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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왕자의 난(1398년)
봉화백 정도전·의성군 남은과 부성군 심효생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조선 초, 태종 이방원이 왕자 시절에 일으킨 난. 무인년(戊寅年, 1398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하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음력 8월 26일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정사란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뜻. 삼봉집에서는 '공소(恭昭)의 난'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는 이 난으로 살해된 무안대군 이방번의 시호 공순(恭順)과 의안대군 이방석의 시호 소도(昭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부른 표현이다.
신덕왕후 소생 방석을 세자로 삼고 사병혁파 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한 것에 대해 신의왕후 한씨 소생인 왕자들과 방계 종친들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쿠데타이다. 흔히 이방원의 난으로 알려져 있으나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방계 왕족들이 태조에게 반기를 든 왕실 내분이다. 이성계의 막내동생 이화, 이성계의 조카 이천우(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의 아들)와 조온(이성계 누이의 아들), 3남 이방의, 4남 이방간, 사위 이저(경신공주의 남편)와 그의 아버지 이거이 등이 자기 휘하의 사병들을 이끌고 적극 가담했고 장자 진안대군 이방우의 아들이자 장손인 이복근도 이방원을 지지했다. 주요 친인척들 중 참여기록이 없는 사람은 차남 이방과 뿐이다.
당시 태조의 아들들을 살펴보면 장남 이방우, 차남으로 훗날 정종이 된 이방과, 셋째 이방의, 넷째 이방간, 다섯째로 훗날의 태종인 이방원, 여섯째로 이미 요절한 이방연, 일곱째 이방번, 여덟째 의안대군 이방석이 있다. 방연까지가 개국 이전에 사망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아들이고, 방번과 방석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아들이다. 세자책봉 당시 이방번은 12세, 이방석은 11세로, 당시 이방과가 36세, 이방원이 26세였으며 여섯째 이방연이 살아있었다면 20살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므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과 나이 차이가 심했다. 이미 장성해 있던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은 요절한 방연을 제외하면 크건 작건 다들 개국과정에 참여해서 일정한 공을 세웠다.
일반적인 적장자 계승 원칙을 따른다면 이방우가 세자가 돼야 했겠지만, 그는 조선 역사관에선 신돈의 손자였던 창왕의 즉위에 공헌한 일로 공양왕 즉위 이후 정계에서 사라진다. (이방우 문서 참조.) 게다가 폭음으로 조선 개국 직후인 1393년에 사망해 버린다. 방우가 생전에 가졌던 '적장자'로서의 위상은 방우의 아들 이복근 대신 차남 이방과에게 내려가 방우의 후손들은 정치실권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방우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 되었지만 여전히 걸리는게 있었다.
태조는 고려로 귀순해 중앙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계 실력자들을 필두로 한 고려 지배층과 적극적으로 혼인관계를 맺었다. 맏이 방우는 지윤의 딸과 결혼했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였다. 이색은 고려말 정계와 학계의 구심점으로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이다. 게다가 방우는 이색과 함께 (조선시대 역사관에선 신돈의 손자인)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방과는 증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고 지윤의 두 딸을 첩으로 들였다.(숙의 지씨, 성빈 지씨) 방의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는데 최인두는 동주최씨로 바로 그 최영과 인척관계에 있다. 방간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고, 이방원은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과 혼인했는데 민선과 민제는 모두 황려민씨(여흥민씨)로 재상지종으로 불린 유력 권문세가다.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는 그 이인임의 조카인 이제와 혼인했고 방번에 이르면 공양왕의 조카사위(…)다. 즉, 신의왕후 한씨 소생 다섯 아들과 방번은 모두 고려 구세력(심하면 왕족)과 혼맥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러한 혼맥은 변방무장 출신 태조가 중앙정계에 순조롭게 연착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된 이후엔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 막내 아들 방석만이 고려 구세력과의 접점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방석은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현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했다. 건국 후 절비(節妃)란 시호를 내려 어느정도 예우를 갖추긴 하였으나 죽은 신의왕후의 권세가 현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현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태조 2년 한씨의 3년 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때 동시에 공신부인들이 강씨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강씨의 권세는 공인되어 있었다.
