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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세이 (5) |
신화의 재해석을 통한 인간의 이기심 비틀기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킬링 디어〉
김 문 홍
가족의 이면에 도사린 인간의 양면성
고대 그리스극은 대부분이 비극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인물의 성격 파탄에 의한 ‘셩격비극’이라면, 고대 그리스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한 인간의 파멸을 다루고 있어 일명 ‘운명비극’이라 불린다. 비극의 주인공은 대부분 평범한 인간이 아닌 왕족, 귀족, 영웅들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관객들은 자신들보다 귀한 신분인 무대 인물들이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실의와 좌절을 겪다가 끝내는 파멸에 이르는 것을 동일시하다가, 그들의 비극에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순화한다. 이것이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비극의 효과이다. 당시의 관객들은 관극을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실컷 울고 나면 감정이 순화되어 마음이 홀가분해지는데, 이런 상태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정화)라고 규정한다. 고대 그리스 관객들이 비극에 열광한 것은 바로 이 순수한 비극의 효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주제와 소재로 주목을 받고 있는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킬링 디어』(원제 :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년, 121분)는 고대 그리스 비극과는 다른 현대의 부조리한 비극이다.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허울 좋은 가족의 이면에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음습한 인간의 이기심이다. 그는 이 부조리한 인물들의 비극을 통해 도대체 끈끈한 혈연관계로 맺어진 지금 이곳의 가족이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하기나 하냐고 우리에게 냉소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그가 내세운 이 영화의 결론은 가족의 해체, 파멸, 부재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는 가족의 이면에 도사린 인간의 양면성을 묘사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인 「아울리스의 에피게네이아」에서 서사의 모티브를 차용하고 있다. 이 영화의 원 제목인 ‘성스러운 양 죽이기’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아르테미스 여신의 저주에 걸려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는 미케네의 아가멤논 왕의 선박들이 출항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아가멤논은 예언자의 지시대로 자신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게 된다. 이 영화 역시 희곡의 메인 플롯을 그대로 차용하여 영화의 기둥 줄거리로 삼고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의 구성도 희곡의 인물을 따르고 있다.가족의 아버지인 심장 전문의 스티븐(콜린 파렐 분)은 아가멤논왕에서, 어머니이자 아내인 안과의사 애나(니콜 키드만)는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에서, 딸인 킴(래피 캐시디 분)과 아들 밥(서니 설직 분)이 그렇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비극적인 희생 제물은 그리스 비극의 딸인 이피게네이아가 아니라 스티븐의 아들인 밥이 대속제물이 된다. 외부의 시선으로 볼 때 스티븐의 가족은 모든 측면에서 그 어느 가족도 부럽지 않은 모범적인 공동체이다. 그런데 아르테미스 여신을 대신한 마틴의 저주와 복수가 시작되자, 스티븐의 가족개개인은 끔찍하고 야만적인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드러내게 된다.
가족의 존재 증명을 시험하는 신의 운명적 게임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그리스 비극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암시한다. 한동안 화면이 침묵하다가 밝아지면 벌떡이는 심장이 클로즈업으로 제시된다. 이어 카메라가 줌 아웃되면 그 화면은 곧 스티븐의 심장 수술임을 확인하게 된다. 정교하고 익숙한 손놀림이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뒤바뀐다.
마틴의 아버지는 스티븐의 의료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그 뒤부터 집도의였던 스티븐과 피해자의 아들인 마틴의 묘한 관계가 시작되는데, 스티븐은 대속하는 마음으로 마틴의 말동무가 되고 선물을 하기도 하면서 그를 또 하나의 아들처럼 대한다. 그러나 이미 운명의 화살이 깊이 박혀 스티븐의 가족은 마틴의 저주가 독버섯처럼 자라는 온상으로 변질하기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 속의 인물들은 운명을 피하지 못한 채 실의, 좌절, 절망의 시련기를 거쳐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마틴의 저주는 그 실마리 찾지 못하는 헝크러진 실 꾸러미가 되는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딸을 제물로 바치듯 가족 중의 어느 누군가를 희생물로 바쳐야 한다. 그 암시로 마틴의 저주는 스티븐의 아들 밥에게로 옮겨지게 된다. 사지에 마비가 오게 되고, 다음은 거식증, 그리고 그 다음은 두 눈에서 핏물이 흐른다.
