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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渤海)의 흥망성쇄(698년~926년)
한민족의 고대 왕국.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후 고구려인과 말갈인 등 고구려 유민들이 지금의 중국 지린성 일대에 세운 나라이다. 한반도 북부와 현 중국의 만주 및 현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을 장악해 통치했다. 건국자는 대조영.
왕을 '가독부(可毒夫)라고 칭했는데 이는 발해 말의 음차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황상'이라는 표현(정혜공주 묘비)과 '황후' 묘비로 보아, 외왕내제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실제 상경성 제2궁전지는 당나라 황궁인 함원전보다 더 컸다고 한다. 다만 상경궁 유적지는 중국 정부에서 비공개로 작업하고 있으며 사진도 공개되지 않아 더 연구하고 공개해야 될 부분이 많긴 하다. 지금은 중국 사회 과학원 고고 연구소가 발행하는 잡지에 실린 짤막한 발해 비문 정도를 통해 일부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2. 건국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의 땅을 평양 땅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지배하려 했다. 나당전쟁으로 옛 고구려 남부는 신라에 편입됐고 안동 도호부는 요동으로 옮겨갔지만, 요동 지방의 고구려 유민들은 멸망 이후에도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 땅 안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걸걸중상(대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이진충의 난이라고 한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걸걸중상(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영주에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위한 만든 영주성방 고구려라는 군사 조직의 지원과 함께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오며 요동에의 고구려의 유민까지 규합해서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도중 걸걸중상이 죽으면서 그가 이끌던 무리를 대조영이 인수받았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진국(震國 또는 振國)을 세웠다. 이진충의 난이 발해의 건국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건 사실적이지만 국제 정세와 역사적인 흐름 그리고 고구려의 부흥 운동을 봤을 때 언제든지 발해 건국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요인은 있었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 사실이 되고, 요서 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고, 영주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형식상 관직을 수여했고 돌궐과 일본, 신라 등도 이후 발해를 자주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3. 국호
국호는 진(震). 발해라는 의견이 있는데 발해란 명칭은 당이 진에게 내린 이름으로, 원래 이름은 진이 맞다. 진이라는 국호는 《신당서》의 내용에 의거해 측천무후가 대중상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회유하기 위해 각각 내린 진국공(震國公)과 허국공(許國公)이라는 작위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대조영 세력이 먼저 자칭한 이후 당이 나중에 이걸 인정한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그 후 당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게 되어 이 발해를 이후에도 국명으로 사용하게 된다. 즉 발해는 중국이 지어준 이름인데 이런 사례가 따로 없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조선 왕조 이름을 정할 때 명나라에게 화령과 조선 중에 골라달라고 했던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발해라는 명칭의 유래는 지금도 발해(渤海)라고 부르는 바다 보하이 해를 말한다. 참고로 조공 - 책봉 체제에서 국제사회에서 발해 국왕으로 승격한 것은 762년의 일이다. 그 전에는 대조영이 진국 대공, 발해 군왕, 신라 대아찬 등 당대 주변 국가들로부터 여러 가지의 관작을 받게 되는데, 모두 한 나라의 국왕보다는 격이 낮은 관작들이다.
확실히 발해인들은 자신들이 한민족인 고구려 사람이라는 자각이 있었으며 발해라는 이름만큼 고려라는 이름도 많이 썼다. 지배층이 옛 고구려의 잔존 세력이며 처음에 진국을 국명으로 표방한 것이며, 일본국에 발해 국왕이 스스로를 고려 국왕으로 칭한 것을 근거로 발해국이 고구려인의 귀족들과 다종의 말갈을 평민 계층으로 둔 후고구려의 성격을 갖는다고 보기도 한다. 이 떡밥이 해소되려면 중국 측에 있는 상경 유물들이 공개되어야 하는데, 중국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폐쇄적인 발굴 작업을 하는 이상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발해는 고구려 기피증에 걸린 당나라와 불편해지지 않지 위해 대 중국 외교용 국호이고 실제 내부 국호는 고려라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당나라만 발해라 부른 것도 아니고 고려의 용례에 비해 발해의 용례가 너무 많다.
4. 역사
발해의 건국자는 대조영이다. 대조영은 《삼국유사》에 고구려의 구장(舊將)이라고 나와 있다. 덕분에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연개소문의 노비 -> 고구려의 청년 장수 -> 자객단의 수장 -> 거란국의 객장 -> 발해의 건국 왕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사망 연도(719년)를 볼 때 고구려 멸망(668년) 후에 태어났거나 당시에 어리거나 20대의 젊은 나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조영의 아버지는 걸사비우와 더불어 반 당 항쟁을 주도한 대중상(걸걸중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를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4.1. 건국
당나라는 평양성을 함락시킨 이후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을 통치하였으며, 고구려의 유민 수십 만을 영주(營州)로 이주시켰다. 다만 호민이라고 칭했던 유력자들은 장안이나 서북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이정기는 이쪽에 포함되는 인물이다. 영주는 일종의 기미주로 이민족 집합소와도 같은 곳이었다. 영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과 말갈 사람들은 각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지도자로 하여 영주를 탈출, 고구려의 고토를 향해 이동했다. 그러자, 보통 당나라라고 하지만 사실은 주나라였던 중국의 신성측천황제가 군대를 일으켜 이를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걸걸중상은 먼저 사망하는데, 걸사비우가 당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도중에 대패하고 전사하면서 대조영이 고구려 - 말갈 연합 세력의 지휘권을 쥐게 된다. 이후 대조영 집단은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가 지휘하는 당군을 격파하고, 동모산(東牟山) 지역에 이르러 마침내 나라를 세운다. 자세한 건 천문령 전투 참고
나라 이름은 처음에는 진국(震國)이라고 했지만 713년 당이 대조영을 발해 군왕으로 책봉한 이래 발해라는 이름이 동아시아 세계에 통용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발해라는 명칭에 대해 발해만에 대한 진출 의지가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스스로는 고려(高麗)라고 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수록된 문왕의 국서에서 자신을 고려 왕으로 칭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주몽이 세운 나라가 끝까지 고구려라고 칭했고, 고려는 왕건이 나라를 세우면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고구려 스스로가 장수왕 즈음부터 정식으로 고려를 칭했다는 설이 상당히 인정 받고 있다. 그 때부터 중국 측 기록에 '고구려'가 사라지고 '고려'로만 기재되기 시작했고, 장수왕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중원고구려비에도 국호가 분명히 '고려'로 기재돼 있다. 당장 궁예가 나라를 처음 세웠을 때 이름을 흔히 '후고구려'라 하지만 실제로는 '고려'라고 했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한 것은 사실 원상 복구인 셈이었다. 아무튼 '고려'는 왕건이 왕이 될 때 느닷없이 처음 등장한 이름이 아니다. 왕건의 나라를 고려, 궁예의 나라를 후고구려, 고주몽이 세운 나라를 고구려라고 구분해서 부르는 관습은 고려 시대 중에 확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4.2. 영토 확장
1대 고왕은 최초 근거지의 주변 지역을 장악해 나갔는데,구체적인 세력 범위는 알 수는 없으나 일단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과 북만주에 대한 영토는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건국 초기 신라는 대조영에게 겨우 대아찬 관등을 수여하며 우호 관계를 다지기도 했다. 이 내용은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 북국 = 발해에게 윗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는 표문)'에만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대아찬이라는 직위도 재미있는 것이, 6두품의 승진 상한이 6관등 아찬을 넘어서는 진골의 품계라는 점이다. 고구려 부흥 운동 시의 고구려 왕족에게 진골의 골품을 준 것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하지만 발해가 문왕 때부터 고구려의 후계 국가임을 자처하면서 신라와 관계가 악화된 것으로 파악되며, 특히 721년에 신라가 강릉 방면에 장성을 쌓은 일은 발해를 경계한 행동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2대 무왕(대무예) 때는 흑수 말갈의 귀속 문제를 두고 당과 갈등이 심화되고 이로 인해 발해 국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온건론자인 발해왕의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긴장이 고조되다가 결국 당나라를 침공하는 데 이른다. 무왕은 산동의 제1 교역항 등주(登州)에 장문휴(張文休) 제독을 보내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단 1회성 습격이기 때문에 곧바로 회군했다. 또 무왕은 해(奚)족과 연합해 요서 일대를 공격하여 마도산 전투에서 이겼으나 당군의 방비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회군했다.