일각에는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말자상속 풍습이 있는 유목 민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생각해보면 이것은 신빙성이 없다. 이성계는 아버지와 함께 공민왕에게 귀부할 때부터 고려인을 자부했고 고려인 대우를 받기 원했으며 여진족 티를 내지 않고 철저히 개경의 중앙귀족으로 정착하려 하였기 때문에 유목민 풍습을 따르고 싶어도 따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성계 다음 대에는 고려귀족으로서 형제간의 서열과 가문의 후계구도가 정착되어서 장남 방우가 개경의 대귀족인 전주이씨 가문의 차기 당주로서의 특권으로 음서로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고, 차남 방과 또한 이미 동북면 영지와 가별초를 물려받을 군사방면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에게 군인 수업을 받고있었다. 더구나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사대부중에서도 공민왕 이래의 급진반몽주의자들이었던 것만 봐도 이에 관련하여 몽골유목민의 말자상속제는 재고할 가치가 없다.
어쨌든 문제는 조선이 유목제국이나 봉건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토사구팽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많았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설상가상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배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살아있는 현 왕비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어머니인 신덕왕후의 사망으로 사라지면서 이복형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이다. 태조는 일부러 그녀의 릉인 정릉(貞陵)을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 심씨를 현비로 책봉하고 방석과 현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세자-왕손의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의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2.2. 간과한 것
태조나 공신들이 막내를 세자로 만들었을 때는 나름대로 명분(현존 왕후의 자식)은 있고 재상 중심 정치를 만들기 위한 정도전의 구상 때문에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큰 혼란을 만들어낸다.
공신 측에선 지금 왕후가 누구신데 당연히 왕후의 자식께서 세자가 되셔야지!, 무엇보다 왕이 결정하신 거다! 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고, 마찬가지 방과, 방원 등도 불평하거나 반발하는 순간 불충으로 찍힐 수 있어서 일단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안의 분노와 실망은 절대로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태조에게 자신만의 명분이 있다 해도 ,조선이 건국되고 제왕학이나 역사를 배웠다면 막내에게 물려주다가 멸문당한 문벌군웅, 동생이 태자 책봉 직전까지 가서 친족을 약화시킨 황제 등 장자상속을 지키지 않아 혼란의 시대가 온 사례가 수도 없이 많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미 한국사에서 이성계와 똑같이 자수성가하여 무력에 기반해서 나라를 세우고 장자를 무시하고 후처 소생의 막내를 후계자로 세우다가 쿠데타로 모든 것을 잃은 견훤이라는 반면교사가 있었다. 아무리봐도 막내를 책봉한 건 엄청난 리스크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① 신덕왕후의 강력한 주장으로 되었다. - 신덕왕후 사망 시 배후 없음
신덕왕후는 개국 전부터 태조와 혼인하고 두 아들을 낳고, 내조에 힘을 써 태조의 크나큰 신뢰를 얻고 있었다. 원래 공신들은 방우, 방과, 방원 중 한사람을 세자로 예상했지만 책봉 과정에서 강씨가 개입했고, 강씨를 무시할 수 없었던 태조는 방번, 방석으로 하자고 못박았기 때문에 거역할 수 없었다. 신덕왕후 덕분에 세자가 되었다면, 반대로 생각하면 신덕왕후 없이는 세자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전제가 있었다. 신덕왕후는 한양 천도 이후 사망했기 때문에 방번, 방석은 당연히 후견인이 사라져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공신들이 일치단결해서 이 둘을 지켜주고 보호해준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정도전, 남은이 죽자 나머지 공신들은 방원 편을 들어버려 방번, 방석은 궁궐에서 쫓겨나다가 살해당했다.
② 형들이 문제가 없었는데 막내가 되었다.
