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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김규식(金奎植, 1881년∼1950년) 독립운동가
구미위원부 활동 내내 미국의 정객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 하원에도 한국독립문제를 청원,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고조된 분위기를 활용하여 한국독립문제가 미국하원에서 상정 토의되도록 하였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미국과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윤치호, 조병옥 등과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윤치호와는 주로 국내외의 정세와 임시정부의 동정을 서로 서신과 연락으로 주고받았다. 그러나 윤치호는 이들의 행적을 수시로 접하면서도 조선총독부나 일본 제국 정부 당국에 이를 발설하지는 않았다.
계속된 두통으로 1919년 말 김규식은 미국체류 중 두골 전면 좌측부분을 절개하는 수술을 했다. 1919년 말 뇌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부작용으로 그 뒤로 간질병이 나타나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병원비는 이승만이 부담하였다. 그러나 구미위원부 활동 내내 그는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고, 상하이에서는 이승만이 그의 속을 썩여서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이는 그의 부인 김순애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가라앉게 되었다. 이후 중국 상하이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일을 하다가 1920년 상하이에 귀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다. 중국에 도착한 후 김규식은 임시정부의 정무활동과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4월 25일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1919년초 그는 김구 등과 국내에 연락, 고종의 서자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의친왕의 탈출 사업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9년 봄 영친왕(英親王)의 왕비로 간택되었다가 파혼당한 민갑완(閔甲完)의 일족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오자, 김규식은 민갑완 일족을 맞이한 후 이들의 생활비를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김규식은 상하이 현지에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의 간부를 설득하여 민갑완을 입학시켜 공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민갑완은 신학문 공부에 한창 재미 들일 무렵, 일본영사의 압력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김규식은 민갑완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민갑완은 '나 하나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이라며 그의 권고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진료 후에도 통증이 계속되어 다시 수술하러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상하이에 체류 중 갑자기 심한 두통과 원인을 알수 없는 전신 통증으로 고생하였다. 1920년 김규식은 신경통으로 오래 고생하던 끝에 뇌종양 의심을 받아 미국 월터리드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장기간 휴식을 처방하였으나, 그는 퇴원 3주 후에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육로로 미국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교민들을 찾아다니며 '독립공채'를 판매하였다. 3주 만에 약 5만 2천 달러의 자금을 마련, 상하이로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장이던 이시영(李始榮)에게 송금하였다. 그가 두뇌에 혹이 생긴 것과 두뇌수술을 한 것에 대해 이승만 때문이라는 소문이 상하이에 돌았다. 미국에서 김규식이 이승만에 의해 심한 스트레스와 심리적 고통을 받아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후일 김순애나 서병호는 회고담에서 김규식이 파리 체류 중 생긴 것이며 상해 인사들의 말은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라 하였다.
1919년 9월부터 1920년 9월 미국 서부지구를 왕래하며 워싱턴 위원부와 국민회의가 협력하는데 기여하였다. 1920년 10월 미국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호주에 도착했다. 호주로 건너가 호주의 정치인들을 만났고, 10월 3일에는 호주 수상 월리엄 휴그(William Hughes)를 만나 한국의 독립을 후원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12월 22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경유, 노백린을 만나 선박 난징 호(南京號)를 타고 상하이로 건너갔고 이는 일본밀정의 첩보망에 입수되기도 했다.
1921년 1월 상하이로 돌아와 임정에 합류하였다. 이때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대통령 이승만과 전 국무총리 이동휘간의 알력으로 이동휘가 총리직을 사퇴하면서 발생한 내분 문제가 닥쳤다. 그는 문제 해결의 시일을 최대한 미루며 내분 수습을 위한 중재안 마련을 고심하였다.