이에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연합으로 발해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이 때 신라군은 겨울에 북정(北征)을 감행한 탓에 교전은 하지 못하고 퇴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애초에 발해는 신라 방면으로 본격적으로 확장 의지를 보인적이 없기 때문에, 이전까지 당나라와 대립하다 발해의 등장으로 겨우 화해한 신라 입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공격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한편 신라도 발해에 그다지 공격할 마음이 없었다고 보인다. 발해와 급격히 화해하고 교류하게 된것이 그 이유다. 이렇게 당나라와 접전을 벌이는 한편으로 이 시기부터 발해의 당나라식의 주부현제 등 명칭에 대한 수입이 본격화되었고 발해 내에 지방 지역의 통치도 일원적인 주부현제로 편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4.3. 혼란과 극복
3대 문왕(대흠무) 사후 약 30년 간 4대 국왕인 폐왕부터 9대 국왕인 간왕까지 왕이 6번 바뀌는 혼란기가 지속되다가 10대 국왕인 선왕(대인수)이 즉위함에 따라 혼란기가 진정되었다. 선왕 자체가 고왕 대조영의 직계가 아니라, 그 동생 대야발의 후손이다. 발해 왕위 계승이 얼마나 복잡하고 치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어째 고구려의 초기(차대왕 ~ 신대왕)와 쇠퇴기(안원왕 ~ 양원왕)가 생각난다.
4.4. 전성기 (해동성국)
선왕은 정복과 내치에 힘썼으며, 당나라와 화친을 맺어 그의 치세동안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다. 이 시기에 흑수 말갈이 비로소 발해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으며, 학자에 따라서는 요동 지방을 지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이때 신라와 국격을 둔 논쟁이 벌어졌는데 빈공과 합격자 순위(등제서열 사건), 사신의 대우(쟁장사건)에 있어 발해와 신라간 경쟁이 일어났다. 밑에 나오는 최치원의 글도 그런 문제로 나온 것이다.
발해의 주요 교역로
우리가 흔히 발해의 지방 제도에 대해 배울 때 보게 되는 5경 15부 62주의 행정 체제도 선왕 때 완성된다. 그러나 행정 제도의 완비가 고구려, 말갈인들의 완전한 융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갈인들은 심지어 841년 일본에 파견된 사신에도 말갈 추장으로 추정되는 대수령 65인이 따로 동행할 정도로 독립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둘은 발해 멸망까지 끝내 융합하지 못했다. 이 대수령을 편입과 이탈을 반복하며 발해 멸망 후 여진족으로 재편성된 흑수 말갈로 이해한다면 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도 있다. 실질적인 행정 구역을 의미하는 주현의 정확한 규모는 전해지지 않으나 일부 남아있는 이름으로 추정해 보건대 62주 아래에 약 200개 ~ 250여개 현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5. 쇠퇴
그러나 840년대부터 국력이 다시금 쇠퇴하기 시작해서, 위구르를 멸망시킨 키르기즈족보다 그 대접 수위가 아래로 내려간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위구르가 발해보다 국제적 위상이 높았는데, 그 위구르를 멸망시킨 키르기즈는... 어차피 키르기즈도 얼마 못 가 거란한테 망하여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10세기의 1/4을 간신히 넘기고 발해는 망한다.
4.6. 멸망
발해는 9세기 들어 당(황소의 대반란, 874년 ~ 884년)과 신라(후삼국 분열)의 몰락 분위기에서도 큰 쇠퇴 징후를 보이지 않지만 15대 왕(인선)을 끝으로 갑작스럽게 파탄난다. 단 15일만에 요(遼)나라 요 태조 2번째 황자 야율요골(耶律堯骨)이 이끄는 기병대에 상경(上京)이 함락된 것. 다음은 《요사》의 발해 멸망 관련 부분이다.
天顯元年春正月己未, 白氣貫日。
12월 을해일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이른바 두 일 중에 하나는 마쳤지만, 발해와 대대로 원수 진 것만은 설욕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안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병력을 일으켜서 발해를 대대적으로 친정했다. 황후, 황태자, 대원수 야율요골이 모두 따랐다.
- 윤월 임진일에 목엽산(木葉山)에서 제사를 올렸다.
- 임인일에 오산(烏山)에서 푸른 소와 흰 말을 잡아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
- 기유일에 살갈산(撒葛山)에 머물렀는데 귀전(鬼箭)을 쏘았다.
- 정사일에 상령(商嶺)에 머물렀는데 부여부를 포위했다.
- 천현(天顯) 원년(926년) 봄 정월 기미일에 흰 기운이 해를 꿰뚫었다.
- 경신일에 부여성을 손에 넣고 그곳의 수비하던 장수를 죽였다.
- 병인일에 석은(惕隱) 안단(安端), 전북부(前北府) 재상 소아고지(蕭阿古只) 등에게 명령을 내려서 1만 기를 선봉으로 삼았는데, 대인선 측 늙은 재상[老相]의 병력을 만나서 깨뜨렸다. 황태자, 대원수 야율요골(耶律堯骨), 남부(南府) 재상 야율소(耶律蕭), 북원(北院) 이리근(夷離蓳) 야율사녈적(耶律斜涅赤), 남원(南院) 이리근(夷離蓳) 야율질리(耶律迭裏)가 그날 밤에 홀한성을 포위했다.
- 기사일에 인선이 항복을 청했다.
- 경오일에 홀한성(忽汗城) 남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 신미일에 대인선(大諲譔)이 흰 옷을 입은 채 새끼줄로 몸을 묶고 흰 양을 끌며 관리 300여 명을 데리고 나와서 항복했다. 황제는 두터운 예로 대하고 그들을 풀어줬다.
- 갑술일에 발해의 군현에 조유를 내렸다.
- 병자일에 근시(近侍) 강말달(康末怛) 등 13명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서 무기들을 수색하도록 했는데, 수비병에게 해를 입었다.
- 정축일에 대인선이 다시 모반해서 그 성을 공격해서 깨뜨렸다. 성 안에 행차했다. 대인선이 말 앞에서 죄를 청했다. 명령을 내려서 경비병들로 하여금 대인선 및 그 족속이 나가도록 했다. 제사를 올려서 천지에 알렸다. 다시 군중으로 돌아왔다.
- 2월 경인일에 안변(安邊), 막힐(鄚頡), 남해(南海), 정리(定理) 등의 부 및 여러 도의 절도사, 자사들이 내조하자,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 보냈다. 얻은 재물을 장병들에게 내렸다.
- 임진일에 푸른 소와 흰 말을 잡아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 대사령을 내리고, 천현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사신을 보내 발해 평정한 일을 당에 알렸다.
