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의 지도자들
초기 교회의 신자들 중에는 로마제국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신상과 황제의 상 앞에 분향을 하거나, 봉헌을 하지는 않았지만 제물봉헌 확인 특별위원회를 매수하여 봉헌 증명서를 교부받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봉헌자의 명부에 자신들의 이름을 몰래 넣게 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박해가 끝난 뒤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여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이들이 생기자 일부에서는 그들이 참회하면 과거의 일은 묻지 말고 따뜻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일부는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성 파비아노 교황의 순교 이래 14개월 동안의 교황 공석 시대를 거쳐 251년에 교황에 선출된 성 고르넬리오 교황은 관대한 용서를, 로마의 사제 노바시아누스는 이를 반대하여 엄격주의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고매한 신학 지식과 명성이 높았던 노바시아누스는 고르넬리오 교황과 충돌하게 되자 자신을 대립 주교로 축성하게 하고 대립 교회를 세움으로써 로마 교회가 둘로 갈라 자칭교황이라 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엄격한 성성(聖性)의 이상을 증거로 대며 전체 속죄 실행에 있어서까지 엄격주의를 주장하였고,
고르넬리오 교황의 가톨릭교회를 신앙에서 이완된 신앙의 배신자로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신봉자들은 자신들을 <순결파>로 불렀습니다.
논쟁이 계속되자 당시 교황으로 재임 중이던 성 고르넬리오는 종교 회의를 소집(251년)했고.
그 회의에서 그는 회개한 이들이 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노바시아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교회회의를 통해 교회 공동체에서 단죄 받아 축출되었습니다.
성 고르넬리오는 갈루스 황제에 의해 추방되어 로마 근교의 치비따벡끼아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성인상본에 뿔을 든 모습은 그의 이름이 뿔이라는 뜻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카르타고와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비슷한 긴장 상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이 문제의 합리적이고 관용적인 해결을 위해 크게 노력하였습니다.
치프리아노는 210년경 카르타고의 학식 높은 이교인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유명한 수사학자로 성공하였으며 246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사제가 되고 249년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으며 이 때부터 성서와 테르툴리아노의 저술에 심취하여 깊은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249년에 데치우스의 박해로 망명 중에도 서간을 통해 교회를 계속 이끌어 갔으며 251년에 망명지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처럼 매우 어지러운 시대에 자신의 모범과 저술로써 교회를 탁월하게 다스렸는데, 251년 <배교자에 대하여>를 저술하였고, 고르넬리오 교황과 더불어 배교했다 개종하는 이들에 대하여 교회가 어떻게 그들을 수용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눈 편지들은 가톨릭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치프리아노 주교는 유배되었다가 258년 9월 14일에 순교하였다.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