1921년 2월 10일 김규식은 신규식, 안창호와 함께 임시정부 기초 변경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고 2월 21일에는 신규식, 노백린, 신익희, 안창호 등과 함께 외교위원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다. 이때 대통령 이승만의 성토 문제가 나타났다. 이때 그는 말썽많은 대통령제 대신 한성 임시정부의 원래의 직제인 집정관 총재직으로 개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상하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계속되자 상하이에 와 있던 이승만도 대통령직에서 사퇴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밝힘에 따라 그를 설득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조건을 거부하였고 자신이 워싱턴에서 김규식을 구미위원부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등용한 사실과 수술 등의 곤란한 일을 겪으면서 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는데 이제와서 자신과 정적들 사이에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구미위원장을 임명해놓고도 이승만은 그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측근인 구미위원부 위원의 한사람인 임병직과 상의하는 등의 문제를 야기했다. 내분 수습책은 실패하게 된다.
21년 4월 26일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1921년 4월 신익희, 이유필, 조동호 등과 중국의 독립운동가 심합작, 오산, 주검추 등과 한중호조사에 참여하였다. 4월 29일에는 임정 학무총장직과 의정원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그해부터 임정의 창조, 개조 등을 놓고 논란이 발생하자 그는 창조파에 가담하였다.
9월 한중호조사의 한국인측 평의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임정의 해체를 주장하는 창조파의 영수가 되어 소련에 들어가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사이의 갈등과 내분이 심화되자 그는 독립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교육 활동에 투신하려 했다. 그러나 1921년 1월 초 국민대표자회의에서 그를 모스크바에서 열릴 동방피압박민족대회의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선출하였다.
1921년 김규식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2년 5월은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기 위한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회 주비위원에 피선되었다. 1921년 11월부터 여운형, 나용균, 박헌영, 원세훈 등과 함께 장가구에서 자동차편으로 출발,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한파가 닥치지 않아 8일만에 차량으로 몽골 고륜(울란바토르)에 도착, 양털가죽과 낙타 가죽 장화, 모피 등을 구비, 6일만에 마차로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의 수도 우딘스크에 도착했다가 다시 3일만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12월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정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이들 독립군은 그해 6월에 자유시 참변 당시 생포된 독립군들과 백러시아군에 가담해서 활동하던 조선인 등으로, 이들에게는 유형과 징역 등의 처분이 내려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르쿠츠크 체류 중, 이르쿠츠크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리니 모스크바로 가라는 소식이 통지되었다.
1922년 1월 김규식은 여운형, 원세훈, 박헌영 등과 함께 교통편을 이용하여 몽골을 지나 소련 모스크바로 갔다. 열차편으로 중국 국경지대에 도착한 뒤, 몽골에 가서는 말과 낙타로 소련의 국경지대로 이동했다. 이때 털로 된 가죽모피와 통조림 형태의 고기로 추위를 견뎠다. 소비에트 연방에 도착한 뒤 김규식과 일행은 열차편을 이용했다. 소련의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노력자대회에 참석했다.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무렵 그는 공산당 후보당원에 명단이 올라 있었다.
인민대표자 대회 회의장에서 그는 여운형 등과 함께 참석하여 한국인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선출됐고, 이어 인민대표자 대회의 5인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개회사를 발표하였다. 대회에서 발표에 참가하였고 그는 ‘아시아 혁명운동과 제국주의’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우리는 원동(遠東)에서의 혁명 과업과 관련하여 왕왕 ‘연합전선’과 ‘협동’의 필요성을 운위(云謂)합니다. 최근에 우리는 이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서구라파와 미국의 자본주의 열강이 동아시아 전체를 공동으로 착취하기 위해 서로 어떻게 결탁하였는지를 목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국의 ‘이타주의(利他主義)’ 지향성과 ‘민주주의’ 원칙의 범세계적 적용을 그토록 떠들어온 미 공화국조차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졌습니다.”