만약 형들이 다 이방우같이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간에 정치에 신경 안쓰고 술과 여색 등에만 빠졌거나, 이방의같이 소극적이고 욕심이 없었다면 방석이 세자에 이어 왕까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다못해 형들이 모두 공인된 서얼, 혹은 사생아라면 '방번과 방석은 비록 나이가 어려도 (정실 왕후인 신덕왕후의)적통이므로 세자의 자격이 있다'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형들도 모두 적통이고 똑똑하고 능력있으며, 개국 과정에서 공헌을 한 사람이 5명이나 있는데 다 제쳐두고 막내가 세자가 되었다. 일개 여염집이라고 해도 만약에 아버지가 재산을 나눠줄 때 같이 뼈빠지게 일하고 같이 고생한 자신들을 제쳐두고 아직 애교나 부리는 어린 막내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면 당연히 화가 날 수 밖에 없고, 아버지 사후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하물며 차기 국왕의 자리인 세자 자리이고, 시기가 이러한 면에 매우 민감한 건국 초기라면? 불만과 혼란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다만 첫번째 리스크와는 달리 세자를 폐위시키려면 명분이 있어야 했는데, 바로 적장자를 놔두고 서자가 왠말이냐!였다. 즉 '건국에 나름 공헌을 하고 장자 역할을 충실히 하는 방과를 놔두고 방석을 세우는 건 잘못된 도리다'라는 논리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방원 측은 훗날 신덕왕후 강씨를 첩이라고 깎아내렸다. 이성계 생전에도 얼마든지 할수 있었겠지만 이방원은 될수 있으면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다. 결국 이성계 사후 얼마 안가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격하되고 능침도 후궁으로 격하되는 수난을 당했다. 여기에 '정도전 등 간신들이 태조를 설득해 방석으로 책봉했고,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걸림돌이 되는 우리를 죽이려고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나설 수 밖에 없었다'라고 주장했다.이 주장이 맞다면 태조는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라는 거다
③ 방번, 방석은 개국에 공헌한 업적이 하나도 없다.
방번, 방석은 1381, 1382년 생이라 조선이 세워질 때 겨우 10살 쯤밖에 안 되었다. 반면 이복형들은 관직에 오래 머무른 방우,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방과, 그리고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아버지의 가장 큰 정적인 정몽주까지 살해하며 조선을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방원 등 개국 공헌에 힘쓴 무서운 형들이었다. 특히 방원의 업적을 생각하면 방원을 세자로 안 세우는게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태조는 이를 무시하고 방석으로 세자를 삼은데다가, 방석을 세자로 삼아야 하는 납득이 될만한 명분을 제공하지도 못했다. 이는 고생한 자신들을 홀대하고 새엄마의 자식들만 편애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아무리 태조가 무섭더라도, 섭섭함과 실망감은 감추기 어려웠다.
2.3. 예방책?
태조도 여기에 대한 걱정을 안한게 아니라서 나름대로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이방과, 이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방번과 이제야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중 이성계에게 있어 가장 상징적인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 방번이 넘겨받는다.(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정도전 일파에 대한 불만, 사병혁파와 요동정벌 등 급진정책에 대한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사병혁파와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 징집은 반대파로서는 자신들의 수족을 자르려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실제 이방원의 경우는 신덕왕후의 경계심까지 합쳐져 사병혁파를 계기로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정도전 역시 행정능력면에서는 출중한 인물이지만 정치적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기에, 건국 초기에 필요한 정책이었음에도 너무 급진적으로 전개한데다 이에 대한 반대파들의 반발을 강경하게만 대처했기에 반대파들의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2.4. 정도전의 요동정벌과 군사 개편
이렇게 세자위 문제로 조정에 혼돈의 카오스가 휘몰아 치고 있는 와중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발표한다. 당시 조선과 명은 표전문 사건 등의 외교문제로 인한 사신 억류 등의 문제가 터지면서 골이 깊어지고 있었는데 이 때 표전문을 짓는데 참여했던 권근은 태조가 따로 부르지도 않았어도 스스로 찾아가서 '저도 표전문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니 제가 가서 직접 해결하게 오겠습니다.'라고 하며 자원해서 명에 갔다왔다. 권근의 노고로 일은 잘 처리되었고 권근도 황제(주원장)에게 대접까지 융숭하게 받으며 금의환향 했다. 하지만 정도전과 그 파벌은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온 권근을 사헌부를 통해 탄핵해버렸다. 이유는 정총 등 표전문 관련으로 억류된 이들 가운데에 홀로 살아 돌아왔다는 것. 물론 태조는 '만리 길 마다 않고 자원해서 일처리하고 온 권근에게 상은 커녕 무슨 탄핵이냐?' 라며 씹어버렸다. 결국 정도전은 이에 어떻게 대답하지도 못하고 민심과 사대부들의 지지만 잃어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태조가 그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표전문 사건이 마무리된 와중에 정도전은 이참에 아예 요동을 공격하여 명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과격한 모습을 보였고 그를 위한 군사 개편까지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발로 공신들과 종친들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들을 회수하여 조선의 중앙군을 강화하는 '사병 혁파'를 추진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정작 정도전은 이러한 사병혁파를 추진하면서 공신들, 그리고 종친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공신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들을 내주는 것은 자신들의 손발을 자르는 것이라 생각했고, 종친(공신들 다수 포함)들, 특히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안그래도 세자 책봉 문제로 골이 깊은 상황에서 이러한 발표가 나오니 자신들의 수족이 잘린다는 생각을 넘어서 정도전 이놈이 기어이 우리의 목을 치려고 수작을 부리는구나!!!라며 이를 박박 갈았다. 게다가 조선 자체가 다른 것도 아니고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고려를 뒤엎고 일어난 국가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고려 멸망을 주도한 정도전이 이제와서 요동 정벌을 주장하며 사병을 몰수한다는 것이 왕족과 신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 지 달리 설명이 필요할까? 당연히 이들 공신과 종친 세력은 무인정사가 벌어졌을 때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 편에 서서 병력을 지원하거나 직간접적인 지지를 표명해 정도전과 그 당여들을 수세로 몰아넣었다.
