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베스트팔렌 - 독일을 무대로 벌어졌던 30년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지역. 1648년 베스트팔렌 내의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조약이 맺어졌다.
2 킬 – 제1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에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곳. 킬 군항에서 일어난 반란을 시작으로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3 아우슈비츠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의 명령으로 유대인 대량 살해 시설이 설치된 폴란드 남부 도시.
4 루르 – 독일 북서부에 위치한 유럽 최대의 공업 지대. ‘라인 강의 기적’은 이 공업 지대의 부흥을 뜻한다.
독일 소도시의 한 고등학교에 제1차 세계 대전 소식이 전해진다. 열아홉 살 소년 파울 보이머는 선생님의 선동에 따라 급우들과 함께 자원입대한다. 이들은 서부 전선에 배치된다.
마음이 연약했던 벰은 충동적으로 참호를 뛰쳐나가 죽음을 맞는다.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전우들은 하나둘 쓰러져 간다. 파울은 교회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 병사를 죽인다. 죽은 병사의 주머니에는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독일 작가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는 이상을 잃고 생존만을 찾는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파울은 포탄 구덩이 속에서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만 입을 들어 올린 채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오랜만에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어디선가 하모니카 소리가 들린다. 때마침 나비 한 마리가 파울의 앞에 나타난다. 파울은 자신도 모르게 나비를 따라 참호에서 몸을 일으킨다. 나비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진다. 저격병의 총격에 파울의 손은 나비가 내려앉듯 그렇게 내려앉는다. 그날 사령부는 본국에 전문을 보낸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독일의 근현대사는 전쟁의 역사다. 서부 전선에는 ‘이상 있었다.’ 본국에서는 고등학생들에게 끝없이 영웅 탄생을 부추겼다. 일부 위정자들은 겉으로는 숭고한 척했지만 성공적인 전쟁이 가장 큰 경제적인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었다. 우월성과 열등성을 구분하며 차별과 폭력의 명분을 찾았다. 민중은 민중대로 영토 확장에 자부심을 느꼈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나폴레옹을, 비스마르크를, 제2차 세계 대전 전범을 숭배한다. 현대에 와서는 인간이 배제된 금융 전쟁에 모두들 뛰어든다.
모든 문제는 편견에서 비롯된다. 게르만 족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독일 민족의 역사에서도 편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최악의 연애는 독일 여자와 영국 레스토랑에서 데이트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영국 음식은 맛이 없고 독일인은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편견에서 비롯된 말이다. 독일인은 연방제와 엄격한 교육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사교성이 부족하고 폐쇄적인 면이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다르게 친절하고 남을 잘 도우며, 신뢰와 믿음을 중시한다.
전형적인 게르만 족인 독일인은 비교적 키가 크고 노란 머리와 파란 눈을 지니고 있다. 이목구비가 강해 선이 굵은 독일인의 외모도 감정적으로 경직된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스웨덴 인, 덴마크 인, 노르웨이 인, 아이슬란드 인, 앵글로색슨 인 등도 게르만 족에 속한다. 하지만 이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보기에는 외모도 문화도 조금씩 다르다.
독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 독일 민족의 특징은 물론 유럽 민족의 흐름을 살피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모르면 편견을 지니게 되고, 제대로 이해하면 존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역사와 지리를 공부하는 이유다.
‘게르만 족’은 로마 인이 북쪽에 사는 다양한 민족을 총칭하여 부르던 이름이었다. 로마 인은 문자도 모른 채 반농반목 생활을 하던 게르만 족을 ‘바바리안(Barbarian)’이라고 불렀다. 바바리안은 야만인들이 ‘바-바(bar-bar)’라고 소리 지르는 것을 표현한 말이었다.
로마 인이 ‘바바리안’이라 부르며 경멸했던 게르만 족, 켈트 족, 훈 족, 고트 족 등도 나름대로 훌륭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게르만 족은 편리하게 입을 수 있는 ‘바지’를 입어 후일 서양의 의복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치마를 입던 로마 인들이 오히려 야만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정복자의 시각으로 문화를 바라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게르만 족의 독일은 가장 앞선 나라에 속한다. 한편 역사가 흐르면서 로마 인의 이탈리아는 독일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나라가 되기도 했다.