논문에서 그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은 극동아시아의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중국, 일본의 누가 관련되어 있건 간에 한국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극동아시아 전체상황은 혼란 속에 있을 것이다.’ 등 극동아시아의 제국주의 침략에서의 해방에 대한 지원을 촉구할 것과 “악명 높은 흡혈국가로-영국, 프랑스, 일본” 등을 지목하며 규탄하기도 하였다. 극동 노력자 대회가 끝난 후에는 레닌을 만나 면담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의 침략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논문인 '아시아의 혁명운동과 제국주의'를 영어로 써서 '한·중 양국 인민이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의 반응도 미온적이었고 강대국의 힘을 인정하고 그힘을 이용하려 했던 김규식의 실망은 우리손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바꾸게 되었으며, 그는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로 나뉘었을 때는 신채호, 서병호, 신숙, 윤해(尹海), 원세훈 등과 더불어 임정을 해산하고 재창조하자는 ‘창조파(創造派)’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창조파의 영수로 추대되기도 했다. 1923년 창조파에서는 임시정부 해산을 주장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임시정부를 세우고 그를 수반으로 하여 소련의 레닌에게 보고하였으나 승인거절당하였고, 6월 6일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 김구(金九)는 국민대표회의의 강제해산을 명한뒤 개조파와 창조파를 추방하고 만다.
개조파와 창조파가 축출되면서 상하이를 떠났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자국의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모교인 미국 로노크 대학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LL.D. Doctor of Law) 학위를 수여받았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1924년 김구, 김창숙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상하이로 귀환한 1920년 2월 이후 김규식은 서병호와 함께 어학원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 어학원 설립 계획은 상하이에 오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영어 등을 가르칠 계획이었다. 김규식은 서병호와 몇몇 중국인 자선사업가들과 함께 500원씩 투자하였다. 이 계획은 1921년부터 그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대회에 다녀오느라 상하이를 떠나야 했으므로 일시 중단되었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상해 월리엄즈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고 윌리엄즈대학 학장에 선임되어 학장 겸 교수가 되었으며 나중에 월리엄즈 대학이 4년제로 승격하면서 동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다. 대학 출강 활동과 함께 김규식은 여러 활동을 동시에 병행하였는데, 1923년 서병호(徐丙浩) 등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 남화학원(南華學院) 설립을 추진하였다. 1919년 이후로 중국으로 유학오는 한국인 학생들이 급격히 늘어났지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는 것을 목격하고 교육기관 설치를 고심하던 김규식은 중국인 유지 및 서병호 등과 함께 중국학생과 한국학생을 대상으로 중학예과 2년제, 고등과 4년제, 특별상과 2년제, 대학 각과 4년제의 대규모 학교설립을 계획하여 1923년 9월 11일 중학과와 특별상과를 우선 개교하였다. 개교후 남화학원 교장에 취임하고, 중국어교사 이외에는 전 교수용어를 영어로 사용하게 하여 영어전문학교 성격을 띄게 하였다. 구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중국인을 교사로 채용, 한국인 학생에게는 한국학생특별학급을 설치, 중국어와 영어의 집중적 교육을 실시하려고 하였다.
1923년 푸단 대학 상하이 캠퍼스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푸단 대학은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나 영국 조계지가 아닌 시내에 있었다. 그가 푸단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가르친다는 사실이 일본 상하이 영사관 경찰에 제보되면서 상하이 시내에서 일본 경찰을 만나 간신히 벗어난 일도 있었다. 여러 번 쫓겨다니면서 그는 변장, 김성(金成), 김중문, 여일민, 왕개석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중국인으로 행세하면서 일본의 의심으로부터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위 질환이 있었고, 위통증 외에도 1920년 미국에서 한 뇌수술의 후유증으로 강의 도중 기절, 실신하기도 했다. 이 후유증은 1940년경 쓰촨 성에서 진통제와 약물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그를 수시로 괴롭혔다.
1924년 6월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중국에 유학 온 한국 학생을 위한 강습소(예비학교) 설립을 주관하였고, 1924년 9월 15일에는 최창식과 함께 상해고등보수학원을 개설하고 자신은 원장, 최창식은 원감에 취임하고, 여운형 등 강사들을 초빙하였다.
1924년 상해고등보수학원을 승격시켜 삼일중학교(三一中學敎)로 개편하고 원장에 취임하였다. 삼일중학교는 1932년까지 존속되었다. 삼일학교에서 원장이자 영어교사를 겸하던 김규식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의열단 단원들에게 영어와 한자를 가르쳤다. 1924년 8월 김규식은 상하이항에서 원세훈 등과 함께 조선인이 운영하는 선박을 타고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1925년 1월 1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 있는 문창범(文昌範)의 집에서 이청천, 윤해, 신숙 등을 만났다.