3. 쿠데타의 전개와 결과
기본적으로 실록의 내용 자체와 당대 문집과 증언들이 하나로 일관되지 못하고 전부 제각각이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난해한 요소들이 다수 포착된다. 반군의 병력이 많았다고 하기도 하고, 적었다고 말하기도 하며, 전투가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없었다고 하기도 한다. 박위가 이방원의 군세를 살피러 갔다가 잡혀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난전중에 전사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김사형과 이무 등은 미리 포섭당한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투항한 것인지, 실록에 의해 조작된 것인지 알 수 없다.
객관적 기록으로 보자면, 이숙번,하륜 등은 확실히 반군 편에 서서 군대를 지원했고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 이제, 유만수, 변중량 등이 살해되고 왕씨 학살에서 겨우 빗겨났던 개성 왕씨들도 다수가 죽임을 당했다. 신덕왕후 소생의 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또한 살해되었다.
이직은 원래 제거 대상에 있었으나 종으로 위장하여 목숨을 건졌다. 영안대군 방과는 반란 소식을 듣자 아버지의 쾌유를 위한 제사를 준비하다 달아나 숨었고, 익안군 방의와 회안군 방간은 실록 묘사를 빌리면 말도 없이 뛰다가 자빠지기까지 하면서 열렬히 반란에 호응했다. 이방우의 장남이자 이성계의 적장손인 봉녕군 이복근은 이방원 편에 붙어서 공을 세우고 봉녕부원군의 작위를 얻었다.
궁궐수비대 총지휘관 박위 또한 살해당하고 공동으로 지휘를 맡았던 조온은 반군에 합류했다. 궁궐 내 다른 곳의 수비를 맡았던 이무도 조온이 투항하고 박위가 죽었단 소식을 듣자마자 투항했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궁궐 오위군 중 하나인 호분위의 군사 전원이 이성계 가문 가별초(사병)들이었다는 것. 이들은 이성계의 지휘 아래 황산 대첩, 개경 탈환 작전, 나하추 전투, 이오르 티무르 전투 등에서 승리한 당시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전개 과정을 추정해 보면, 오랜 세월 동북면에서 이성계 일가에 충성을 바쳤던 가별초들이, 태조가 직접 내린 공격명령 또는 태조가 시해될 정황조차 없이 자신들이 도련님들로 모셨던 동북면 출신 왕자들에게 칼을 빼들고 화살을 쏘았을 가능성은 없었다고 봐야하고 어차피 동북면 출신 왕자들이 주축인 반군 또한 전심전력으로 자기 가문의 정예 사병들과 적대할 계획은 없었을 것이다. 가별초를 포함한 수비대 전원을 전멸시킨다고 해도 피해가 심했을 것은 자명했기에 미리 지휘관들을 포섭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높다.
그렇게 되면 반군이 공성전을 하지 않고 궁궐에 입성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일 현장에서 지휘하던 박위는 이미 궁궐 내의 다수가 사전모략을 했거나 포섭됐다는 것을 파악하고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투항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예 조온, 이무 등에게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도 있다. 박위, 조온, 이무 등이 이끌던 지휘부 군대들이 모두 투항한 후, 궁궐내 다른 곳을 지키던 나머지 잔존 부대들도 전세가 꺾였단걸 알고 투항해 모두 무장해제당한 후 집으로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록에서 묘사되었듯 전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납득이 간다.
