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참화(慘禍)를 다시 생각함 |
홍종찬 목사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를 기해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勃發)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되기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된 전쟁으로, 남 · 북한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 넘나들며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전 국토의 80%를 전장(戰場)으로 삼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적(人的), 물적(物的), 심적(心的)인 상흔(傷痕)을 남겼습니다.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가 양측에서 수립되었지만 한반도 공산화를 꿈꾸던 김일성북한정권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한 남한정부를 하루빨리 제거하고 공산주의국가로 통일하고자 이념을 앞세워 민족 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 준비과정에서 김일성 등 북한지도부는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과 협의하면서 장비와 인력지원은 물론 전쟁개시 동의까지 받아냈습니다. 남침을 획책한 김일성은 겉으로 평화통일을 위장 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6.25전쟁 18일 전에 “남북이 통일 선거를 하자”는 제의를 했습니다. 15일 전에는“조만식 선생과 김상용, 이주하를 서로 교환하자”는 제의를 했으며, 6일 전에는 “남북의 국회를 통합하자”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겉으로는 이러한 평화전술을 쓰면서, 안으로는 이미 49년 3월 소련으로부터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 등 수많은 지원을 받아 보병 10개 사단 20만 명, 대포 2800여문, 탱크 242대와 기타 항공기와 함정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6.25전쟁 2년 전인 1948년부터 “소련군은 북에서 다 철수했으니 남한에서도 미군을 철수하라”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렇잖아도 한국이 전략적으로 그리 중요하지지 않다고 생각했던 미국은 드디어 49년 6월에 미군사 고문단만을 남겨놓고 철수하게 됩니다. 이것을 확인한 그들은 50년 6.25 주일 새벽 4시를 기해 기습남침을 감행하게 되는데, 그 모든 사실을 은폐하고 뒤늦게 평양방송을 통해 “남쪽의 국방군이 북침하여 반격한다”는 거짓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북한군의 남침은 순식간에 조국강토를 피로 물들였고,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한 한국군은 각 지구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최초 전황(戰況)을 보고 받고, 곧 긴급명령을 하달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했지만 탱크를 앞세워 몰려오는 저들을 막아내는 데는 무리였습니다. 한국정부는 주한 미국대사 무초를 통해 시급히 필요한 탄약을 지원해 주도록 요청하고, 주미대사 장면을 통해서는 유엔에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북한군은 속전속결로 남한을 공산통일 한다는 전쟁목표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신속히 결정된 유엔군의 참전으로 저들은 상대적인 전력 우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자 북한은 남한 점령지에 인민위원회를 두어 소위 ‘민주개혁’을 강제하고 주민들을 전시 동원 체제 하에 편입시키게 됩니다. 낙동강 방어선에 성공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契機)로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9월말, 전쟁발발 97일 만에 드디어 전쟁 전 상태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기 직전, 맥아더 장군은 본국으로부터 “이승만 정권을 회복하려는 당신의 계획은 고위층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전문 한 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국경선 부근에서는 한국군만을 운용해야 한다는 제한 사항마저 무시하고 모든 부대로 하여금 압록강으로 진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유엔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함경북도 혜산진까지 단숨에 올라가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공군이 대거 개입함으로서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 번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은 3차에 걸쳐 지속되는 전쟁에서 한계점이 노출되기 시작했고, 미국 역시 중공군에 밀리는 상황이 지속되자 정전 압박으로 다른 해결책을 강구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 말부터 정전을 검토했던 유엔군과 “조·중연합군”은 1951년 6월, 한반도 문제를 더 이상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하고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최소 6주 정도면 타결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했으며 매 의제마다 장기간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1953년 1월, 미국의 아이젠하워 신임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확전주장을 일축하고 중공군에 정치·군사적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휴전에 임하도록 압박했습니다. 그 즈음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이 발표되면서 휴전회담은 급진전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심각한 정치적 대립을 겪었고 3차에 걸쳐 “이승만 제거계획”이라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었지만, 휴전협정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경제원조, 그리고 한국군 증강 등의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휴전회담은 전쟁이 발발된 지 3년 1개월 만에, 회담이 개시된 지 24개월 17일 만에 마침내 북한군, 중공군 그리고 유엔군의 미군 대표가 각각 휴전협정을 서명하면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6.25 전쟁에서 우리민족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처참하고 가장 큰 피해를 당했습니다. 1차적으로 군사작전에 의한 인적, 물적 피해와 2차적으로 이념투쟁에 의한 반목과 질시가 중첩되었습니다. 먼저 인명피해는, 한국군(경찰 포함) 63만 명, 유엔군 15만 명을 포함 78만 명이 전사·전상·실종되었고, 북한군 80만 명, 중공군 123만 명을 포함하여 약 203만 명으로 군인 피해만 총 281만 명입니다. 그리고 1952년 3월 15일까지 발생된 전재민(戰災民)의 수가 천만 명을 넘어섰으며, 휴전 때까지 이 숫자는 훨씬 늘어나 결과적으로 전체인구의 1/2 이상이 전화(戰火)를 입었고, 아직도 이산가족 등 많은 사람들이 6.25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고통 받고 있습니다. 물적 피해는 부산교두보를 제외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37도선과 38도선 사이의 지역에서는 세 차례의 피탈과 탈환이 반복되었습니다. 남한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2%가 파괴되었고, 북한은 1949년 대비 공업의 60%가 파괴되었습니다. 개인의 가옥과 재산이 피해를 입었고, 군사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도로, 철도, 교량, 항만 및 산업시설이 크게 파손되었으며, 군사시설로 전용된 학교 및 공공시설도 파괴되어 국민생활의 터전과 사회·경제체제의 기반이 완전히 황폐화(荒廢化) 되었습니다. (국가기록원 - 6.25 전쟁 등에서 발췌 정리) 6.25 전쟁의 참화(慘禍) 위에 다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꼭 지켜주세요)
창골산 원고보내주실곳 cgsbong@hanmail.net
글을 읽으신후 댓글은 사랑의 표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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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 아 잊으려 어찌우리 그날을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