1925년 1월 니콜리스크에서 문창범·윤해·신숙 등과 회담, 소련의 지원을 얻는 문제에 대한 협의도 하였으나, 소련은 카라한(Lev. M. Karakhan) 외무상을 일본 외무상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에게 보내 일본과 밀약을 맺고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 체포할 것을 협약하여 소련공산당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했는데, 원세훈, 조완구 등이 포함돼 있었다. 김규식도 이때 소련정부로부터 강제로 축출되었다. 소련에서의 축출 이후, 김규식은 실망감과 함께 미국·프랑스·소련을 비롯한 외세를 불신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도진순에 의하면 그의 외세에 대한 입장은 전반적으로 시시비비주의에 입각한 가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였다.
2월초 일시적으로 승선하여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2월 7일 상하이의 삼일당에서 열린 '한인 유학생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주요한의 웅변에 이어 그는 '한국과 동아의 관계'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1925년 2월 8일과 2월 9일 2월 10일 3회에 걸쳐서 '반성과 단결의 필요'라는 주제로 칼럼을 발표하였다. 한편 그가 보습학원을 설치하고 독립운동가들을 가르친다는 정보가 1925년 5월 일본인 밀정에 의해 입수되어 조선총독부에 보고되기도 했다. 5월 29일 상하이 주일본 총영사 명의로 발송된 이 문건은 6월 15일부로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되었다.
3월 초 다시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러시아 니콜라스크에 도착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소련은 1925년 11월 외무상 카라한(Lev. M. Karakhan)을 일본 외무상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에게 보내 일본과 밀약을 맺고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 체포할 것을 협약하였다. 11월 원세훈, 조완구 등 독립지사들과 함께 선박 레닌 호에 강제로 승선당한 뒤 상하이로 추방되어 되돌아왔다. 소련이 일본과 비밀리에 거래한 것을 알고 분개한 그는 국제정세에 대한 이상주의를 버리고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원세훈의 약혼녀는 모스크바에 남겨두고 원세훈만 강제 추방당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1926년 최창식(崔昌植)·김기형(金基瀅) 등과 함께 상해 천상리(天祥里)에 삼일공학(三一公學)의 설립에 가담하였다. 한편으로는 1926년부터 1927년에 열린 민족유일당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 5월 임시의정원에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김규식은 기호파는 아니었으나 기호파와 함께 연대하여 안창호의 취임을 반대했다.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 지 13일 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26년 10월 김원봉, 의열단원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927년 2월 난징에서 유자명·이광제(李光濟)·안재환(安載煥), 중국인 무광루(睦光錄), 인도인 간다싱·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유자명은 중국 국민당 중앙본부와 협의하여 적극 후원을 약속받은 뒤 그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였다. 1927년 텐진(天津)으로 옮겨가 북양대학(北洋大學)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어, 1929년까지 교수생활로 자녀와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교수 생활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계가 있었고, 이것조차 일본영사관 경찰의 눈을 피해다니느라 일정하지도 못하여 생계는 어려웠다. 1927년에는 둘째 딸 민애를, 1930년에는 큰딸 한애를 병으로 잃었다.
1930년 8월 4일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임시정부에 다시 입각, 동 4일 임정 국무위원 겸 학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930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만주 사변'이 폭발하자 김규식은 '중한 민중 대동맹'의 수석 전권을 위임받아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이것은 민간 외교 사절을 파견 하여 미국 정계와 일반 국민의 만주 사변과 일제의 침략상에 대한 공분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것으로 선전 강연과 동시에 기부금 모집에 노력 하였다. 1932년 1월 귀국한다. 한편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다시 임시정부로 돌아가게 되어 국무위원을 1935년 10월까지 역임하게 된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와 4월 상해 윤봉길 의거 직후, 김원봉이 '남경중앙정치학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자 김규식은 '남경중앙정치학원' 한인특별반의 군사교관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지명수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대학 교수라는 신분 때문에 체포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다. 또한 의정원 활동 보다는 재야에서 민족유일당 운동과 교육 활동에 더욱 치중하였으므로 동료들로부터 비협력자, 부도원의원 등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의 송병조·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32년 겨울 '중·한 민중대동맹', 대일전선통일연맹, 한국광복동지회 등의 단체를 결성, 조직하였으며 이후 항일독립을 위해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다. 특히 '중·한 민중대동맹'(SKPL)은 지하조직으로, 미국에까지 지부를 두고, 워싱턴지부 책임자로는 재미교포 한길수를 임명했다.
