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소리가 소리 없음에 밀려나다
김유진 감독의 <나는보리>
소리 없는 세계로 편입되고자 하는 열망
우리는 지금 말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는 쏟아져 나오는 그 말들에 말하는 이의 진심이 얼마나 담겨 있으며, 또한 그 말을 듣는 이는 그 말들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을까.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말들로 인해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든다. 언어로 진심을 드러낼 수 없으며, 언어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부조리극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1987년에 국내 개봉된 린다 헤인즈 감독의 <작은 신의 아이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외딴 항구도시 청각장애 학교에 부임한 제임스 리즈 교사와 그 학교 출신으로 청소부로 일하는 사라 노먼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농아인 그녀에게 말을 가르쳐 자기 세계로 편입시키려 한다. 그러나 노먼은 자신이 속한 침묵의 세계가 한없이 평온한데, 왜 자기를 말의 세계로 끌어넣으려 하느냐며 강력하게 반박한다.
수화로 말을 교환하는 농아의 세계가 불편하고, 소리가 있는 말을 주고받는 청인의 세계가 불편할 것이라 예단하는 것은 청인 세계의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가족 구성원 중 대부분이 농인인데 그 중 한 아이만 청인이라면 어떨까. 김진유 감독의 데뷔작인 <나는보리>(김진유, 110분, 2020)는 그러한 가정 하에서 출발한다.
김진유 감독은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강원도 주문진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농인이다. 그런데 자신은 소리를 듣고 말을 하는 청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마치 이 영화의 가족 구성원과 같다. 부모와 남동생은 모두 농인인데 초등학교 4학년인 보리만은 소리의 세계에서 사는 청인이다. 바깥에서 볼 때는 다행한 일이라고 여길 수 있다. 소리 없음의 불편함을 청인이 해결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런데 정작 보리는 그렇지 못하다. 모두가 수화(수어)로 의견을 교환하는데 자신만 동떨어져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밀려난 느낌이다.
첫 장면이 이를 상징적으로 은유하고 있다. 밥을 먹으면서 엄마와 아빠는 남동생의 흔들리는 이빨을 바라보면서 즐겁게 수회를 얘기하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보리는 자신은 그 세계에서 밀려나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외로움을 느낀다. 자신도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면 그 즐겁고 유쾌한 밥상머리의 풍경에 기꺼이 즐겁게 참여하여 가족의 사랑을 만끽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때부터 보리의 마음속에서는 자신도 그들처럼 소리를 잃고 싶다는 열망이 자라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정말 역설적인 은유를 나타내고 있다. 소리를 듣고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정상인이 장애인의 세계를 부러워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보리가 부러워하는 것은 가족의 끈끈한 유대감과 사랑이다. 자신도 농인이라면 그들의 세계에 편입되어 소리 없는 사랑의 대화를 즐길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또한 보리가 소외감을 느끼는 무엇인가. 뭔가 모르게 그들의 세계에서 밀려난 느낌이다. 그들의 소리 없는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는데 자신은 청인이라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 영화가 기존의 다른 장애인 소재의 영화와 차별화되고 있는 점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장애가 불편한 것인데 정작 그들은 전혀 불편하지 않고, 정상인이 그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기존의 영화들이 지닌 문법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역발상의 시각으로 주제를 설정하고, 전복적 시각으로 서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보리가 소외감을 떨쳐 버리고 그들의 침묵 속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열망이 추동력이 되어 감동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짐짓 소리를 잃은 척 소리 없음을 엿보다
보리는 소리 없음의 세계에 편입되고자 짐짓 소리 없음을 가장한다. 자신도 청인의 갑갑함을 버리고 농인의 자유를 택하려 한다. 해녀들이 깊은 바다 속에 오래 있다 보면 귀가 멀어진다는 말에 스스로 바다로 뛰어든다. 보리가 병원에서 남동생과 함께 청력 테스트를 하는 장면은 역설적이다. 남동생은 소리에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하는데 보리는 짐짓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척 한다.