- 갑오일에 홀한성에 행차해서 창고의 물건을 검열하고 따른 신하들에게 차등을 두어 내렸다. 해(奚)의 부장 발로은(勃魯恩), 왕욱(王郁) 및 회홀(回鶻), 신라, 토번(吐蕃), 항(項), 실위(室韋), 사타(沙陀), 오고(烏古) 등이 정벌에 따라서 공이 있었기에, 후한 상을 내렸다.
- 병오일에 발해국을 동단(東丹)으로, 홀한성을 천복(天福)으로 개칭했다.
『遼史』卷2「本紀」第二 ‘太祖’下
"병인일… 포위했다" "기사일… 항복"에 주목. 0병인, 1정묘, 2무진, 3기사, 딱 사흘 걸렸다.
발해의 허망한 멸망은 한국 고대 사학계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힌다. 발해에 대한 기록 자체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에 강성했던 발해가 그리도 허망하게 망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그 큰 나라가 단지 보름만에 멸망한 것을 두고 불가사의라 여겼는데, 일단 중앙 귀족층의 분열과 요의 기동성을 이용한 수도 공격을 이유로 삼았으나 사료 부족 등의 문제와 겹쳐 명확한 규명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멸망하기 수 년 전에도 빼앗겼던 요동 지방을 되찾는 등의 모습으로 보아 귀족층의 분열보다는 갑작스러운 수도 공격에 멸망했다는 이론에 더 무게가 실리는 편이다.
국가 존속 기간이 228년으로, 한국사의 주요 국가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존속 기간이 짧은 편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왕조 평균 존속 기간이 대체로 긴 편이었던 한국사의 왕조치고는 짧은 것.
5. 멸망 원인
5.1. 백두산 분화설
이 설은 일본에서 화산학자들이 일본의 지층을 조사하다가 백두산의 화산재를 발견하면서 이에 대해 연구하면서 제기된 학설이었으며, 1990년대 말 ~ 2000년대 쯤 KBS에서 이에 대해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면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되기도 하였기에 인지도가 있던 학설이었다. 한때 학계에서는 몰라도 고대사에 관심 있는 일반인 수준에서는 꽤나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가설이다. 발해의 멸망 시기와 백두산의 대폭발 시기가 맞물린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힘을 얻기 시작했다. 실제로 발해의 5경이 모두 백두산에 인접해 있어 백두산 폭발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과 당시의 백두산 대폭발은 비공식적으로 역사 시대 이래 최대의 화산 폭발로 추정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분출된 화산재는 한반도 전역을 1m의 두께로 덮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고 한다. (출처 :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소원주)) 백두산 서부에서 대규모의 화산 쇄설류가 이동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의 땅을 통치하지 않고 폐현시킨 것도 파괴의 정도가 심각하여 땅을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아서 이 학설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해 사실상 기각되었다. 가장 큰 반론은 동아시아 3국 어디의 사서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거란의 역사서인 <요서>는 정복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이기 때문에 은폐했을 확률이 높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정도 규모의 화산 폭발이 발해 이민을 받아 준 고려의 역사서인 고려사에 전혀 기록이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한편 밑에 서술된 것처럼 대부분의 화산재가 동해와 일본으로 날아가 거의 영향이 없었을 수도 있다.)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 전에 일어났더라도 실제로는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연구에 의하면 백두산 대폭발은 겨울에 발생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겨울에는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화산재 대부분이 동해와 일본으로 날아갔고 상경 용천부 또한 백두산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를 입기에는 거리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최근 백두산의 화산재와 기록이 존재하는 일본 고대 화산의 화산재와 시간대 비교를 통한 연구에 의하면 발해 멸망이 926년 1월에 발생했는데 백두산 분화는 969년(± 20년)에 일어났다고 추정되어 이 학설은 더욱 힘을 잃었다.
물론 매우 젊은 암석의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은, 그 정확도에 대해 아직 논쟁 중인 부분이 많아서, 아직 정확한 연대 측정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었으며, 그 근거로는 고정밀 연대 측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Ar-Ar 연대 측정법도 최근에 일어난 지질학적 시간을 기록하는 데 신뢰도가 비교적 낮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U-Th-Ra 비평형, Cl, He, Be 등의 노출 연대도 젊은 암석에 사용되지만, 각자 암석의 환경에 따라 문제점이 존재한다. 젊은 암석의 연대 측정은 오늘날 지질학의 연대 측정법의 화두 중 하나이다.
다만, 많은 정밀 연대가 926년 이후의 연대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의 멸망과 관련이 없을 것 같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말의 의심조차 잠재우는 최근 연구가 공개되었는데, 무려 오차를 3개월로 줄여버린 것이다. 이번 연구에서 공개한 추정 연대는 946년 말. 고로 발해 멸망 이후 20년 뒤에 화산 분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이 분화로 인해 화산호(천지)가 형성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어쨌거나 발해 멸망 후 백두산 근방의 발해 잔여 세력들이 부흥 운동을 열심히 펼쳤다는 점에서도 발해 지배층의 장악력이 결정적으로 와해된 것이 아님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보다 약 20년 뒤라고 하지만 폭발 전 작은 지진이나 자연 재해, 이변들로 민심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발해의 왕위 계승도 혼란했고, 말갈과의 갈등도 추측되는 상황에서 발해의 중심지인 목단강, 두만강 유역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백두산과 그 인근의 징조들은 설상가상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는 딱히 근거가 없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들, 그러니까 발해 부흥 운동, 거란의 만주 통치 장악력 미흡, 여진족의 침체기 등에는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추론하는 것은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몇 차례의 부흥 운동이 모두 실패하면서 그 뒤로 동만주에서 새 나라가 일어나기까지는 200여 년의 시간이 걸린 것도 화산 폭발과 관련 있지 않나 하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도 강제 이주에 의한 것이든 자연 재해를 피한 것이든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다.
5.2. 지배층의 내분설
발해 왕들의 기록이 안습하기 때문에 추정에 그칠 따름이지만 왕가를 포함한 귀족층의 내분도 멸망 원인으로 충분히 생각해볼 만하다. 발해 이전에 거의 나라가 망한다기보다는 세계 멸망을 맞이한 듯한 세기 말적인 분위기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나라 공격 한참 전부터 고위층을 비롯한 망명 행렬이 이어지고 있음이 나타나는데, 이를 요동 전역이 장기간 유지된 후유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5.3. 수도 급습설
가장 유력한 설 중 하나로 제1 방어선으로서 발해의 전력이 집중된 요동 전선을 우회하고 발해 중심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부여부를 급습, 그곳을 함락시킨 다음 발해의 정규군이 전력을 정비하기 전에 상경 용천부로 진격하는 속전 속결 방식으로 그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며 개전부터 대인선의 항복까지 소요된 기간을 발해 멸망 기간과 비교해 보면 제일 그럴 듯한 이론이다.
고대의 동아시아의 전쟁은 국경에서 곧바로 수도까지 진격하는 형태로 벌어졌기 때문에 방어 측의 병력 집결이 늦으면 그대로 끝나는 일이 왕왕 있었다. 고대의 왕정 중앙 집권제 국가에서는 수도에 권력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각지에서 걷은 재화가 모이면서 경제력이 집중되었다. 그러한 경제력과 왕의 권위를 바탕으로 병사들을 동원하고 월급을 주던 수도가 털려버리면 군대 입장에서는 더 이상 왕실을 위해 싸울 명분도, 실리도 없어져 버리므로, 그때까지 집결하지 못해서 승산을 확보하지 못한 잔존 병력들은 설령 총 규모가 공격군과 대등, 혹은 그 이상일지라도 단숨에 공중 분해되거나 심각한 사기 저하, 탈영 등으로 와해되어 조직적 저항을 할 수 없게 된다.