그해 10월 12일 상해 민국로 동방여사에서 한독당의 이유필, 송병조, 김두봉,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의 한일래, 박건웅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 창당회담을 가졌다.
1933년 '남경중앙정치학원' 영어교관이 되었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 1933년 4월 5일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500여명이 모인 구류노류 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독립에 관한 연설로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것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여 미국인을 탄복케 하였다 한다. 그해 6월 21일 임시정부 외무부장 신익희의 사퇴로 후임 외무부장이 되었다. 1933년 7월 중한민중대동맹 대표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7월 21일 하와이 한인 교포에게 서한을 보냈다. 김규식이 중국으로 떠난 뒤 본 동맹의 비밀요원인 리·한(이용직과 한길수)을 개인적으로 미주 대표로 임명하여 본 동맹과 정보교신을 담당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민당 정권은 김규식과 김구, 조소앙,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각자 의견의 대립과 김구의 임정 법통 고집 등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4년 1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개보선에서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재선출되었다. 1934년 최동오, 김두봉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단결과 규합을 부르짖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 발기하였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여일민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였으나 그 정체가 탄로나 1935년 일본의 추격을 받게 되자, 난징 중앙정치학교에서는 비교적 안전한 쓰촨 성 성도(成都)에 있는 쓰촨 대학 교수 자리를 추천해 주었다. 1935년 중앙정치학교 영어강사직을 사퇴하였고, 이후 쓰촨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1935년 11월 일시적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고, 1940년까지 임정을 떠나 있었다. 임정에 몸담고 있으면서 임정 요인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가해질 때, 김규식은 대학 교수의 신분으로 이 위기를 모면하곤 하였다. 그것이 청·장년층의 일부 임시정부 고수파로부터는 비협조자로 몰려 비판받기도 하였다. 쓰촨 성으로 피신했다가 1935년 2월 6일 재미국민총회 위임대표 자격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 제3차 회의에 참석했다. 1935년 6월 난징으로 돌아와 지청천 등 민족정당 지도자를 소집하였고 7월 5일 통합 민족혁명당을 재창당, 조직하여 그 주석에 선출되었다.
1935년 7월 5일 민족혁명당이 발족되고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자 그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국민부 부장에 선출됐다. 그 뒤 민족혁명당 중앙상무위원 겸 훈련부장에 선출되었으나 1935년 10월 민족혁명당 훈련부장직을 사퇴했다. 김원봉은 그에게 당수직을 양보했고, 당내 무력을 장악한 실권자이면서도 반드시 그의 자문을 구하였다. 10월 임정 국무위원 임기가 만료되자 바로 민족혁명당 주석에 취임하였다.
의열단, 사회주의자, 김원봉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하여 이승만과 그의 추종세력들은 그를 사회주의자, 과격파로 몰고 가기도 했다. 동시에 쓰촨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있었고 1942년까지 쓰촨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또한 쓰촨 대학의 문학부 외국어학과장, 외국문학과장 등을 지냈고, 동시에 교재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때의 김규식은 아호인 우사를 이름으로 써서 '김우사'(金尤史)로 활동하였다. 중국에서 대학교수와 교육자로 활동하며 김규식은 월급의 전부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했고, 부인 김순애는 삯바느질 등으로 식구들의 살림을 꾸려야 했다.
1938년 쓰촨 성에 도착한다.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쓰촨 성에 도착한 뒤 진통제와 페니실린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뒤 국민당 정부에서는 김규식, 김구, 김원봉에게 합작하라며 합작을 권고하였고 그는 합작을 결정한다. 김원봉의 반대와 김성숙의 입각 설득 등 내홍이 있었으나 임시정부 입각이 결정되었다.