또한 다른 방어군들은 가별초를 포함한 대군과 대치했다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빠르게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반군측 자체 군세도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확실한 숙위군 지휘관들과의 밀약만 믿고 일을 진행할 순 없으니까. 실록에선 세자 이방석이 연이어 줄지어진 병력을 보고 놀랐다는 듯한 기록이 있다. 계유정난처럼 정말 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주저하는 사람들 걷어차가며 벌였다기보다는 사전에 주도면밀히 계획된 쿠데타였다.
난이 일단락 된 후, 신하들이 태조에게 정도전, 남은, 박위 등이 역적이라 죽였다는 문서에 서명을 요구하자 이름을 적고는 토하려다가 그리하지 못하고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은데 넘어가질 않는다."라고 말하며 울었다고 한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은 단번에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에 2차 왕자의 난도 불만분자의 돌출행동에 가깝고 별다른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1차의 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는 상왕이 되어 실권이 없어졌고 새로 왕이 된 정종도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 반면 이방원은 실권을 쥐고 세자가 되어서 공식적인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고 측근들이 조정을 장악했다. 보통 이런 경우 있을 법한 반대 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왕위 등극 후 가장 큰 위협인 조사의의 난조차 조기에 진압에 성공했다.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
태조는 반면에 쿠데타 한 번에 너무나 쉽게 무력화 되고 말았다. 모든 면에서 판박이는 견훤의 경우 신검은 쿠데타 후에도 쉽게 정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신검의 쿠데타는 견훤에 충성하는 이들을 숙청은 커녕 군대를 맞겨서 전쟁터에 끌고 나올 수 밖에 없었을 정도로 기반이 취약했다. 견훤이 고려로 망명 후 고려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후백제의 중신들은 견훤을 보고는 별다른 저항없이 투항했다. 하지만 왕자의 난은 쿠데타 과정에서 중신들과 왕실 친인척의 지지를 받았고, 당일에 이복동생 세자를 폐세자 후 살해는 물론이고 이성계의 손발이 될 측근을 모조리 참살해버리고 빈자리에 자기 사람들을 심어버리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궁궐에 고립된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변변한 반격 한 번 못 해봤다. 건국왕이라는 권위가 있음에도 최측근만 정리되자 중앙에 고립된 건 막내 세자 책봉이라는 무리수로 엄청난 지지를 잃었다는 반증이다.
4. 여타 기록왜곡
1차 왕자의 난에 관해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 이는 1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사가 실린 태조실록이 반란의 주동자인 태종 시절에 편찬되었기 때문이고, 실록 편찬 멤버들 또한 직, 간접적으로 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이방원의 군사들이 들 무기가 없어 서로 창을 쪼개어서 들었다고 하고 또 겨우 수십 명이 경복궁 앞에서 진을 쳤다고 하지만 당연히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 실제로는 충청도 관찰사 하륜이나 안산군수 이숙번 등 쟁쟁한 사람들이 지휘하는 최소 수천 명은 되었을 것이다. 그래야 군부의 최고기관인 삼군부와 궁궐의 근위병들에 맞설 수 있는 군세가 되니까. 애시당초 이게 사실이라면 나라 꼴이 참 막장이라고 할 수 있다. 수십 명 남짓 되는 사람들에게 나라가 무너진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당시 경복궁 숙위병 사령관은 이방석이었는데, 당연히 이에 대처를 하려고 했지만 저항을 못했다. 숙위병의 수가 적어 중과부적으로 밀려서 변변한 전투 한 번 치르지도 못하고 제압당했든지, 아니면 숙위병들마저도 창을 거꾸로 잡았든지, 그도 아니면 숙위병들이 대처하기도 전에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여하튼 이방원 측에서 적지 않은 병력을 동원해 급습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또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선 실록에서는 정안대군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처형되었다고 나와 있으나 이 역시 왜곡되었을 공산이 크다. 자세한 얘기는 정도전 문서를 참조할 것.
게다가 실록의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승정원일기마저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기록들이 불타버린지라 정확한 사실에 접근하기는 아직도 요원하다. 사실 승정원일기라고 조작 없이 멀쩡했을지는 의문이지만.