고구려나 백제 멸망 때의 나당 연합군도 수도인 사비, 평양으로 어택땅 하는 경향을 보인다. 거란은 이 전술을 고려와의 전쟁 때도 써먹는다. 고대 뿐 아니라 현대전에서도 행정, 군정의 수뇌부는 주로 수도에 위치해 있고 이곳이 급습당해 기능을 상실하거나 적에게 잡혀버리면 국가, 전쟁 운영에 매우 치명적이다. 즉,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란때 수도를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정부가 통째로 퇴각해버리는건 매우 유효한 전략이다. 유독 우리나라 대중들에겐 임진왜란 때, 선조의 도주 행위는 그 행위 자체가 심하게 폄하되고 수도에서 죽을때까지 싸웠어야 한다는 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런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 단 이러한 전략은 중앙 정부에게 이른 시간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대신 대다수 귀족층이나 지방 세력이 그대로 남아 점령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부흥 운동 또한 자주 벌어지게 되는 문제점이 있는데, 실제로 발해의 유민들은 멸망 후 200년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 동안 이른바 발해부흥운동을 펼쳐 나갔다. 패망 후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고구려와 백제도 이와 비슷하다.
5.4. 말갈과의 대립설
발해가 고구려 유민 + 말갈 + 기타 민족들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나온 설.
발해 말기 이들이 들고 일어나 안그래도 혼란한 발해 내부의 혼란을 가중시켜 최종적으로 발해 멸망에 지대한 기여(?)했다는 설이다. 말갈이 끝내 발해에 융합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설. 다만 이 말갈을 국가 내의 하부층으로 인식해서 내부 분열로 보느냐, 아니면 사실상 소화 불량에 걸려서 자력으로 이탈한 흑수 말갈로 이해해서 배후의 위협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국가 구성 자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926년 이후 동아시아 정세
6.1. 발해 멸망에 대한 고려의 반응
고려는 거란 침입에 따른 발해의 구원 요청을 무시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발해와 고려가 적대적 관계를 맺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신라 때부터 발해와는 전쟁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고 좋은 관계에 있었다.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은 견훤에게 밀리고 간신히 휴전 조약을 맺은 상황이었므로 발해에 군사를 파견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고려는 발해 멸망 이후 많은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이는 고려가 공산 전투에서 입은 엄청난 손해를 메울 수 있었다. 그리고 934년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바 있다. 실제 대광현은 왕씨 성을 하사받아 고려 최상위 귀족 계층으로 편입되었으며, 발해 왕가 후손인 대도수도 거란과의 전쟁에서 활약한다.
한편 고려에서는 스스로를 고구려를 이었다고 하여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를 원수처럼 보았다. 실제 고려 태조 왕건은 그 나라를 '본래 우리와 친척인 나라[本吾親戚之國]'라고 표현할 정도로 발해를 친근하게 여겼다. 발해에 대한 동족 관념에서 비롯된 왕건의 반 거란주의는 거란의 사신이 가져온 낙타들을 다리 밑에 묶어 전부 아사시키고, 사신들은 전부 유배보낸 것(만부교 사건)으로 극명히 표출되었다.
이러한 고려의 대 거란 적대 정책은 발해에 대한 친근감이라든가, 자국에 투화한 발해 유민들을 국가 체제에 통합하기 위한 실리적인 목적 외에, 지배 계급의 화이론적 세계관이 적지 않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은 거란과 같은 북방 민족인 여진족을 인면수심이라며 경멸한 바 있고, 훈요 10조의 거란에 대한 경계를 당부한 부분에도 발해를 멸망시킨 사실에 대한 언급 없이 '짐승의 나라[禽獸之國]'라는 원색적인 비난의 표현만 나타난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발해 멸망 이후, 발해 부흥 운동에 대해서 고려 내부에서는 도와주자는 의견과 무시하자는 의견이 서로 대립하는 등 통일되지 않은 성향을 보인다. 고구려의 정통성 승계 문제에 현실적 국제 역학 질서, 막 통일된지 얼마 안되는 고려의 내부 통제 문제 등의 여러 문제가 얽히기 때문이다.
발해는 북방의 이민족인 거란에게 멸망하였고, 발해 스스로가 편찬한 역사서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記)》 등에 언급된 것을 제하면 한반도 국가의 관찬, 사찬 사서의 서술 범위 밖에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조명되다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9년 ~ 1807년)의 《발해고(渤海考)》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한국사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7. 발해부흥운동
발해 멸망 후 발해 부흥 운동을 일으킨 지역이 몇군데 있었지만 얼마 안 가 대부분 진압당했다. 한편으로 이 점은 요가 중앙부터 공격해 발해를 무너뜨렸다는 근거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이후로도 200년간 부흥 운동이 벌어진다는데 의의가 있다. 항목 참조.
8.1. 정치와 행정, 군사
발해는 관제를 편성할 때 당나라의 3성 6부 제도를 모방하였으나, 그 명칭을 바꾸어 그들만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각 관부의 기능은 실제로 당나라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우선 3성으로는 정당성(政堂省), 선조성, 중대성이 있다. 정당성은 당의 상서성에 해당하는 곳으로 발해의 모든 정령(政令)을 집행하는 최고의 행정 서무 기구였다. 3성이 형식상 분립되어 있지만, 정당성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3성은 기능상 평등하게 분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성의 수장인 대내상(大內相)을 중심으로 당의 상서령에 해당하는 선조성 수장인 좌상(左相)과 중대성 수장인 우상(右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좌우평장사와 좌우사정사가 있고, 좌사정과 우사정이 그다음에 있었다. 그 밑에 좌사정은 충부 / 인부 / 의부를 거느리고, 우사정은 지부 / 예부 / 신부를 거느리는 업무 분담이 이루어졌다. 발해 6부의 명칭은 충, 인, 의, 지, 예, 신 등 5행의 덕목 명을 따른 것이다.
중정대(中正臺)는 발해의 감찰 기구로 수장은 대중정(大中正) 1인이다. 그 다음은 소정(少正) 1인이다.
주자감은 귀족 자제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었으며, 항백국은 왕실 후궁의 명령 전달 및 호위, 일상 생활의 시중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항백국의 수장은 상시(常侍)로서 환관만을 임명하였다.
발해의 지방 조직은 5경(상경 / 중경 / 동경 / 남경 / 서경) 15부(상경 용천부 / 중경 현덕부 / 동경 용원부 / 서경 압록부 / 남경 남해부 / 부여부 / 동평부 / 막힐부 / 철리부 / 정리부 / 회원부 / 안변부 / 안원부 / 솔빈부 / 장령부 /) 62주와 3개의 독주주로 구성되었다. 주 아래에는 100여개의 현이 있어 부 - 주 - 현의 3단계 행정 관리 체제를 갖추었다. 부에는 도독을 두었고, 주에는 자사를 두었으며, 현에는 현승을 두었다. 발해의 이러한 지방 행정 관리 체제는 당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발해의 군사 조직은 당의 16위제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위가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또한, 구체적인 중앙 군사 조직의 역할과 그 운영 원리에 대해서도 뚜렷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발해의 군사 조직은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 해석의 차이에 따라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위, 남우위, 북좌위, 북우위로 이루어졌다는 10위설과 남좌우위, 북좌우위를 각각 하나로 보고 8위제였다고 보는 견해로 나뉘어졌다. 맹분위, 웅위, 비위가 궁성의 숙위를 담당하고, 남북의 좌우위가 각각 남위 금병, 북위 금병의 역할을 담당했으리라고 추측된다. 각 위에는 대장군 1인, 장군 1인씩을 지휘관으로 두었다. 각 위의 장군 아래에는 다수의 지휘관이 있었다.