1943년 5월 중경에서 열린 '재중 한인대회'에서. 사진 왼 쪽이 우사 김규식. 그 옆에 안경을 쓴 사람이 윤기섭
1939년 임시정부에 재입각을 결정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1940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확장으로 김구 등과 협의하였으나 의견 차이로 유일당은 실패하고 대신 항일 공동연합전선 설립을 결정하여 임시정부에 다시 입각, 1940년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이 되고, 194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의정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42년 10월 2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에 선출되었다. 1942년 10월 11일 손과(孫科)·김구·김원봉 등과 중경에서 400명을 이끌고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를 조직하였으며, 문화와 혁명사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1943년 1월 사천대학 영문학 교수직을 사퇴했다.
1943년 민족혁명당 주석에 재선출되었다. 7월 26일 미국방송에 출연, 재미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방송에 출연했다. 방송에서 그는 7월 26일 김구, 조소앙, 이청천, 김약산, 김규식 등이 중국 국민당 총통 장개석과 가진 인터뷰의 결과 및 그에 대한 대책, 조선민족혁명당 LA 총지부와 하와이 총지부의 집행위원 임명 및 집행권의 소재를 밝히는 것, 조선민족 전선연맹의 해산을 공개적으로 언명하고 있다. 항일운동 중 사망한 석정김창화문명철의 업적을 기리며, 하와이 한인대표 황사용 목사의 중경 입국문제 등을 언급하였다.
1944년 충칭에서 실용영문작법(Hints on English Composition Writing)을 출간하였다. 1943년 3월 12일 김규식은 미주에 있는 동포들에게 중국 국제 방송 을 통하여 영문으로 임시정부의 활동과 광복군의 활동상을 소개하는 방송을 하였고, 1943년 10월 6일자로 신문 독립 지에 이를 한글로 번역 게재하였다. 1943년 8월 5일과 8월 24일에는 미국·하와이·쿠바·멕시코·기타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동지와 미국인 친구들 을 향해서 "조선 민족 혁명당의 전후 계획"을 발표하였다.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부주석직이 한국독립당의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한데 대하여 원내 두 번째로 다수당의 당수인 그가 부주석으로 안배되었다. 부주석 취임 이후 그는 국민당정부와 협의하며 임시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또한 부주석의 지위 역시 국무위원 선출권한이 없는 '투표권도 없는 투명치 않은 자리'로서 선전·외교문제에 치중하였다.
그는 종종 영어와 불어 등으로 자신의 동창, 지인들과 편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국내외와 중국에 파견된 일본 경찰들 중 영어를 해석하지 못하는 형사들이 많았으므로 중간에 유실되지 않고 전달될 수 있었다. 8월 11일 로노크 대학 동창인 알렌 그린랜드(J. Allen Greenland)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그는 '나는 지금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있지만 이 자리는 투표권도 없는 투명치 않은 자리이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선전사업과 임정 내부 문제에 주력하고 있고 늘 군사, 외교, 기타 사업의 계획을 세우는 데 주력하고 있소'라고 했다.
1944년 6월 1일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측의 오철성(吳鐵成) 등과 한국 측의 엄항섭(嚴恒燮)·안원생(安原生) 등을 설득, 기독교 한교복리회(基督敎韓僑福利會)를 조직하였다. 기독교 한교복리회는 한교의 생활증진과 독립운동의 진행을 촉진함에 기여하였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과 외무부장 조소앙·정환범(鄭桓範)·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파견하려고 국민당 정권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 당하였다. 1945년 5월 25일 임정 김규식 부주석이 중국<大公報> 기자에게 얄타밀약이 허위임을 답변 함. 1945년 충칭에서 실용영문(Practical English)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대학생용으로 300여 페이지였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외무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규식은 인공 내각 외무부장 취임을 거절하였다. 8월말 광복과 2차 대전 전승을 기념하여 시집 《양자유경 (양자강의 유혹)》을 내다.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때 그는 민족혁명당의 대표이자 임시정부 부주석 자격으로 김구 등과 함께 임정 1진으로 귀국하였다. 임정 귀국을 놓고도 먼저 귀국해야 한다는 한국독립당계와 민족혁명당계 간에 싸움이 발생했다. 그러나 김원봉의 양보, 혹은 당수인 김규식을 귀국 제1진에 넣는 조건으로 귀국문제가 종결되었다. 11월 23일 군산비행장에 착륙하여 차로 서울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국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고, 김규식은 한탄하였다.