게르만 족이 사는 게르마니아(Germania)는 로마 인들이 라인 강과 비스와 강 사이를 일컫던 지역이었다. 북쪽에는 작센 인(라인 강과 엘베 강 중간)과 프리지아 인(북해 연안), 서쪽에는 프랑크 인, 중부에는 튀링겐 인(엘베 강 남부), 남쪽에는 알레마니 인(라인 강 상류)과 바이에른 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로마 멸망 후 도나우 강 연안의 서고트 족은 이베리아 반도에 서고트 왕국을 세웠고, 이베리아 반도로 몰려왔던 반달 족은 북아프리카로 건너갔으며, 흑해 연안의 동고트 족은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가 동고트 왕국을 건설하였다. 벨기에와 독일 북부에 살던 앵글 족과 색슨 족은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다. ‘앵글(Angle)’은 잉글랜드(England)의 어원이 되고 ‘색슨(Saxon)’은 독일 작센(Sachsen)의 어원이 되었다.
샤를마뉴의 후계자 루트비히 1세가 죽은 후 서로 다투던 세 아들은 843년 전쟁을 끝내고 베르됭 조약을 맺어 프랑크 왕국을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으로 분할하였다. 샤를마뉴의 손자이자 루트비히 1세의 셋째 아들인 루트비히 2세는 베르됭 조약 이후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오늘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루트비히 2세를 초대 군주로 여긴다.
중프랑크의 혈통이 끊기자 870년 메르센 조약에 따라 서프랑크와 동프랑크는 이탈리아 북부를 제외한 중프랑크의 영토를 동서로 분할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독일은 30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쳤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히틀러는 아리아 인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선민의식을 지닌 유대인을 인종주의 차원에서 말살한다는 게 주된 이유였지만 당시 유대인이 독일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의 선조인 히브리 족이 정통 아리아 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민족은 구분하고 차별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궁극에는 서로의 특성을 존중하며 함께 해야 하는 존재다. 고대 인류는 민족의식 없이 흩어지고 모이는 것을 반복해왔기 때문에 순수한 뿌리를 찾기도 어렵다. 민족이란 개념은 자연·인문 지리적 환경에 따른 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멜팅 팟(Melting Pot, 인종의 용광로)’ 미국이 이를 잘 보여준다. 또 민족 고유의 문화가 큰 그릇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나간다는 ‘샐러드 볼(Salad bowl) 이론’으로 미국문화를 설명하기도 한다. 결국 샐러드 볼도 오래되면 멜팅 팟에 가까워질 것이다.
919년 작센의 공작에서 독일의 국왕으로 추대된 하인리히 1세에게 오토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하는 등 로마 교황의 수호자를 자처하여 962년 교황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100여 년이 지나 왕위에 오른 하인리히 4세가 1077년 교황과의 권력 싸움에서 굴복한 ‘카노사의 굴욕’을 겪은 뒤로 황제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예루살렘을 정복한 프리드리히 2세가 1250년에 사망하면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사실상 단절되었다. 이후 독일은 오랫동안 실질적인 지배자가 존재하지 않는 대공위 시대를 맞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직후인 1273년에서야 프랑크푸르트 선제회의(選帝會議)와 교황의 승인을 받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백작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1517년에는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궁정교회의 정문에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논박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어 종교 개혁을 촉발시켰다. 이후 신교와 구교로 갈라진 유럽은 독일을 무대로 30년 전쟁(1618~1648)을 벌였다. 1648년이 되어서야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막을 내렸고 독일 지역 내 영방(領邦) 군주들은 신앙의 자유와 주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여기서 독일 연방제가 시작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오스트리아로 축소되어 황제를 겸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패권적 지위는 약화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를 인정하려들지 않았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합스부르크가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와 7년 전쟁(1756~1763)을 벌여 슐레지엔 영유권을 확보했다.
1806년 나폴레옹의 후원으로 남서 독일 16개국이 라인 동맹을 맺자 허울뿐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는 압박을 받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 실패로 폐위된 1814년,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가 전후 처리를 위해 빈 회의를 주도했다. 회의 결과 구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빈 체제’가 등장했고, 과거의 신성 로마 제국 지역에 다시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철혈 정책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프로이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와 맞부딪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되었다.
1 사라예보 사건 당일 차에 오르는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이들은 5분 뒤 암살당했다. <출처: (CC) Karl Tröstl? @ wikimedia commons> 2 사라예보 사건 2주 뒤 프랑스 잡지에 실린 삽화. |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범슬라브주의 운동을 저지하고 영토 확장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합병하여 세르비아의 불만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1914년 6월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중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오스트리아는 사라예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어서 독일・러시아・영국・프랑스・터키 등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하고 프랑스 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하자, 영국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가 서부 전선에서 독일과 맞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서부 전선 전투를 배경으로 한 소설과 영화가 바로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이다.
