정죄될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불행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만 한다. 이 본질을 회복하려면 평신도들의 변화가 중요하다. 요즘 한국교회의 하나님은 '개 교회의 담임목사'다. 그렇게 만든 주범은 안타깝게도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아멘!'으로 화답하고 열광하는 교인들이다. '아니오!'라고 해야 할 때조차도 '아멘!'으로 화답하고, 담임목사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신앙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행보를 걷게 되는 것이다. 대형 교회는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으로 분점을 내듯 하여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싹쓸이하고, 작은 교회들은 대형 교회가 되지 못해 안달하는 한 한국교회에 희망은 없다. 각 지역에 속해 있는 교회는 지역사회의 문제를 껴안고 고민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속한 지역의 철거민들이 국가권력의 폭력적인 진압에 죽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철거민들과 함께하는 일 하나도 없이 교회에서 '성령 충만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는 것'은 악마의 탈과 다름이 아니다. 국가의 잘못된 정책으로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파괴됨에도 침묵한다면 그야말로 정치적인 너무도 정치적인 행보를 걷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염려하고 혹은 '개독교'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여, 본질을 회복하라!'는 요구이며, 아직도 기독교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럼에도 변하기를 거부하고 지금의 잘못된 행태를 이어간다면 사람들은 아예 기독교에 등을 돌려버릴 것이며, 관심조차도 두지 않을 것이다.
[눅 19:45-46] (46)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교회의 숭고한 목적 / 엡3:1-12 본 장에서는 사도직과 교회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제아무리 크고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과거는 어떠했던지 간에 지금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실 죽은 교회요, 교회의 생명이 숭고한 목표를 상실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겨우 자기 만족에 빠져 있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은혜의 빚진 자로서 주의 일에 힘쓰며 주님의 마지막 부탁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힘쓰기를 원하십니다. 이 복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서 살며, 무엇을 위해서 고생하고 일하며, 무엇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있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옛날 ‘크리스토퍼 우렌’경이 성 바울 교회당을 건축할 때에 생긴 일화입니다. 이 새사람이 똑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첫째는 자기가 사는 목적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살아 있으니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세상에서 출세하고 돈버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는 사람이 일하며 사는 목적을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복되고 귀하신 주님의 일을 하는 그리스도의 일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갇힌 자’라고 여러 번 성도들에 말하면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한 고난을 자랑하며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의 종이 아니오, 물질의 종이 아니오, 하나님의 종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삶의 목적과 우리의 신분을 망각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분명한 목적과 내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인식할 때에 교회의 숭고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온전하고 완전하십니다. 인간의 계획은 잘못될 수도 있고 얼마든지 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의로우시고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아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 절대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내 계획과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 찌라도 하나님의 복된 경륜을 알기 때문에 즐거움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언제나 은혜가 됩니다. 언제나 복이 됩니다. 3. 교회의 숭고한 사명은 겸손한 자에게 맡기십니다. 그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능력의 사람이요, 사도였습니다. 더욱 자랑할 것이 많은 분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부족을 감추려고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족을 생각하면서 날마다 겸손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교만이 왜 생깁니까? 물론 사탄의 역사이지만 자신의 부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항상 옳고 다른 사람은 항상 잘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못마땅하게 생각이 됩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요,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겸손한 자에게 교회의 숭고한 사명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일군 됨 그 자체가 복입니다. 직장에서 맡은 일 만큼도 여기지 않습니다. 윗사람이 맡겨 준 일은 밥줄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나 신경을 쓰고 정성을 다해서 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직장에서 자기 멋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그만둡니까? 세상일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직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믿습니까? 세상의 어떤 직분 보다 소중하고 가장 귀한 것임을 믿습니까? 이 직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사 능력의 일군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각양 은사와 복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딤전3:13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큰 담력을 소유하셔서 하나님의 복된 역사를 다 이루시기를 주님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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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존재 목사님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