“우리가 피흘려 싸운 것이 고작 이런 대가 밖에 없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진정한 민족의 광복은 해방,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본래 하나였던 우리 한민족이 불편 없이 통일되어 교류하고 상호 신뢰와 보완성을 유지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다른 민족이 우리 민족을 일러 단일 민족이니 우수한 민족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우리의 단결된 완전 독립국가 달성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때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우리 이천만 동포는 애 일같이 주인 정신을 살려 단합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다.”
1945년 9월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창설된 한국민주당에서는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 지도자를 당의 영수로 추대했다. 그러나 한민당에서는 김규식을 우익성향이 아닌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한민당의 영수 추대에서 제외되었다. 9월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미국에 파견, 전후 대책과 함께 이승만과 다른 교민지도자들과 연대함과 동시에 미국 정부의 의중을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출국 직전 중국 정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아 출국이 무산되었다.
11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을 방문, 임시정부 환송 송별회에 참석하였다. 국민당 관계자들과의 만찬 시 김규식은 승전축하 시를 한수 지어 헌정했다.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는 문제로 한독당계와 민혁당계 간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임정 요인 제1진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한독당계와 민혁당계 간 귀국순서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자 민혁당의 서기장이었던 김원봉은 한독당계에 1진을 양보했고, 민혁당계는 한독당에 양보하는 조건으로 부주석이자 민혁당 위원장인 김규식도 귀국 1진에 포함하라고 요구했다.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김구, 장준하, 안미생 등과 비행기를 타고 경기도 김포 비행장에 귀국했다. 11월 귀국 직후 김규식은 윤치호를 방문했다. 이후 여러 번 윤치호를 방문했으나 윤치호는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는 않았다.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두 번째가 김규식, 좌측은 김구)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귀국하였지만 그는 임시정부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거나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귀국 초,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이 그에게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내가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를 묻지 말고 내가 앓고 있지 않는 병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하였다. 1945년 11월 28일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 환영회에 이승만, 김구와 함께 참석하였다.
“카이로 회담에 "적당한 시기에 조선독립을 준다"고 한 '적당한 시기'란 우리가 늦출 수도 있는 것이고 빠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손에 달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만 하면 미군과 소련군이 내일이라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못 보내고 있는 것은 우리 조선사람 전체의 책임인 것입니다.”
11월 귀국 후 그는 서울의 삼청장(三淸莊)에 여정을 풀었다. 귀국 초기 새문안교회를 찾아 새문안교회 인사들과 면담하였으며, 김구와 함께 의친왕을 방문, 면담하기도 했다. 중도파 혹은 온건우파 성향 때문에 좌익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그는 김구, 이승만, 권동진, 오세창 등이 한민당의 영수로 추대되었을 때 배제되었다. 그러나 귀국 후 한민당으로부터도 꾸준한 교섭 제의를 받게 되었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그는 군정청 최고지도자 존 하지와 친밀하였으나, 이승만과 김구는 하지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1일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일시에 열고 임정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
삼청장에 기거하며 이시영, 조소앙, 류동렬 등과 함께 경교장을 수시로 방문하였다. 귀국 직후 인사차 임정을 방문한 여운형을 만났으나, 뒤이어 여운형이 경비원에게 끌려가 몸수색을 당하고 다시 들여보내지는 것을 목격했으나 이를 말리지 않았다.
1945년 12월 1일 돈암장의 이승만으로부터 초대받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 12월 9일 윤치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12월 경교장 임정 요인을 찾아온 청년 중 윤판석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그러자 김규식은 "일본 놈한테 배웠구먼, 왜놈들한테 배웠다...여보게 청년들 그런 짓은 하지 말게." 하며 만류하였다.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부총재에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