1918년 독일이 서부 전선 총공세에 실패한 이후 내부의 킬 군항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독일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됐다. 1919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전승국들은 먼저 패전국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독일은 국외의 모든 식민지를 잃게 되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1929년 과잉 생산과 대규모 실업으로 대공황에 빠져든 미국의 은행들은 독일에 빌려주었던 차관을 한꺼번에 회수하였다. 이 여파로 독일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1932년 총선거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불평등성을 규탄한 히틀러의 나치스가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제1당이 되었다.
나치스 정권은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나치즘을 내세워 국민 경제와 일상생활을 통제했다. 또한 1차 세계 대전 패배로 실망감에 빠진 독일 국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인종주의에 근거하여 독일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유대인을 박해했다. 당시 3%의 유대인이 독일 경제의 40%를 차지하고 있었던 게 유대인 탄압의 실질적인 이유였다. 결국 문제는 경제였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나치당과 협상하여 오스트리아를 손쉽게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을 차지한 후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포문을 열었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폰 트랩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41년 ‘지구상의 모든 유대인을 없애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나체 상태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로 내몰렸다. 1945년 1월까지 나치스는 이곳에서 250만∼4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살해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65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어쩌면 경제적 이유로 나치스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독일인들도 공범자일 수 있다. 인간의 집단적 이기심이 맹목적 이데올로기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이 집단 이기심에 잠식당할 때 폭력은 알게 모르게 정당화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는 인간의 모순적인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밖에서는 살육이 벌어지고 있는데 독일군 장교는 태연하게 바흐의 [영국 모음곡] 제2번의 [전주곡]을 피아노로 연주한다. 일정한 음이 연속적으로 반복될 때마다 사람들은 죽어나간다. 감정의 개입을 차단한 멜로디는 오히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양한 감성의 변주를 끌어낸다.
1 나치스에 의해 수감된 수많은 유대인들을 구출해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 2 예루살렘에 자리한 쉰들러의 묘지. 그의 묘지를 방문한 많은 유대인들이 고인을 기리는 뜻으로 돌을 올려두었다. <출처: (CC) Yoninah @ wikimedia commons> |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오스카 쉰들러는 유태인과 이별하며 더 많은 유태인을 살려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그러자 유태인 회계사는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곧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존재하고 내가 사라짐으로써 세계도 사라질 것이다.
한편 쉰들러의 진짜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독일의 나치 대원이었던 슈워츠는 “쉰들러는 자신의 사업을 키우기 위해 나치 군인에게 뒷돈을 준 후 유대인을 공장으로 끌어들였다. ‘쉰들러 리스트’는 무임금으로 일한 유대인 노동자의 명단일 뿐이었다.”라고 주장했다. [쉰들러 리스트]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측의 한 관계자는 “의도야 어찌됐든 쉰들러 덕분에 일부 유대인들이 목숨을 구했다.”라며 슈워츠의 주장을 전적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쉰들러는 나치 협력 전력으로 전범 재판에 섰지만 유대인 노동자를 이용해 유리한 증언을 끌어내서 무죄로 풀려났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종전 이후에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대인을 주로 구출했다는 의혹도 있다.
일부 유럽인은 지금도 유대인이 천민 금융 경제를 추구한다는 부정적 인식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경제다. 상생의 경제가 아닌 일방적 경제 지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역사가 증언한다.
미국은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이 부강해지지 않으면 공산화될 수도 있다고 우려해 1947년 ‘마셜플랜(Marshall Plan)’이란 이름으로 독일에 경제 원조를 시작했다. 이는 ‘라인 강의 기적’을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60년대 들어 독일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터키를 비롯한 그리스,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로 부족한 노동력을 채웠다. 과거 독일에서 궂은일을 해내던 수백만의 터키인들이 이제는 독일인들에게 골칫덩어리로 취급받고 있다. 이에 신나치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에 우리 동포가 70만 명이나 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남의 나라 얘기 같지 않다.
독일과 한국은 역사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문헌상으로 독일이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진 것은 1614년(광해군 6년)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다. 이수광은 명 사신으로 다녀온 후 “독일인국은 백옥으로 성을 쌓는 나라다.”라는 짧은 기록을 남겼다. 30여 년 후 병자호란 때 청의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Adam Schall)과 교분을 맺기도 했다.
