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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수잔 앤드슨이라고 하는 아 주머니가 있는데 설흔네살입니다. 직장여성입니다. 의사의 오진으로 인해서 그는 실명하게 됩니다. 장 님이 됐습니다. 참 마음이 괴로웠 지만은 1년 동안 치료받은 다음에, 그냥 집에만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 직장에서 잘 받아주어서 다시 직장 에 나가게 됩니다. 버스를 타고 직 장에 나갈 때 남편이 동행해 주었습 니다. 참 공교롭게도 남편의 직장 과 자기 직장은 정반대에 있습니다. 그 남편은 일찍 떠나서 자기를 데려 다주고 그리고 다시 자기는 자기 직 장으로 갑니다. 이렇게 얼마동안을 했는데 언젠가는 남편이 이렇게 말 합니다. 남편은 군인인데요, 여보, 내가 늘 이렇게만 할 수가 없구만, 시간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어 차피 당신은 언젠가라도 혼자 다녀 야 되겠는데 오늘부터는 혼자 직장 에 나가면 어떻겠냐고. 이 아내는 그때 몹시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 를 데려다 주는 것이 귀찮은 모양이지?' 지겨우냐고, 내가 살아 있는 게 이렇게 불편하냐고, 짜증을 냈습니 다. 남편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러면 내가 도와주마 했는데도 아내는 화가 났어요. 아니라고 나 혼자 간다고.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직장에 나갔습니다. 하루 가고, 이틀 나가고, 보름동안을 나갔 습니다. 어느 날 버스운전사가 이 렇게 말합니다. 운전기사가 말하기 를"아주머니, 참 복이 많으시네요. 부럽습니다"그러더랍니다. 아니 제가 이제 시각장애자인데 뭐가 이 렇게 부럽냐고 그러니까"아닙니다. 아주머니가 여기 버스에서 내려서 저 사무실에 들어갈 때, 그때까지 저 밖에서 잘 생긴 군인 남자가 당신을 매일같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들어갈 때 손을 흔들 었습니다" 그때에 이 부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내 남편이 나를 이렇 게 혼자 보내놓고 뒤따라와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눅 24: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가까이 계시는 주님 성경본문: 누가복음 24:13-35
많은 기업체가 부도 나서 문을 닫고 실직자들이 늘어나는 이때에 어깨가 축 늘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처자식을 먹여 살릴 것인지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소득은 줄어들고 각종 공공요금과 물가가 인상되면서 한숨 소리만 커지고 있습니다. 언제 이런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답답해들 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현재의 우리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던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사람들 가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그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며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두려움 때문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열 한 사도와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긴급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과 천사가 그분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풀이 죽어 있는 상태에서 소망을 가지게 했음직한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했습니다(11절).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서 정말 그 곳이 비어 있음을 확인했지만 오히려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결과만 초래했습니다. 25리 - 60스타디온(60x185m=11.1km)
그 날에 그들 중 두 사람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예루살렘에서 11km 가량 떨어진 엠마오를 향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들이 슬픈 빛을 띠었다는 사실(17절)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근거 없는 소문으로 단정해 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생활했는데 그분의 죽음으로 바라볼 대상을 잃게 되어 절망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현되기를 바랐던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 불가능하게 된 데 대하여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두려움은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더욱 확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실수하게 만듭니다. 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가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16절). 그들의 소망인 주님께서 바로 곁에 계시지만 소망을 잃고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하다가 벧엘에 이르러 돌을 베개 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꿈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중에 잠을 깬 후에 말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16)
한때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략하려 했으나 엘리사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를 붙잡기 위하여 밤중에 그가 머무르는 성에 많은 군대를 보내어 성을 에워쌌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침 일찍 일어나 그 군대를 발견하고 무척 두려워했다. 그때 엘리사가 한 말이 있다. “대답하되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6-17)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두려움은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둘째,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에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신 것은 위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이들은 위로하기 위해서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믿었다고 했습니다(19절). 아니 그보다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믿었지만 그분께서 죽으신 마당에 그런 식으로 말하다가는 낯선 사람에게 조롱받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한 단계 낮추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말 중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는 표현은 누가복음 서두에서부터 성탄과 관련해서 나오는 표현이며 메시야에 대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절). 미련하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이들의 무지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의 말한 것”이 기록된 책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무지는 의심으로 연결됩니다. 결국 이들은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기뻐하고 환호해야 할 때에 근심하고 절망했던 것입니다.