지방 군사 제도에 대해선, 촌장인 수령을 지휘관으로 촌락민을 병사들로 삼는 군사 조직이 촌락을 단위로 조직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9. 지리
발해의 여러가지 지도. 사료가 부족하여 정확한 영토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치 않고 발해사와 얽혀있는 국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 맞는 지도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만 봐도 발해 연구사 초기에는 연해주 - 아무르강 하류 북만주와 겹치는 발해의 동북방 영역을 넓게 인식했으나 근래에 들어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연해주 -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의 역사를 발해보다 높게 평가하려는 의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꼭 러시아만 그런게 아니라 동북 공정을 마무리한 중국, 자신들의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해사를 연구했던 일본이 있다.
위의 지도는 중국, 러시아의 일부에서 지지. 의외로 중국에서는 발해의 동북이 넓게 그려진 지도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발해의 동북이 러시아 방면으로 광범위하게 뻗쳐 있는 지도를 사용하곤 하는데 그 이유가 발해를 당의 도독부 정도로 보아서(…)이다. 중국은 어차피 발해를 말갈과 동류로 인식하며 말갈이 러시아 방면까지 넓게 퍼젔으니 발해도 도긴개긴이라는 식이다. 중국에서 제작한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위 지도는 일본에서 제작되었지만 저런 지도가 일본의 주류는 아니고, 일본에서는 주로 아래 지도에서 요동과 서북한을 제외한 지도가 주류이다. 일본의 교과서나 역사책을 보면 알수있다. 일본은 발해를 말갈의 역사로 보는 편이다. 일제 시절에는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로 보기도 했다.
이쪽이 현재 한국 교과서에 실려있는 지도. 일부는 요동과 서북한 지역을 무주공산이라 하기도 하지만 국사 교과서를 위시하여 대체로 발해의 요동과 서북한 지역 지배를 인정하는 추세이다. 실제로 요동과 서북한 지역을 무주공산으로 설정하면 당나라와 신라의 진격이 막힌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특히 요동 지역은 주요 거점이기 때문에 당나라, 발해, 후의 거란이 치열하게 군사적 대립을 벌인 지역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현재의 서북한 지역, 아무르강 유역을 직접 통치하지는 못했다는 것으로 일치되는 양상을 보인다. 다만 요동에 대해서는 교과서에서도 그렇고 선왕 이후로는 발해의 통치하에 들어간 것으로 보는것 같다.
무엇보다도, 발해의 정확한 영토를 판단할만한 사료가 없기도 하지만 당시의 발해가 근대국가와 같은 확고한 국경선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 자체가 매우 낮다. 특히 발해가 위치한 지역의 인구밀도 자체가 워낙 낮아서... 당장 해당 지역에서 중국과 러시아간의 국경조약이 맺어진 것도 청나라 시대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즉, 발해의 영토는 현대와 같이 선으로 구별되는 배타적인 면 형태가 아니라 중심부로부터 파급되는 지배력이 변경으로 갈수록 약해지는 형태였을 것이다. 사료가 발견된다고 해도, 명확한 국경 개념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해석하는 사람 편한대로 그을 수 있는 셈.
다만 최근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이 발견되면서 영토 범위에는 큰 혼란이 따른다.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의 위치가 아무르강 너머의 블라고베셴스크 주변에 있기 때문.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발해인들이 서아무르 유역까지 진출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으므로 아무르 강 너머까지 지배 범위가 확대될 수도 있다.
다만 영문 위키피디아 측에서는 확정된 곳만 계산해서 최대 면적을 80만Km2로 보고 있다. 단 국내에선 일반적으로 40만km2 ~ 60만km2로 본다. 아마 최대 영토와 평상시 영토의 차이인듯.
발해 문학
발해가 ‘북국(北國)’이라면 신라는 ‘남국(南國)’이라 할 수 있다. 두 나라가 함께 있는 시대를 ‘남북국 시대’라고 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이 부분은 조동일 교수의 책을 참고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현대적인 해석이다. 당시에 발해나 신라, 혹은 당에서 두 나라를 남국과 북국으로 대응되는 것으로 인식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최치원 등이 발해를 북국으로 칭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현대적 해석을 배제하면 사실 단순히 북쪽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남국인 신라에 대응되는 북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이유가 없는 것. 또한 발해 입장에서 신라를 남국으로 칭한 근거 역시 찾기 어렵다. 발해와 일본이 주고 받은 국서가 일본에 많이 보관되어 있으며, 당나라 유학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중 당나라 문인이 발해인에게 준 시 등도 소중한 자료로 연구되고 있다. 발해는 당나라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일컬을 정도로 번영을 누리고 한문학의 수준을 자랑했지만, 거란족의 침공으로 문헌 자료가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재 남아있는 발해 문학 관련 사료는 외국에 전해진 시문과 고고학 발굴의 성과 뿐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발해에도 한자를 이용해 자국어를 기록하는 방법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구당서>에서 발해에는 “자못 문자 및 서기(書記)가 있다”라고 한 말이 그 증거이며, 한자를 이용해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쓴 것이 거의 확실시되나 아직 해독되지 못했다. 발해 집터를 발굴했을 때 출토된 기와 등에 문자가 발견되었고 또한 중국 사료에는 당 현종 시절 발해가 보낸 외교 문서를 당 조정이 해독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다가 이태백이 겨우 해독해냈다는 기록도 있다.
발해 문인 중 오늘날까지 작품이 남아 전하는 경우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가 일본 문헌에 수록되어 전하는 것들이다. 일본에 간 발해 문인들은 자리잡기 시작한 일본 한문학에 상당한 자극과 영향을 미쳤다. 양태사, 왕효렴, 배구, 배정 등의 시가 남아 있다.
사신의 일행에 동참한 승려들의 시도 몇 편이 남아 있다. 발해 문학 작품이 국내에 남은 것은 2편의 비문(碑文)뿐인데, <정혜공주 묘비>와 <정효공주 묘비>이다. 이 비문은 변려문의 형식을 갖췄으며, 감각과 표현을 최대한 세련되게 갖춘 귀족 문학의 기풍을 아주 잘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두 비문은 고유 명사나 숫자 따위만 다르고, 다른 대목은 거의 같았다. 고정된 격식을 마련하고 필요한 대목만 고쳐 썼음을 알 수 있다. Ctrl-c, Ctrl-v 의 폐해 아름답게 표현하는 격식을 너무 존중한 나머지 창의력을 잃고 쇠퇴하는 폐단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까지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제 4판, 1권 참고) 다만 대상이 묘비란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실제로 묘제는 경직되어져 있는데, 그게 시대적 차이가 없고 왕족 수준의 고위층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 문학사를 연구하는 교수들 중에서 발해 문학을 우리 나라 문학사로 다루는 이는 조동일 교수가 거의 유일하며, 그 이외는 발해 문학을 다루지 않거나 제외하고 있다. 이것은 발해 문학의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발해 문학 자체가 동아시아 전체의 문화사에 편입된 공동 문학권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홍라녀 녹라녀 전설은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얼마 안 되는 발해의 전설이다. 영화 무영검의 모티프가 되었다.