5. 태조의 병환
5.1. 태조 병환 조작설
태종이 반란군을 이끌고 가장 먼저 제압한 곳은 정도전과 친구들이 놀고있던 술집이 아니라 태조가 기거하고 있던 경복궁이다. 실록에서는 태조가 당시 와병중이라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반란군들에게 체포, 구금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 태조는 1차,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아주 건강하게 지냈으며 조사의의 난 때는 태종을 겨냥해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기도 하는 등, 와병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리고 당시 왕자의 난 전후로 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조 실록에 병환에 대한 기록은 6번인데, 태조 7년에 무려 5번이 몰려 있고 그 중에 왕자의 난이 발생한 8월에 4번이 몰려 있다. 그런데 8월 아파서 누웠다는 사람이 3일만에 흥덕사에 가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모순된 기록이 보이고, 태조가 아팠다면 아내 신덕왕후때 처럼 거처를 옮긴다던가 대사령이나 불공처럼 회복을 기원하는 행동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1차 왕자의 난 직전 태조의 회복을 위한 행동은 오로지관련된 내용이라 해봤자 영안군 이방과가 태조의 건강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리고 정종에게 선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건강 문제임을 봐서는 태조의 와병은 조작이고 태조가 구금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는 논리다.
당시 태조의 나이가 언제 갑자기 급사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62세)이고, 요동정벌을 앞두고 있는 비상한 상황인 시기인 것도 모자라 태조가 몸이 아픈데 재상이자 의흥삼군부사로서 군권을 모두 틀어쥐고 있던 정도전이 밖에서 술을 마신다? 태조가 아프면 병환의 중한 정도를 떠나서 즉각 궁으로 입궐해 상황을 살펴야 하는 정도전이다. 대응력이 떨어질 정도의 상황으로 태조가 병환이 있었다면 그 전에 이미 정도전은 경복궁에 들어가서 상황을 살피며 계엄령 선포를 할 것인가를 저울질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록에 나와있는 것처럼 태조가 걸핏하면 골골대며 자리에 누워버렸다면 상왕, 태상왕으로 물러났을 때 심심하면 사냥을 나가거나 타 지역으로 유랑을 갈 수 없었을 것이고 조사의의 난 때 군대 지휘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죽기 몇 년 전에 딸을 얻을 정도로 매우 건강한 사람이 태조였다.
5.2. 반론
실록의 기록을 믿는다면 태조가 진짜 아팠다는 쪽에 힘이 실린다. 태조가 하필이면 그 날에만 앓아누웠다 하더라도 무인정사 당시 태조의 나이(64세)라면 그 나이에 한 번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 실록에 기록된 태조의 병환은 1398년에 꾸준히 있어왔다. 즉, 적어도 그 년도에 태조는 상당히 아팠다는 것이 되므로 후일 태조가 건강했다 한들 그 당시의 병환을 의심하는 건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실록 기록을 보면 그 태조치고는 너무 무기력해보인다. 다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독한 상태라면 정도전 일파가 그렇게 술이나 마시면서 있을 가능성은 없으니 중병까지는 아니었고, 단지 건강이 조금 악화되어서 태조의 대응력이 떨어진 상황이었을 경우가 높다. 따라서 태조가 대응하고 싶어도 병환 중 태조를 대신할 인물이 없고 경복궁이 장악된 상태라서 태조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렵기는 했을 공산이 크다는 것.
만약 태조가 멀쩡한 상태에서 쳐들어왔다면? 그냥 아들이고 뭐고 거기서 끝났다. 태조가 아무리 늙어도 신궁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인 출신이라 반란 진압은 쉬웠을 것이다. 태조 개인의 무력이야 노령으로 인해 쇠퇴했다 쳐도 그는 수도 없는 무인정사보다 더한 아수라장을 돌파해온 경험이 있다. 거기다 왕이 있는 궁궐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것 자체가 반역죄로 삼족을 멸해도 할말 없을 때였다. 명분에서 한참 밀리는게, 만약 태조가 직접 진압에 나선다고 치면 과연 군사들은 누구 편을 들것인가? 멀쩡한 왕에게 갈것인가, 무턱대고 들어온 이방원 편을 들 것인가? 오히려 태조도 눈엣가시였던 이방원 및 야심있는 인물들을 쳐낼 좋은 타이밍이었을수도 있다.
이 경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방원 일파가 마침 태조가 병이 나서 드러누워있는 사이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