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중일전쟁(中日戰爭, 1937년) 전쟁의 원인들
전쟁원인에 관한 견해들─정치적인 측면
이 전쟁은 1894년 7월 25일 양국의 함대가 경기도 서해안의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충돌한 때부터 시작되어 다음해 5월 8일 강화조약이 비준돼 효력이 발생됨에 따라 종료하게 된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최초의 근대적인 전면전쟁이었다. 물론 타이완 지역 군사 활동에서 보듯이 양국의 현실적인 무력충돌은 강화조약이 발효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동북아 국제정치 질서에 획기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 이 전쟁이 일본의 계획적인 도발로 발발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또 이를 의심하는 학설도 없다. 다만 일본이 왜 전쟁을 도발했느냐 하는 데 의견이 갈라져 있을 뿐이다. 일본의 도발 동기는 정치 · 군사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견해와 경제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견해로 대별할 수 있다.
먼저 정치 · 군사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견해에도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1890년대의 국제정세 또는 당시 일본의 국내 정치상황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는 견해가 있다. 중일전쟁의 원인을 단기적인 특정한 정치현실에서 찾는 이런 견해들의 특징은 이 전쟁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대외팽창과 해외침략의 역사적 흐름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1890년에 일본은 처음으로 경제공황을 경험하였다. 1889년 쌀 흉작과 아울러 생사(生絲)수출이 미국 국내의 공황으로 격감됨에 따라 일어난 경제공황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의 방곡령(防穀令)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조선에서도 콩의 흉작으로 1889년에는 함경도, 1890년에는 황해도에서 콩의 일본수출을 금지시켰다. 이런 조치는 양국의 조약규정상 합법적인 것이었고 다만 그 금지조치의 예고 기간이 한 달로 되어 있었다.
일본이 이 예고 기간을 트집 잡아 끝까지 문제 삼은 것은 일본 국내의 곡물기근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일본은 경제공황으로 말미암아 도시, 농촌을 막론하고 빈민 문제가 큰 사회 문제가 되었고 이 해결의 길을 중일전쟁이라는 해외진출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의 정치적 후퇴를 만회하는 길은 중국과의 전쟁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다. 시노부(信夫淸三郞), 기타(北三修) 등이 특히 이런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또 조선시장이 일본의 산업자본에게는 공황 타개를 위한 사활의 문제였다는 고야마(小山弘健), 아사다(淺田光輝) 등의 견해가 있는데 이에 대한 비판은 후술키로 한다.
다음으로 전쟁 원인을 일본의 국내정치 사정에서 찾으려는 견해가 있다. 당시 일본은 조약개정 문제로 정당의 대립이 치열하였다. 특히 1893년 자유당이 정부에 접근하게 되자 고립하게 된 개진당(改進黨)이 대외경파(對外硬派)와 합세하였다. 이들은 조약여행건의안(條約勵行建議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여론도 이 건의안을 지지하고 불평등조약을 일시에 철폐할 것을 요구하였다. 내각은 조약개정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무너질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대외전쟁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다. 마에시마(前島省三)가 특히 이런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견해들은 메이지 천황제가 갖고 있는 침략주의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중일전쟁을 수년간의 단기적인 정치, 경제관계로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중일전쟁의 설명을 김옥균(金玉均) 암살 사건이라든가 동학란의 발발부터 설명하는 견해들이 모두 이런 부류에 속한다.
앞의 견해와는 정반대로 중일전쟁을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의 일관된 대외팽창의 역사적인 경향으로 설명하려는 견해가 있다. 야마베(山邊健太郞), 이노우에(井上淸), 나카쓰카(中塚明), 후지무라(藤村道生) 등의 견해가 이에 속한다. 그들에 의하면 중국과의 전쟁은 일본 역사상 필연적으로 일어날 전쟁이었으며 단지 그것이 1894년이란 특정한 시기에 발발한 것은 개전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그때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875년 운요 호 사건 직후 일본은 육군직제급사무장정(陸軍職制及事務章程)을 제정했는데 여기에 보면 전쟁선포는 실제로 육군경(陸軍卿)에게 귀속돼 있으며 1878년의 참모본부 조례(參謀本部條例)에 의하면 참모본부는 황제에 직속되는 프로이센의 군제를 따르고 있다. 이것은 군부 우월의 제도적인 장치이다.
이와 더불어 일본은 일찍부터 군비증강을 서둘렀다. 1882년의 군비증강 계획은 1885년부터 시행됐는데 이 계획은 기존 병력의 두 배를 목표로 삼고 있었고 1883년부터 시작된 해군건함 계획은 8년 이내에 대 · 중 · 소함 모두 42척을 보유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또 1889년에는 징집령을 대폭 수정해 국민개병제를 도입함으로써 군사국가의 면모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참모본부 제2국장 오가와 마타지(小川又次)가 1887년에 이른바 청국정토책안(淸國征討策案)이라는 중국 침략의 구체적인 구상을 건의한 바 있다. 이것은 당시 육군의 분위기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1890, 1892년에는 일본군의 대연습이 있어서 전쟁준비 상황을 점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893년 4월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川上操六)가 조선과 중국을 방문해 현지의 사정을 직접 시찰하였고 5월에는 해군군령부조례(海軍軍令部條例), 전시대본영조례(戰時大本營條例) 등을 제정해 중국에 대한 전쟁준비를 완료하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중일전쟁을 일본 군부만이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간 정치인은 전쟁을 바라지 않았으나 군부의 주장으로 전쟁을 결정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것은 그들을 변호하고 군부를 희생양으로 삼는 데 불과한 의견이다.