융합된 문화
발해는 고구려 문화의 토대 위에서 당나라의 문화를 수용했으며, 말갈인의 토착 문화와 융화되어 이를 바탕으로 발해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발해의 수도 상경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본떠 건설하였는데, 외성과 내성, 주작대로를 갖추었다. 그 안에 궁궐과 절을 세웠는데 궁궐터에서 발견된 온돌 장치, 절터에서 나온 벽돌과 기와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무덤을 보더라도 고구려와 당나라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정혜공주 묘는 굴식 돌방 무덤 양식으로 고구려 고분에서 보이는 모줄임천장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보다 늦게 만들어진 정효 공주 묘는 벽돌 무덤으로 당과 고구려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데, 내부의 벽화는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한편 발해 초기의 흙 무덤과 출토 유물을 통해 말갈족의 전통도 알 수 있다.
발해에서도 신라나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성행하여 주요 도시에 절을 세웠다. 수도 상경에서는 무려 10여 개의 대규모 절터가 발견되었고,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많은 불상이 나왔으며, 탑과 석등도 볼 수 있다. 탑은 당나라의 양식을 따라 벽돌로 만들었으며, 그 중엔 무덤 위에 세운 것도 있어 발해만의 특색을 보여준다. 절에 세운 석등 중에는 높이가 6m가 넘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석등도 있어 발해인의 힘찬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신라에서는 발해의 이러한 말갈적 특성을 영 좋지 않게 보았던 듯 하다. 삼한일통의 자부심이 컸던 신라로서는 고구려의 사직 역시 신라로 통합되었다고 생각했다. 고구려 왕족 안승이 보덕국이 망한 후 신라에 망명하여 높은 관직과 국성인 김(金)씨를 하사받았고, 그 외에도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귀부하였다.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넘어가자. 때문에 발해에 대해서는 고작해야 오랑캐와 섞인 반(半)야만의 무리, 고구려 조정을 참칭하는 세력 정도로만 여겼다. 화이(華夷)적 세계관의 당대 동아시아에서, 발해와 신라 양국 간 동족 의식은 거의 미미하였던 듯. 그런데 원래 과거에는 민족 개념이 희미했고 민족 의식을 형성하는 것에 실패하면 유전자상으로는 거의 일치해도 다른 민족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라틴족이나 게르만족 계열 민족들처럼 같은 민족이라도 서로를 다른 민족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결국 갈라지게 되어 있다. 심지어 같은 뿌리에서 나왔어도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벌이며 서로를 무자비하게 죽여댄 남슬라브계 민족들이나, 러시아인을 민족적으로 열등하다 생각하는 우크라이나인들과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키예프 공국 드립으로 주를 이룬다. 그런데 현재 우크라이나는(...)
부인들은 투기가 심하다. 대체로 다른 성씨들과 서로 10자매라는 (의자매) 관계를 맺어 번갈아 남편들을 감시하며 첩을 두지 못하게 한다. 남편이 밖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독살을 모의하여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인다. 한 남편이 바람을 폈는데 그 아내가 깨닫지 못하면 아홉 자매가 떼지어 가서 비난한다. 이처럼 다투어 투기하는 것을 서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므로 거란, 여진 등 여러 나라에는 모두 창기(娼妓)가 있으며 양인 남자들은 첩과 시비를 두지만, 발해에만 없다.
11. 외교
남쪽의 신라(통일신라)와는 그리 친하지도 않지만 삼국시대 때처럼 열심히 싸우지도 않는 평온한 관계를 200여년간 유지했다. 두 나라가 싸울 뻔 한 일이 733년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신라가 발해를 공격하러 가다가 눈이 많이 와서 못 가겠다는 핑계로 그냥 포기하고 내려간 것, 그리고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때 일본이 발해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인데 이는 발해가 거절했다. 군사적 충돌은 거의 없었지만, 라이벌 의식 같은 건 있었는지 서기 897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발해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하기도 하였고, 당나라에서 신라 유학생들과 발해 유학생들의 신경전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발해 건국 후 발해는 일본과 국교를 맺으려고 하였다. 발해 건국 30년째인 727년 8월에 일본으로 처음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었다. 일본으로 가는 루트는 부산 쪽까지 내려가서 대한해협을 넘는 게 가장 가깝고 안전한 루트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발해 무왕은 자신을 “고려 국왕 대흠무”라고 칭했다. 일본 사신이 발해의 문왕에 알현하러 왔을때 무왕은 일본 사신에게 "이 땅은 옛 고구려의 땅이며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으니 너희 왜는 발해를 고구려를 대하듯이 하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년 동안 발해사 34회, 견발해사 12회 등 빈번한 교류가 있었다. 다만 상술한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같은 건 거절하기도 했다. 발해 사신단의 주요 목적지는 노토 반도 등 카가 지방으로, 이 지방에서는 이사카와현 누가미마치 유적이나 고마츠 시 시바야마가타에서 발굴된 온돌이 포함된 집 등 발해인과의 교류 흔적이 나타난다. 다만, 상기했다시피 이 교류는 절대 녹록한 것이 아니었는데, 일본 측의 기록을 보면 발해와 왕래하다가 풍랑을 만나자 사람들이 절망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있다.
당나라와는 초기에는 강경하게 나갔다. 많은 전쟁을 치렀으며, 당나라는 발해 왕을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발해의 건국 자체가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박살내고 비로소 성립한 것이므로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대무예 때에는 당나라 본토 산동성 쪽을 공격하기도 했다. 문왕 때는 평화적으로 문물 교류가 있었으며 서기 762년에 문왕을 발해 국왕이라고 불렀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흔히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식으로 건국 세력이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발해의 족원(族源)을 따지는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왜냐하면 여러 사서에서 대조영이 말갈 출신임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당서(舊唐書) 발해 말갈전의 기록은 이렇다. 참고.
발해 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
渤海靺鞨大祖榮者 本高麗別種也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의 기술은 이렇다.
발해는 본래 속말 말갈로서 고려에 덧붙여진 자로서, 성은 대씨다.
渤海 本粟末靺鞨 附高麗者姓大氏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대조영 등은 고구려인이 아닌 속말말갈 출신으로 나중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된 집단에 속하는 것이 된다. 한국에서는 흔히 신당서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것은 구당서의 기록과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즉 구당서에는 "말갈족이 주축이 된 나라지만 건국자는 고구려인"이라고 사실에 충실하게 기록한 반면 신당서에는 "말갈족의 나라이며 지배층도 말갈인"이라는 식으로 일관성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구당서와 신당서 중 구당서 쪽이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구당서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 사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중국 사학계는 구당서의 문장이 대조영을 '고려인'이라 하지 않고 '고려 별종'이라고 지칭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그냥 '고구려인'이라면 굳이 '별종'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 사학계는 '별종'을 '다른 종족(異種)'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반박한다. 백제나 고구려를 부여 별종이라고 한 것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오히려 고구려에 대한 계승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수서에서는 백제를 고구려 별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로도 충분히 증명되거니와 건국 설화 등을 볼 때 고구려 지배 세력이 부여에서, 백제의 지배 세력이 부여 혹은 고구려에서 나왔다는, 최소한 아주 강한 친연성을 가진 일족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별종'으로 표현한 이유가 고구려와의 차별성을 강요하기 위한 표현이 아님은 확실하다.