담당 의사의 처방 역시 역설적이다. 남동생은 조금의 소리를 얻을 수 있는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몇 가지를 버려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 사항이 열거되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축구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리가 청력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부모의 반응은 덤덤하다. 그들에게는 보리가 가족의 일원으로 사랑의 대상일 뿐이지, 소리를 얻거나 잃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보리를 대한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몇 가지 에피소드는 상징적 은유를 드러낸다. 엄마와 남동생과 함께 보리는 외할아버지 댁을 방문한다. 그 자리에서 보리는 외할아버지는 왜 수어를 배우지 않았느냐고 묻지만, 외할아버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지나쳐 버린다. 가족의 연대감과 사랑으로 눈빛과 표정만 읽으면 된다는 뜻이다. 엄마와 함께 옷가게에 들려 아버지의 옷을 구입하는 에피소드이다. 가게 아가씨는 보리도 농인인 줄 알고 짜증과 핀잔으로 그들을 대한다. 엄마가 셈이 잘못 되었다며 돈을 도로 갖다 주라고 하자, 보리는 가게 언니에게 “이거 엄마가 도로 갖다 달라고 해요”라는 말을 하며 조금 전의 무례한 행동을 힐난한다. 보리의 단짝 친구인 은정이는 보리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농인 행세를 할 작정이냐고 걱정을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다른 장애인 영화와 차별성을 보이는 독창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보리가 소리를 잃은 척 행세하는 사실을 가족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이 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보리가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혹은 보리의 그런 행동을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체 한 것도 아닐 것이다. 보리가 소리를 하건 하지 않건 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보리가 소리를 듣고 말을 해도, 아니면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을 못 해도 보리는 여전히 그들의 사랑스러운 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농인 장애인은 조금 불편할 뿐이지 그들 나름대로의 의사소통을 구사하고 있다. 그들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할 뿐이지 우리와 똑 같은 인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의 세계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돕는 길은 우리 역시 수어를 익혀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보리처럼 그들의 세계를 부러워하거나 거리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들과 함께 자유롭게 소통해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과 소통이 되지 못하는 우리가 오히려 소외감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말은 곧 그 사람이기 때문에 말을 통해 서로의 진심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사람과 풍경이 서로 스며들다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강원도 주문진이다. 보리가 살고 있는 집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다. 무청 같은 바다가 잠자듯 누워 있어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까지 파랗게 물이 든다. 집 앞 마당의 빨랫줄에 걸려 있는 옷들까지도 파랗게 물이 든다. 바다는 마치 보리네 가족의 맑고 투명한 풍경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고 어루만진다. 그래서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에 보리가 중얼거리며 소원을 비는 곳도 바다이고, 소리를 잃기 위해 뛰어드는 곳 역시 바다이다.
보리가 아침마다 학교에 가기 위해 내닫는 느릿느릿 뻗어 있는 고샅길도 그 속에 사는 사람들처럼 정겹다. 그 골목길 구멍가게 평상 위에 앉아 있는 동네 아주머니 역시 바다와 골목길을 닮아 너그럽고 품이 넓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보리를 마주할 때마다 혀를 끌끌 차며 안쓰러운 눈길을 던진다. 보리가 등교할 때마다 들려 소원을 비는 마을 당집도 정겹고, 보리에게 악귀를 물리치는 부적을 파는 외국인도 풍경을 닮아 삿됨이 없다. 짜장면을 배달하는 은정이 아버지가 모는 오토바이 소리마저 낯익은 풍경처럼 다가온다.
이 영화는 농인 가족을 서사의 중심에 두고 있어 대사를 절제하고 있다. 수어로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자막도 완결된 문장이 아니라 음절로 보여주고 있다. 보리의 부모를 연기하는 배우들도 표정에 삿됨이 없고 웃음마저도 순진무구 그 자체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연기는 작위성이 없이 일상의 풍경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자연스럽다. 농인에 대한 핀잔과 짜증을 부리는 옷가게 아가씨들의 철없는 모습까지도 결코 미워할 수 없을 만큼 너그럽게 비쳐온다.
풍경 그 자체가 하나의 인물이다. 사람이 풍경을 닮듯이 풍경 역시 사람을 닮아 침묵으로 연기를 한다. 삭막하고 건조한 도시처럼 풍경과 사람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풍경이 되어 버린다. 풍경 또한 사람들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어느새 그들의 마음을 닮아 버린다.
에드워드 랠프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무장소성에 빠져 있다고 한다. 그들은 좋아하는 장소도 없고, 마치 둥둥 떠다니는 좀비처럼 도시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장소와 인물이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인물과 장소가 서로 스며들어 하나의 감정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인물들은 장소의 따뜻하고 맑은 기운을 얻어 하나같이 순박하고, 장소 또한 인물들의 정서의 온기에 힘입어 하나의 인물처럼 살아 숨쉬고 있다.
사람의 숨결이 배인 동네의 고샅길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누구도 거기를 걷고 있으면 착해지지 않을 수 없고, 보리와 엄마가 빨래를 널고 있는 풍경을 마주할 때면 가족의 연대와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이 영화는 풍경이 단순하게 하나의 배경에만 머물지 않고 전면에 나서서 하나의 인물처럼 연기하고 있다. 풍경이 주는 온기가 인물들의 내면적 감정과 정서를 은유하고 있다.
이 영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데워 주는 이유는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있다는 점, 풍경이 인물들의 내면적 정서를 은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작위적이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와 기존의 가족 서사를 뛰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후기 산업사회 속의 가족은 이미 붕괴되어 버렸다. 가족 구성원 간의 끈끈한 연대와 사랑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다. 그래도 희망은 남아 있다. 같은 핏줄이라는 원형질적인 인자는 아직 남아 있다. 김진유 감독의 <나는보리>가 가족의 복원에 대한 기미를 포착하여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삭막한 인간관계 속에서도 가족만큼 가까운 존재는 아직 없기 때문이다.
(계간 『문장』, 2020년 여름호)
첫댓글 <풍경이 단순하게 하나의 배경에만 머물지 않고
전면에 나서서 하나의 인물처럼 연기>
감독이 장소 물색을 성공적으로 했고
인물 기용도 신경쓴 흔적이 보이네요.
계산이 틀린 이는 비장애인이고
그 돈을 바르게 계산해 돌려주는 이는 장애인.
여기에 우리의 고정관념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가 녹아 있습니다.
누가 정상인가 하는 물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의 건강은 병이다. 라고 한 엘리엇의 싯구절 같은 역설의 영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