1890년 일본은 처음으로 의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내각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12월 6일 이른바 시정방침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대저, 국가독립자위의 길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주권선(主權線)을 수호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익선(利益線)을 보호하는 것이다. 주권선이란 강역(彊域)을 말함이오 이익선이란 주권선의 안위에 밀접한 관계를 갖는 구역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국가에게는 주권선과 이익선을 옹호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면 일본의 이익선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말하는 것인가?
야마가타는 시정연설에서 그 지역이 어느 곳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았으나 그가 같은 해 3월에 집필한 『외교정략론』(外交政略論)에서는 그곳이 곧 조선이라고 명백히 언급되어 있다.
우리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실은 조선에 있다. 시베리아 철도는 이미 중앙아시아에 이르고 수년 후 준공되게 되면 러시아 수도를 떠나 십수일이면 헤이룽 강(黑龍江)에서 말(馬)에게 물을 먹일 수 있으며,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는 날에는 곧 조선에 사건들이 많은 날이란 것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메이지 유신 이래 해외침략의 길을 걸어온 일본이 1890년에 이르러 침략의 첫번째 대상이 조선이라고 지목하고 이것을 이익선이란 명분으로 호도하였다. 그리고 1890년에 들어오면서 앞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여건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부채질하고 또 좋은 구실을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쟁원인에 관한 견해들─경제적인 측면
앞에서 지적한 고야마, 아사다 등의 견해가 한동안 유행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의 산업자본에 있어서 조선 시장의 확보가 사활의 문제로 이를 위해 일본은 전쟁을 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다음의 무역통계가 원용되었다. 조선에 수출하는 일본 품목의 구조가 1885년의 경우 일본 제품이 51%, 외국제품이 49%였는데 1892년의 경우에는 일본 제품이 87%에 달하고 나머지 13%가 외국제품이었다는 것이다. 즉 일본 제품이 크게 조선에 진출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하게 된 조선 시장에 대해 중 · 일의 각축이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첨예화됐다는 것이다. 1885년의 경우 중국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수출 점유비율은 중국이 19%, 일본이 81%로서 일본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 그 후 이런 우월한 지위는 계속 상실되고 1892년에는 드디어 중국이 45%, 일본이 55%를 차지하게 돼 양국의 조선에의 수출이 백중지세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 대하여 야마베, 나카쓰카 등이 반대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에 수출한 상품의 구조를 분석하면 이런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 수출된 주요 일본 제품은 면사(綿絲)와 면포(綿布)였다. 그런데 1891, 1892년간 일본 면사의 총 수출량의 75~100%가 조선에 수출됐으나 그 금액은 겨우 8,000원(円)에 불과하였고 그 금액은 조선에 대한 수출 총액의 0.6%에 불과하였다.
면포는 1891, 1892년간에 총수출량의 23%, 29%가 각각 조선에 수출됐으나 그것은 일본 면포 총생산량의 0.3%, 0.4%에 지나지 않는 분량이었다. 따라서 면사, 면포의 일본 산업이 이런 보잘것없는 시장을 위해 전쟁을 촉구했다고는 볼 수 없으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결코 사활의 문제일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상하이와 홍콩이 더 중요한 시장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의 중요성은 수출보다는 수입에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원료공급지 또는 본원적인 부(富)의 원천으로서의 조선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국 무역관계에 있어서도 1885년의 경우 일본의 조선 수출총액이 46만 원, 수입이 47만 원이어서 수출과 수입이 거의 비슷했으나 1892년에 이르자 조선에의 수출이 141만원인 데 비하여 수입이 무려 300만 원으로 급증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으로부터의 원료공급이 급증하였고 그만큼 원료공급지로서의 조선이 중요하게 되었다.
일본의 중요한 수입 품목은 쌀, 콩 그리고 금이었다. 조선의 쌀, 콩이 일본에게 중요한 것은 이른바 방곡령 사건에서 잘 나타나 있다. 1890년의 경제공황을 거치면서 일본의 쌀 수확능력이 불안정한 것이 드러났고 조선의 미곡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조선의 금 또한 중요한 것이었다. 조선으로부터의 금 수입은 일본의 금본위제도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중일전쟁 때까지 일본이 수입한 금의 총량 중에서 조선 금이 68%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금 수입에 중 · 일의 경쟁이 치열하게 되었고 전쟁 직전에는 중국이 일본보다 더 많은 금을 수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886년 조선 금 수출 중 중 · 일이 차지하는 비율이 각각 19.3%, 80.7%로서 일본이 단연 우세를 보였으나 1890년에는 63.3%, 36.7%로서 중국이 도리어 더 많은 조선 금을 수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본원적인 부의 원천인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보장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과의 무역은 출초(出超)이기 때문에 금이 유출될 까닭이 없었다. 많은 금이 일본으로 유출된 것은 일본의 은화(銀貨), 은행권(銀行券) 또는 다이이치 은행(第一銀行)의 어음 등이 유통됨으로써 일본인이 조선의 채금업자(採金業者)나 가난한 농민들로부터 사들인 것이거나 금광개발권을 얻어 금을 생산한 것들이었다. 이런 비정상적인 수단에 의한 상품거래는 금뿐만이 아니었으며 당시 일본의 대(對)조선 수출구조가 사기와 기만에 의한 일본 상품 판매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메이지 천황국가의 대외침략적인 성격에서 유래되는 것으로 그들이 원료공급지인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려는 정책의 결과였다. 그리고 중국에 의해 밀려난 조선과의 무역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 · 군사적인 수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890년에 들어서면서 그런 수단을 동원할 국제적인 여건이 마련됨에 따라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쟁 원인론 (세계외교사, 2006. 5. 25., 서울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