하지만 구당서의 찬자가 대조영을 고구려의 '본류'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방계'로 취급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대조영에 대해서는 단순한 계승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본래(本)' 고려 별종이라고 하여 건국 이전부터 대조영이 고구려와 분리시켜서 볼 수도 있는 어떠한 집단의 소속임을 강하게 시사하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구당서의 같은 기사에서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후 모여든 고구려 유민에 대해서도 '고려 별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최치원이 쓴 글이다. 최치원은 당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 "발해(渤海)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謝不許北國居上表)"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최치원이 쓰기는 했는데, 신라 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국서의 형식이다. 따라서 당시 신라의 공식적인 견해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臣謹按渤海之源流也。句驪未滅之時。本爲疣贅部落。靺羯之屬。寔繁有徒。是名栗末小蕃。嘗逐句驪內徙。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至武后臨朝之際。自營州作孼而逃。輒據荒丘。始稱振國。
발해(渤海)의 원류(源流)는 고구려(高句麗)가 망하기 전엔 본시 사마귀만한 부락(部落)으로 말갈(鞅鞨)의 족속이었는데 이들이 번영하여 무리가 이뤄지자 이에 속말(粟末) 소번(小蕃)이란 이름으로 항상 고구려를 좇아 내사(內徙)하더니, 그 수령 걸사우(乞四羽) 및 대조영(大祚榮) 등이 무후(武后) 임조(臨朝) 때에 이르러, 영주(營州)로부터 죄를 짓고 도망하여 문득 황구(荒丘)를 점거하여 비로소 진국(振國)이라 일컬었나이다.
이 글에서는 발해의 원류를 '말갈'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통전에서는 이렇게 말하고있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그 우두머리인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불렀다. 선천(先天) 연간[당나라 현종 임자년(서기 712년)이다.]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 서기 719년]에 대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高王)이라고 하였다.
금사(金史)에서 등장하는 발해 관련 기술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
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涅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
隋稱靺鞨,而七部並同。唐初,有黑水靺鞨、粟末靺鞨,其五部無聞。粟末靺鞨始附高麗,姓大氏。>李績破高麗,粟末靺鞨保東牟山。後爲渤海,稱王,傳十餘世。
금(金)의 선조(先)는, 말갈씨(靺鞨氏)에서 나왔다.
말갈(靺鞨)은 본래(本) 물길(勿吉)이라 불렀다.
물길(勿吉)은, 옛날 숙신(肅慎) 땅이다.
원위(元魏 / 후위後魏) 때, 물길(勿吉)은 7부(部)가 있었다.
말하길 속말부(粟末部), 말하길 백돌부(伯咄部), 말하길 안차골부(安車骨部), 말하길 불열부(拂涅部),
말하길 호실부(號室部), 말하길 흑수부(黑水部), 말하길 백산부(白山部)이다.
수(隋)가 말갈(靺鞨)이라 칭(稱)하였는데, 7부는 모두 같다.
당(唐) 초(初)에,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있었는데, 그 5부는 듣지 못 했다.
속말말갈(粟末靺鞨)은 처음에 고려(高麗)에 부(附 / 붙음, 종속함)하였는데, 성(姓)은 대씨(大氏)다.
이적(李績)이 고려(高麗)를 파(破)하자, 속말말갈(粟末靺鞨)은 동모산(東牟山)을 보존(保)하였다.
후(後)에 발해(渤海)를 위(爲/다스림)하고, 왕(王)을 칭(稱)하였고, 십여세(十餘世)를 전(傳)하였다.
고려사절요에서의 발해와 대조영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인데, 당 나라 무후(武后) 때에 고구려 사람 대조영(大祚榮)이 달아나 요동(遼東)을 지키니 당 나라 예종(睿宗)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였다. 그 뒤에 스스로 발해국이라 일컬으며 부여(扶餘)ㆍ숙신(肅愼) 등 10여 나라를 아울러 다 차지하고 문자ㆍ예악(禮樂)과 관부(官府)의 제도를 세웠다.
고운집에서의 발해의 원류
신이 삼가 발해의 원류를 살펴보건대, 고구려가 멸망하기 이전에는 본디 이름도 없는 조그마한 부락에 불과하였는데, 말갈(靺羯)의 족속이 번성해지면서 율말(栗末)이라는 소번(小蕃)의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일찍이 고구려의 유민들을 따라 강제로 내지(內地)로 옮겨져서 살았는데, 그 수령인 걸사우(乞四羽)와 대조영(大祚榮) 등이 무후(武后)가 임조(臨朝)할 즈음에 이르러, 영주(營州)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 기회에 그곳에서 도주하여 문득 황구(荒丘)를 차지하고는 비로소 진국(振國)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당시에 그곳에는 고구려의 유신(遺燼 유민(遺民))과 물길(勿吉)의 잡류(雜流)가 있었는데, 백산(白山 장백산(長白山))에서 악명을 떨치며 떼로 모여 강도 짓을 하는가 하면, 흑수(黑水 흑룡강(黑龍江))에서 사납게 구는 것을 의리처럼 여기며 기승을 부리곤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란(契丹)과 합세하여 악행을 조장하다가, 얼마 뒤에는 돌궐(突厥)과 서로 공모하였는데, 만리의 논밭을 김매고 있는〔耨苗〕 세상에서 요동(遼東)을 지나는 사신의 수레를 누차 막더니, 10년 동안 뽕나무 오디를 먹고서야〔食葚〕 뒤늦게 중국에 항복하는 깃발을 들었습니다.
이에 앞서 그들이 읍거(邑居)를 세울 적에 우리에게 와서 이웃으로 의지하며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때 추장 대조영이 신의 나라로부터 제5품의 직질인 대아찬(大阿餐)의 벼슬을 처음 수여받은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 선천(先天) 2년(713년, 성덕왕 12년)에 와서야 비로소 대조(大朝)의 총명(寵命)을 받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해지게 되었습니다.
발해 건국 세력의 출자를 말갈로 보는 의견을 반박하는 근거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삼국유사의 발해 관련 기록이다. 대조영이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라고 하는 것도 주로 삼국유사를 근거로 한다.
三國史云,儀鳳三年高宗戊寅 高麗殘孼類聚 北依太伯山下.國號渤海.開元二十年間 明皇 遣將討之.又聖德王三十二年玄宗甲戌 渤海靺鞨越海侵唐之登州.玄宗討之.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祖榮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삼국사에서 말하기를, 의봉 3년 고종 현술에 고려의 남은 세력들이 서로 모여 북쪽의 태백산 아래 의지하였다.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개원 20년 경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다. 또한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 발해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범하였다. 이에 현종이 토벌하였다. 신라고기에 말하기를 고려의 옛 장수 조영은 대씨이다.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여기에서 신라고기가 언급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최치원의 글이 발해에 대한 신라의 일반적인 인식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이외에도 제왕운기에서 발해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다.
지배층인 고구려계가 소수이고, 피지배층인 말갈계가 다수였다는 식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일본 사서인 유취국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 재당학간승 영충 등이 덧붙여 보낸 글을 받들어 전하였다. 발해국은 고려의 옛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천명 개별 천황 7년 고려 왕 고씨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며, 그 후 천지진종풍조부천황 2년 대조영이 비로소 발해국을 세웠다. 화동 6년에 당나라에서 책립받았다. 그 나라는 사방 2천리이며, 주, 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촌리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은 적다. 모두 토인이 촌장이 되었으며, 대촌에는 도독, 다음에는 자사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토지는 극도로 춥고, 논이 마땅치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
又傳奉在唐學間僧泳忠等所附書, 渤海國者高麗之故地也. 天命開別天皇七年, 高麗王高氏爲唐所滅也. 後以天之眞宗豊祖夫天皇二年大祚榮始建渤海國, 和銅六年受唐冊立. 其國延袤二千里, 無州縣官驛, 虛虛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日都督, 次日刺史, 其下百姓皆日首領, 土地極寒, 不宣水田,俗頗知書.
