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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어느날 마을회관에서 종교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났다.그 영화는 한국전쟁에서 생긴 고아들의 참상을 소개하며 이들을 돌보는 손길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그 영화를 보았던 한 농부 부부의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들은 그 고아들이 불쌍하기는 하나 가난한 농부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마음 아픈 영화의 장면들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이들 부부는 이 일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됐다. 그것은 농장의 일부를 팔아 직접 한국에 가서 8명의 고아들을 양자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이 마을 신문에 기사로 나가자 여기저기서 이들을 돕겠다는 편지가 왔고 어떤 가정에서는 고아를 양자로 삼겠다는 연락이 왔다.그래서 이 농부는 전적으로 이 일에 매달리게 됐는데 그들이 바로 유명한 홀트 양자회의 주인공인 해리 홀트 부부이다. 우리도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소멸치 않고(데살로니가전서 5:19) 순종할 때 이처럼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될 수 있다.
행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보다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렇다면 어떤 신자가 보다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정말 주님으로 믿는다면 지식도 감정도 의지도 주님께 복종시켜야지, 어느 한쪽만 주님께 복종시킨다면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습니다. 첫째, 지식을 주님께 복종시켜 합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그 지성을 주님께 복종시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고후 10:5의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니"란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항상 기도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그 지식을 가지고 이론을 내세우고 따지며 하나님을 대적하기 쉽기 때문에 그 생각과 지식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전 8:1)고 하지 않았습니까! 반면에 진리에 대한 지식은 풍부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고 롬 10:2에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인간적인 지식은 주님께 굴복시키며 동시에 진리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 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감정을 주님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하신 말씀대로, 감정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혈기와 분노의 감정이나 질투의 감정이나 성적인 감정이나 모두 주님의 통제와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엡 4:26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의분과 사분을 가려서 사분은 절제해야 됩니다. 또 감정이 너무 메말라도 정상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감정적인 요소는 무조건 멸시하면서 물거품과 같다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만, 진정한 신앙은 감정까지라도 주님을 향해 뜨겁고 강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사는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왕하 5:15-20) 예언했습니다. 그외에도 성경에 "성령이 감동시켰다"는 말씀이 많이 기록된 것을 보면(대하 24:20, 대하 36:22 등) 성령의 역사는 감정까지도 움직이며 역사할 때가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정적으로 찬송할 때는 하고, 뜨겁게 기도할 때는 해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마다 가보면 부흥되는 교회는 찬송도 기도도 열정적으로 하고 기쁨도 충만한 것을 알 수 있고, 아멘도 안하고 기도 소리도 안들리는 냉냉한 교회는 생명력이 없고 부흥도 안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에만 치우친 신자도 온전하며 건전한 교인이 못됩니다. 셋째, 의지를 주님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뜻은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내 뜻을 굴복 시키겠사오니 아버지의 뜻(의지)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의지적인 요소가 결핍되면 뼈대없이 살만 있는 무골충과 같습니다. 사 26:3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Will)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항상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신자가 훌륭한 신자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온전히 주님의 지배와 통제를 받는 신자가 온전한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를 예로 든다면 지적으로는 먼저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 알아야 되고, 감정적으론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부끄러움을 느껴서 때로는 가슴을 치며 통곡도 하는 면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생전 맹숭 맹숭해서 애통하는 마음도 없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면 올바른 회개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의지적으로는 단호하게 죄를 끊고 돌아서는 것이 없으면 참된 회개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사 55:67). 지식과 감정과 의지, 이 인결의 삼 요소를 모두 주님께 복종시킬 때 보다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 5:20에 예수님께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정신이 있나 없나' 의심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외면적으로 볼 때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거의 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13가지나 되는 계명을 완벽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고 내면을 보시는 주님께서 보실 때 그들의 내면이 청결치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막 7:20-23에서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하시고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속마음을 청결케 하지는 않고 겉만 깨끗케 하고 사람 보는 데서만 계명을 지키고 거룩한 체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회칠한 무덤 속에 송장이 가득한 것과 같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살인치 말라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하였지마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 22) 하신말씀대로 내면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살인은 하지 않지만 속마음으로 성내며 저주하며 형제를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면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살인죄를 범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 5:27,28에서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외부로 나타나는 간음죄를 범치 않았다 하더라도 내면을 살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 속으로 간음하고자 하는 나쁜 마음을 품어도 간음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마음 속을 깨끗케 하고 내면을 잘 다스려야 보다 온전한 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외부만 깨끗케 하는 위선자들과 같이 하지 말고 내면 즉 생각과 마음까지도 깨끗이 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되지 안씁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내면을 깨끗케 하도록 힘써야 온전한 신자이지 그렇지 않으면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은 것입니다.
마 5:43에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하시고 48마 5: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원수까지 사랑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고 자기에게 인사하는 자만 인사하면 그것은 이교도들도 하고 이방인들도 하고 깡패들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고 사랑해 주는 보다 넓은 사랑을 하는 자야말로 온전한 신자입니다. 눅 10:29에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하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우고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된 것을 보고 제사장도 레위인도 다 그냥 보고 지나 갔으나 그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싸매주고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려다 주고 여관비까지 물어 주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어려움에 처하여 내 도움이 필요한 자는 원수까지도 내 이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문화의 장벽도 넘어서, 인종의 장벽도 넘어서, 국가의 장벽도 넘어서, 감정적 장벽도 넘어서 사랑해야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산당일지라도, 불교나 회교나 무신론자 일지라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폭 넓게 사랑해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 5:46,47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하시고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의 방법은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이요, 세상 방법은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이요, 하나님의 방법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시면서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가지는 다른 종교에서도 다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한테 칭찬받기 위해 인기의 목적으로 했으므로 종교적인 제스츄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의 눈에는 가증스러운 위선일 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칭했던 '외식하는 자'라는 것은(hypocrites), '위선자'라는 뜻으로 헬라어 원어로는 '배우'(play-actor)라는 뜻이 있습니다. 배우는 실제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양 가장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서 나아가는 체 하고, 회개하지 않으면서 회개하는 체 하는 것입니다. 가증한 위선이요, 종교적인 제스츄어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귀는 사람들의 칭찬에 가 있고 그들의 마음은 인기에 가 있었지 중심을 기울여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 공연히 공허한 구절들을 남발하고 기계적이며 형식적으로 말을 많이 늘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증언부언 기계적으로 하지말고 중심을 기울여 기도하라고 했고,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진실한 마음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이나, 공중 기도하는 것을 못하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사람에게 칭찬이나 듣고 인기를 끌기 위해서 공허한 말을 진실성 없이 기계적으로 길게 늘여놓는 기도의 모습을 버리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깊은 기도를 드리십시오. 금식이나 구제도 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보이려고 하는 것이어야 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 6:33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빵 문제나 물질 문제나 육체적인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빵이나 물질 문제나 육체적인 것을 아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구할 것을 우선적으로 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질이나 명예보다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육신적인 것보다 영혼의 문제를 앞세우고 세상 것보다 천국을 더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선 순위를 바로 세우고 사는 신자야말로 보다 온전한 신자인 것입니다.
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지식, 감정, 의지 전체를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신자요, 외면적인 의보다 내면적 청결을 구하는 신자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않고 보다 넓은 사랑을 실천하며, 사람에게 보이려고 형식적으로나 기계적으로 기도하거나 구제,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기도하고 구제하며 금식하는 보다 깊은 경건의 신자이며, 우선 순위를 바르게하여 물질보다 하나님을, 육체적인 것보다 영혼을, 세상 것보다 천국을 더 귀중히 여기고 앞세우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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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존재 목사님 오늘도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