1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서 활약한 아담 샬. 소현 세자와 친교를 맺으며 학술과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전해주었다. 2 오페르트가 자신의 저서 [금단의 나라 조선]에서 묘사한 당시 한국인의 모습. |
미국은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를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였다. 1868년 오페르트는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유골을 미끼로 조선 정부와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자 충남 덕산에 있는 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오페르트는 지역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도굴에 실패하였다.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 때문에 조선에서는 서양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더욱 팽배해졌고,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조선은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1883년 영국, 독일과 잇달아 조약을 비준하였다. 1884년 인천에 독일 무역 상사 세창 양행(世昌洋行)이 설립되었는데, 이 무역 상사는 독일 상품을 조선에 판매하였고, 1885년에는 은화 10만 냥을 차관해 주기도 했다. 1886년 세창양행 대표인 볼터는 금성・당현의 광산 채굴권을 조선으로부터 허가받기도 했다.
1884년에 주한 독일 부영사에 부임한 부들러(Hermann Budler)는 청과 일본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조선이 독자적으로 영세 중립국을 선언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조선과 열강의 무관심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독일 여성 손탁(Antoniette Sontag)은 1902년 무렵 서울 정동에서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을 경영하였다. 1885년 주한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의 추천으로 궁궐에 들어가게 된 손탁은 명성 황후의 신임을 얻어 정계의 배후에서 활동하다가 1895년 정동에 있는 가옥을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아 2층의 손탁 호텔을 지었다. 을사조약 체결을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왔던 이토 히로부미가 이 호텔에 머물며 외교적 압박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독일이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루며 눈부시게 성장하던 1960년대다. 독일은 공장이 늘어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은 물론 터키・필리핀으로부터 근로자들을 불러들였다. 박정희 정부도 광부와 간호사들을 서독에 파견하였다. 그들의 임금을 담보로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파견 인력 격려차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는 “우리 후손만큼은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며 눈물의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외세와 한국과의 관계사를 보면 한 가지 관통하는 진실이 있다. 외국 나라들은 한국을 돕기 위해 한국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면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그들에게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이용할 것은 이용하는 입장을 취했어야 한다. 오히려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외세에 의탁한 점은 없었는지, 그래서 망국의 우를 범하지는 않았는지 되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벤츠, BMW, 아우디, 폭스바겐, 포르셰……. 모두 독일에서 만들어 낸 세계적인 명차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 산업을 이야기할 때 자동차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독일의 주요 산업은 자동차, 철강, 기계, 금속, 전기, 화학 공업인데, 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자동차다. 독일에서 만드는 자동차는 한 해 생산량의 60% 이상이 외국으로 수출된다. 독일이 세계 제일의 자동차 왕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독일은 북대서양 해류의 영향으로 따뜻한 편이지만, 일조량은 매우 적다. 땅도 비옥하지 않아서 농업 생산량이 낮은 편이다. 자원도 석탄을 제외하면 거의 없는 편이어서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척박한 자연환경과 부족한 자원 때문에 독일은 우수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제철이나 기계 제조업과 같은 중공업을 발전시켜 왔다. 여기에 독일 사람들 특유의 근면, 성실함과 완벽주의가 더해지면서 세계 제일의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의 최대 공업 지역은 라인·루르 지역인데, 여기에서 ‘라인 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루르 공업 지대의 대기 오염이 심각해졌고, 정부는 환경 보호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환경 보호와 원전 반대를 내세우는 녹색당이라는 정당까지 생겼다. 현재 가장 친환경적인 청정 에너지로 각광 받는 풍력 발전 기술은 독일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독일은 이런 자신감에 힘입어 앞으로 원자력 발전도 폐지하기로 했다.
독일 어디를 가도 풍력 발전기와 태양광 전지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독일은 신재생 에너지 방면에서 세계 최강국으로 통한다. 독일 전체 에너지 소비량 가운데 신재생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2009년에 이미 10%를 넘어섰다. 우리나라가 1.5% 정도인 것에 비하면 엄청난 양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신재생 에너지 산업이 세계 최고가 된 데에는 독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주효했지만, 친환경적인 요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독일 국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다. 독일은 이제 국가적 이기심에 눈먼 인종 청소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지구 청소(환경 보호)를 선도하고 있다.
바흐의 [영국 모음곡] 제2번의 [전주곡]을 다시 들어본다. 세상을 향한 무심한 진혼곡인지,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원천인지는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 변주될 것이다. 하지만 독일이든, 일본이든, 어떤 국가든 목표는 하나로 귀결된다. 인간이 경제적 동물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은 분명하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곧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 내 자신이 세계이니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곧 내 자신을 구하는 것이다. 참호 밖의 나비에게 내민 파울의 손끝에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