사실 이 부분을 단순하게 봐서 그렇지, 이 부분만 봐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어느 시대의 이야기인지, 영충은 발해에 대해서 얼마나 알았는지, 어느 길을 지나서 왔는지 등이 문제가 된다. 단적으로 발해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와 일본으로 직행하는 항구를 잇는 일본도는 말갈 부족 지역을 관통한다. 상경 용천부 자체가 속말부나 백산부같이 동화가 안 된 말갈 지역 인근의 안정화를 위해서 세운 계획 수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발해 무왕 시대 정도에 이 길을 통과했다면 당연히 보이는 것은 말갈 부족 뿐이다. 아마 일본 사신인 영충이 본 발해의 풍경은 말갈인이 많이 거주하던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 즉 동부 발해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고구려 유민의 구성비도 대조영 시기, 문왕과 무왕 시기, 흑수 말갈을 흡수한 이후 등을 모조리 고려해야 한다. 또한 고구려 멸망 이후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추측해야 한다. 이 단계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유취국사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 중국의 동북 공정의 연구 보고서는 고구려 인구를 거의 모조리 당나라로 잡아가서 과거 고구려 영역이 무주공산 지경으로 변했다 수준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말갈의 존재가 또 문제가 된다. 애초에 말갈이라는 말이 당대인들이 자신들을 일컬어 사용한 말이 아니라, 부르는 쪽에서 편한대로 지어 부른 것이어서 범칭, 비칭 등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고구려 내부에서도 동화가 약한 이들에 대해서 말갈이라고 칭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그 근거와 배경이 약하다. 그래서 최치원이 사용한 발해 말갈이라는 표현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평이 있다. 애초에 최치원이 쓴 글이 발해와 신라 사이의 자리 뺏기 논쟁 중에 쓴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발해를 깔고 들어갈 필요가 있기도 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영향력 속에서 움직인, 그래서 고구려인과 구별할 수 없는 이들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도 상존한다.
신 / 구당서에, 영주 탈출 시에 걸걸중상이 걸사비우와 더불어 거느렸던 집단이, 말갈인들이 아닌 고구려 유민으로 나와 있는 것도, 걸걸중상이 말갈계가 아닌 순수 고구려계 사람이었거나 말갈계라고 하더라도 이미 고구려에 동화된 사람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萬歲通天年,契丹李盡忠反叛,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保阻以自固。
만세통천년(萬歲通天年 : 696년)에 거란(契丹)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구당서의 기록에는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라고만 나와 있어 영주 탈주 당시 걸걸중상 - 대조영 계열 지도부의 통솔을 받았던 세력의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나,
萬歲通天中,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有舍利乞乞仲象者,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度遼水,保太白山之東北,阻奧婁河,樹壁自固。
만세통천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 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이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서 요수(遼水)를 건넜는데,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차지하고 오루하(奧婁河)를 막아 성벽을 쌓아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신당서에는 보는 바와 같이 그 대상이 고구려 유민[高麗餘種]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공동 지도자였던 걸사비우가 말갈 추장[靺鞨酋]으로 나와 있다는 점에서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을, 걸사비우는 말갈족을 이끌었다는 해석도 있다. 구당서의 각자 거느렸다[各領]라는 표현을 감안하면 충분히 개연성 있는 해석이긴 하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중국 정사에서 걸걸중상이 이끈 것으로 확인되는 집단은 어디까지나 고구려 유민이었지 속말 말갈이든 뭐든 말갈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상의 기록들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은 1.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각기 다른 고구려 유민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거나 2.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 집단을, 걸사비우는 말갈족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거나 둘 중 하나이지, 걸걸중상이 말갈족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신당서에서 걸사비우에 대해서만 굳이 따로 말갈 추장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걸걸중상이 그와 같은 신분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12.2. 역사 주체 문제
러시아 사학자들은 발해를 중국사나 한국사에서 분리시켜 말갈족의 역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얼핏 보면 중립적인 듯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야만 자국(연해주)의 역사에 포함시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논리인데, 사실 러시아에서 발해라는 국가에 얼마나 관심이 있을진 의문. 오히려 발해에 대한 연구 성과를 가장 활발히 내놓고 있는 나라는 좀 뜬금없지만 일본인데, 중국 다음으로 발해와 활발한 교류 관계를 가진 나라(신라는 발해랑 별 교류가 없었다)라는 점도 있겠지만 일본도 은근히 발해가 일본의 조공국이었다는 일본 고대 사서의 기록에 자극받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발해가 조공국일 확률은 거의 없다. 분명히 발해-일본 관계에서 더 적극적인 입장은 발해였지만, 이는 육지로 당과 신라의 국경선을 접하는 발해와 바다라는 장벽을 통해서 한 발 떨어진 일본의 입장 차이 정도였다.
한편, 2005년부터 중국은 옛 상경 성터 출입을 통제하고 발해의 궁성(宮城)을 복원하는 작업을 실시했는데, 2008년 복원이 완료된 상경의 궁성이 발해 궁성인지 당 장안성(長安城)의 궁성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당시 장안성의 구조나 건축 양식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으며, 발해의 유물들 또한 당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드러나기 때문에 당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긴 하다. 발해 뿐만 아니라 신라의 금성이나 일본의 헤이안쿄도 당나라의 장안성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고구려인보다 말갈족이 주체였다고 하더라도, 발해는 중원 국가를 표방하지 않았고, 한족이 주체도 아니었던 나라였던만큼 중국사에 포함될 건덕지란 그냥 말갈족의 후손이 현대 중국의 소수 민족이라는 점 뿐이다. 그런데 말갈 및 그 후손들은 만주에만 잔존하다가 중국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 연해주, 한반도, 몽골 지역에도 퍼져 나가 그곳을 영유한 국가의 구성원이 되었던만큼 "말갈은 중화 인민 공화국의 소수 민족인 만족의 선대 집단이므로 '말갈의 역사 = 중국사'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발해인 스스로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여기고 있고 설령 말갈족이 대다수고 소수 지배층이 고구려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이미 발해가 한국사라는 논리가 될 수 있다. 당장 소수 지배층인 몽골족이 대다수 한족을 다스렸던 원나라를 몽골 역사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사에도 포함되긴 한다 또 발해는 유취국사의 내용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 주민들이 말갈족이었다는 근거도 사실 매우 드물다. 관점의 차이인 것. 결론적으로 중국이 자국내 소수민족의 역사로서 말갈사를 다루면서 발해를 언급한다면 어느정도 논의의 여지가 있고 학술적 논쟁으로도 큰 문제가 안되겠지만, 애초에 중국사 편입을 노리고 '발해 =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전제하에서 일을 진행시켜나가다보니 논리적 오류가 상당히 많아 학술적으로는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고로 한국 사학계는 동북 공정에 반대하며, 다음 사료들을 통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구당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옛 풍속을 갖고 있다... 고려 국왕 대무예는 감사하게도 열국에 당면하여 여러 오랑캐를 총괄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옛 영역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 받았다. 『발해의 대 일본 국서』
일본 천황은 삼가 고려 국왕에게 문안한다... 지금 보내온 글을 보니... 천손이라는 참람한 칭호를 써 놓았다. 『속일본기』
12.3. 현재 한중일 3국의 발해 인식
중국과 일본에서는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식하지 않는 듯 하다, 특히 중국의 경우 민족구성을 연구한 논문까지 발표하며 발해를 말갈-여진-금-청 으로 이어지는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있다
발해는 말갈족 수령 대조영이 건국한 말갈족 나라이다... 일본과 교류 시 스스로를 "고려국" 이라고 칭하였으나 학자들은 이 명칭이 일본에서 일방적으로 부른 명칭으로 보고 있다. 『중국 바이두 백과』
8~10세기, 퉁구스계 말갈족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이다. 『일본 goo 사전』
퉁구스계 말갈족 대조영 고구려를 계승하며 건국한 나라이다.『일본 세계사의 창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