이 영화는 제물로 바칠 희생양을 선택하는 일, 그리고 러시안 룰렛 게임처럼 희생양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결정적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도덕적 선택의 딜레마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가족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는데, 자식을 보호하고 사랑해야 할 부모의 역할이 인간의 이기적 속성으로 낱낱이 까발려진다. 아버지인 스티븐은 학교를 찾아가 아들과 딸 중에서 어느 아이가 더 영리한가를 묻고, 안과의사인 어머니 애나는 자식은 또 낳으면 된다는 궤변으로 가족 구성원의 주체적 역할을 파기하는 추한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마틴의 역할은 신적인 위치를 암시한다.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듯이, 당신의 가족 중 그 어느 누군가가 죽어야 공평하지 않겠느냐 라고 힐책하는 마틴의 속삭임은,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던져놓고 전지적 시점의 위치에서 인간의 도덕적 선택의 딜레마를 즐기는 신의 위치를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현대 가족 구성원의 순수한 윤리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개인의 이기심을 통해 과연 가족이라는 제도가 필요한가, 울타리가 되고 보호막이 되는 가족윤리가 과연 있기는 한가, 도대체 가족이라는 제도의 정체성이 있는가 하고 관객 앞에 역설적이고 냉소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 속 인물인 마틴은 어쩌면 감독인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감독은 어떻게 보면 아주 잔인하고, 또 달리 보면 아주 냉혹하고, 좋게 해석하면 가족의 진정한 정체성을 시험하는 냉철한 윤리주의자이기도 하다. 아들인 밥과 딸인 킴이 연이어 사지가 마비되고, 거식증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에는 두 눈에서 핏물이 흐르는 징벌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의 실의, 좌절, 절망, 그리고 파탄의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와 고대 그리스 비극은 큰 차이를 보인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는 관객들이 무대 위의 인물들이 겪는 시련을 바라보면서, 그 인물과 자신들을 동일시하여 같이 실의, 좌절, 절망, 그리고 파탄을 겪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래서 극이 끝났을 때 관객들은 어느새 카타르시스로 순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는 지금 이곳의 관객들은 카타르시스 대신 심한 공포감 끝에, 지리멸렬한 가족의 참담한 모습과 인간의 이기심에 몸서리치게 된다.
인간의 야만적 이기심에 아연실색하다
이 영화가 고대 그리스 비극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비극은 비극이되 카타르시스가 없다. 고대 그리스 비극을 관극하던 관객들은 무대 위의 비극적 인물의 모습에 연민을 느끼고, 또한 저런 비극이 나한테 밀어닥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공포심을 느꼈다. 그처럼 그들은 관극 내내 연민과 공포를 번갈아 느끼며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 끝에 어느새 감정이 순화된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효과를 ‘연민과 공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것이 없다. 화면 속의 그들에 대한 연민과 공포는 있지만, 쏟아내야 할 눈물 대신 공포감과 역겨움만이 있을 뿐이다. 연민과 공포 뒤의 카타르시스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쏟아내야 할 감정 순화의 결정체인 눈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으니 카타르시스 역시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저 불편할 따름이다. 나도 주인공 스티븐과 같은 위기에 직면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도덕적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하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도 있다. 그러다가 결국은 음험한 인간의 이기심을 문득 발견하고 치를 떠는 자신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전작인 「송곳니」(2009)와 「더 랍스터」(2015)를 통해 기괴하고 부조리한 인간상을 제시하면서 현대문명의 섬찟한 풍경과 종말론적인 사랑의 풍경을 그린 바가 있었다. 감독은 기괴하고 불편한 소재와 도전적인 주제의식으로 관객들에게 과연 우리가 살고 잇는 이 세계가 정상적인가 하는 질문을 하도록 했다. 이번 영화는 전작 두 편보다는 그 기과함과 도전적 실험성이 많이 후퇴한 듯하지만, 관객인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는 악동의 면모를 감추지는 않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의 감독은 우리를 몹시 불편하게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을 끝임 없이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신적인 위치에 있는 듯 우리 자신을 오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처럼 군림하려 하고 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킬링 디어』는 2017년 이 영화로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여 공동 각본상을 수상했다. 현대의 가족 제도를 리트머스 시험지 위에 올려놓고 인간의 야만적인 이기적 속성을 추출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판타스틱한 부조리극에 가깝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기존 리얼리즘 영화의 배우들처럼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연기를 하지 않는다. 마치 서사극의 배우들처럼 자신의 역할에 몰입하지 않은 채 거기서 한 발짝 물러서서 인물의 연기를 보여주는 듯한 객관적 서사극의 연기를 하고 있다. 또한 이 영화는 기묘하고 놀라운 음향을 즐겨 사용하고, 인간의 비극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장엄한 클라식 음악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비극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강조하려는 듯 롱 샷을 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가족 제도는 어떠한가. 정말 사랑과 관심으로 연대하면서, 어떤 위기나 도덕적 선택에 직면해 있을 때 상대에 대한 배려나 관심으로 희생적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해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회의를 거듭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잉 영화처럼 이미 가족의 정체성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또 다른 이는 그래도 이 모래알처럼 부박한 사회에서 그래도 가족은 끝까지 울타리가 되고 보호막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갑론을박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구성원 각자가 혈연관계라는 교묘한 제도적 장치를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이 영화의 스티븐 가족처럼 겉으로는 멀쩡하고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형국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일본의 코미디언이면서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처럼 “가족이란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냉소적으로 내뱉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그래도 가장 믿을 수 있고, 이 험한 세상에서 최후의 피난처가 될 수 있는 것이 가족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어쩌면 그런 이상적인 가족제도를 끝임 없이 찾고 연대하기 위한 역설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희구하는 가족의 모습이고 풍경이 아닐까 하고......
첫댓글 우리가 숨기고 싶은 것이 다 드러나는
영화 소개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