메시야가 고난을 받은 후에 영광을 얻게 될 것을 예언한 대표적인 말씀이 이사야서 52장 13-15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50)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119:130)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과 함께 동행하십니다.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41장 10절과 같은 말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장래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히며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요즘 아이들 자전거는 타이어가 두꺼워서 넘어지지 않고 쉽게 탈 수 있다. 그러나 옛날 자전거는 알다시피 타이어가 가느다랗다. 잘 넘어졌다. 자전거를 배울 때 사촌형이 뒤에서 붙잡아주던 기억이 있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어느 순간에 보니 붙잡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혼자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넘어지려 할 때는 어느 순간에 다가와 잡아주는 것이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 않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혹시 “하나님께서도 내 문제만큼은 어떻게 하실 수 없을거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그 동안 내 멋대로 죄를 짓고 주님을 멀리 했는데 주님께서는 더 이상 나를 돕지 않으실거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이사야서 40장 27-29절을 보십시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40:27)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40:28-29)
자동차를 운전하며 어디를 갈 때 아내가 옆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뒷자리가 안전하고 발 뻗기도 편하다고 해도 굳이 옆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간혹 뒷자리에 앉을 때가 있다. 마음 상한 일이 있으면 꽁해서 뒤에 앉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러다가 나에게 한다는 말이 “내가 미워요? 우리 사이가 왜 이렇게 멀어졌지요?” 한다. 말은 바로 합시다. “내가 멀어진게 아니라 당신이 멀어진 거요. 내 자리는 운전석 그대로인데 당신이 옮긴거 아뇨.” 우리 사이가 다정한 사이가 되려면 다시 앞자리로 나오면 되는 것이다. 주님과 거리가 멀어지게 느껴지는 것은 당신이 멀리 했기 때문이다. 그분 가까이 나오면 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떠나지 않으신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어느 젊은이가 꿈에 하나님을 만나 하늘 나라로 올라갔습니다. 하늘 나라를 구경하던 중 각 사람의 살아온 발자취를 그려 놓은 모래밭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이 생겨 살펴 보았습니다. 그 젊은이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모래밭에는 발자욱이 두 개가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라고 생각되는 곳에는 발자욱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나님께 따지듯이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왜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혼자 내버려 두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들아,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단다. 너와 동행하다가 네게 고난이 닥쳤을 때는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아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당당하게 행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솝 우화의 꾀 많은 여우 이야기가 있습니다. 호랑이에게 자기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를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뒤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정말 여우는 당당하게 앞서 나아갔고 숲속의 동물들은 그 앞에서 다들 도망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동물들이 두려워한 것은 여우가 아니라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를 두려워한 것이고 여우는 자기 뒤에 호랑이가 있기 때문에 어느 짐승도 자기를 해치기는커녕 도망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사람팔자 시간 문제입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우리를 돕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재물이 더해지기도 할 것입니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들이 복으로 변하기도 할 것입니다.
셋째, 안내자가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성경 말씀에 무지한 상태대로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27절). 후에 이들은 이것을 “성경을 풀어 주”신 것으로 회상했습니다(32절).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들의 안내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축복을 깨닫고 누리기 위해서는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그 안내자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13:7)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하나님 말씀을 알고자 하지만 혼자 힘으로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그렇습니다. 아직 말씀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신자들이 그렇습니다. 이들에게는 성경을 가르쳐주고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인생길은 우리가 아직 가 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의 여행입니다. 가이드 없이 낯선 땅을 여행하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므로 살아 계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전지전능하신 그분께서 동행해주신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축복입니다.
처음 유학길에 올랐을 때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과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이었습니다. 큰 가방을 둘씩이나 가지고 갔는데 택시를 잡았다가 털리는 것이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팁을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그렇고. 엉뚱한 데 내려놓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공항에서 내려서 택시나 버스를 타야 하는데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그 도시에서 목회하는 한인교회 목사님이었다. 아는 사람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는데 우리는 안면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고 만나리라는 언질을 받지도 못했다. 그분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그 다음날 친히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겼는지 모른다.
당신이 아직 그분을 인생의 동행자로 모시지 못했다면 오늘 그분을 모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주이심을 믿는다면 오늘 그분은 당신 인생의 동행자가 되실 것입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그 때가 있죠. 그런데 이제 보게 되었네요. 감사한 일이 아닐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