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5월10일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제1독서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고, 회당에서 토론을 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1-8
복음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6-20
◈ [서울] 부활 제6주간 목요일
2018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요한 16,16-20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 중에 ‘이미와 아직’이 있었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뜻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셨고,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새로운 권위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로부터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런
죄가 없던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도록 하였습니다. 사랑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번이나 넘어지셨고, 죽으셨습니다. 이런 시간들 속에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며 아지 완성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드러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박해와 순교로 복음을 증거한 성인들이
천국의 별이 되어서 교회를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도 있고, 여전히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방송은 예수님을 배반한 종교인들에 대해서 보도를 합니다. 교회와
사찰이 세상의 기준이 되고 세상을 이끌어야 하는데 세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직 하느님 나라는
완성되지 못하였습니다. 헌신, 희생, 나눔, 봉사는 교회가 가졌던
소중한 보물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경쟁, 성과, 업적, 재물이라는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어느덧 대접받는 것에 익숙한
종교인들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망각하곤 합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와 함께 하지 못하고 아직 완성되지 못한 하느님
나라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있는 우리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여러분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근심하겠지만 여러분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있는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하느님 자녀의 기쁨/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하느님 자녀의 기쁨
복음: 요한 16,16-20: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6절)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당신께서 “잡히시던 날 밤”(1코린 11,23) 하셨다. ‘조금 있으면’,
즉 그날 밤 그분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셨고, 다음 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십자가에서 내려진 다음 무덤에 모셔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그들은 다시
그분을 보게 될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시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사십 일 동안 부활에 대한 많은
증거를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17절)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이다.
그분의 죽음은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
위로의 말씀은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19절)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돌아오시리라는 것, 당신이 그들을 떠나는 것은 잠시 뿐이며 영원히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을 알려 주신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시며
어둠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당신 성전을 다시 세우실
것이다.(요한 2,19 참조)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주님을 사랑한 이들은 주님께서 잡혀 결박당한 채 최고 의회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고, 채찍질을 당하고,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리시고 묻히시는 것을 보고
울며 애통해 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한 자들은 보기만 해도
거슬리던 자가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해지자 기뻐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죽음에 처해졌을 때는 슬퍼했지만 주님의 부활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코헬 3,4)라고 하였다. 울 때란
고통의 때이다. “울며 애통해 할”(20절) 때인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때에는 웃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적으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슬퍼했으나 세상은 기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을 때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으나 세상을 사랑한 이들에게는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함께 기뻐한다면 세상과 함께
슬퍼하게 되겠지만, 세상이 즐거워할 때 슬퍼한다면 나중에 세상이
슬퍼할 때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이 기쁨은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뜻이 죽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낸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기쁨이다. 즉 자기 자신을 죽인 후에 얻는 기쁨이므로 부활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기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의 옷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이 옷을 입지 못한다면 어떻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우선 기쁨을 가져야 기쁨을 행복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얻은 기쁨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세상이 변하면 쉽게 변할 수 있으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그분이 변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그 어떤 세상의 힘도 빼앗을 수
없다. 그분은 완전하신 분으로서 그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며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기쁨도 완전한 기쁨이 되어 없어지지 않는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되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기타] 궁하면 통한다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5월10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궁하면 통한다.
오늘은 “궁하면 통한다”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 말씀에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는 어느 날 예수님이 자신이 살고 있는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 싶었습니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참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키가 너무 작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지요. 마침 길가에
있던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다행히 나무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이 나무 아래로 지나가시게
되었는데 바로 이 순간 예수님께서 가시 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고개를 드시며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날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지요. 완전히 새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막막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포기하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지 않습니까?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다 막혀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께
간절히 바라고 구하면 통하는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 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넘어야 할 산이 많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요한16,16-20)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합니다. 평생 이별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한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이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사랑의 관계가 참되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잠시잠깐의 만남을 기뻐하고 어떤 이는 좀 더 오랜 만남을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기왕이면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슴에 남는
만남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16. 20). 하고
말씀하시며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됨을 제자들에게
거듭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은
십자가에 무참하게 처형된 예수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겪은 후에야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면,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고...나를 ‘보게’ 될 것이다” 앞의 보다는 ‘테오레오’라는
단어로 구경거리를 보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뒤의 보다는
‘호라오’라는 단어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본다는 이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시선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인 것처럼 생각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다음에 수용하겠다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먼저
가슴으로 따르고 비로소 논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알아듣지
못해도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그때 아는 것은 이미 있었던 진리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까지 제자들은 함께
해산의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그러므로 스승과의 깊은 신뢰를 쌓고 스승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스승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참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승은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어서 스승입니다. 지금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여기서 기쁨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매 순간 그분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주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제자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여정도 한결같이 좋기만 할
수도 없고 한결같이 힘들고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기쁨을 희망하는
만큼 아픔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웃으시는 예수님
2018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웃으시는 예수님
어떤 분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봤습니다.
“복음서 그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웃으시는 장면을 발견할 수 없다.
그분은 존재 자체로 거룩한 분이셨으며, 인류 구원이란 막중한 사명에
대한 큰 부담으로 인해, 언제나 진지하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사가들이 굳이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지, 예수님은 탁월한 유머감각의 소유자로서,
얼굴 가득, 충만한 미소와 함께 지상생활을 영위하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 완강히 거부하시고 혐오하셨던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특징들이 완고함, 경직성, 형식주의, 겉치레, 자기 과시, 개폼
등등이었습니다. 당대 이런 성향의 대표격 인물들이 율법학자들이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늘 경건했고, 엄숙했으며,
굳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늘 가까이 하시고 선호하셨던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특징들은 한없는 부드러움, 자연스러움, 유연성, 소박함,
단순함, 겸손함 등등이었습니다. 이런 성향의 대표격 인물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요 성모님,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어린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언제나 천진난만했으며, 밝은
미소로 충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여러 가지 모습 중에서, 제
개인적으로 가장 각별하게 다가오는 모습은 철저하게도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그분의 지상생활은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지상생활은 인간미가 철철 넘쳐흐러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분은
너무나 정겹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음직스런 음식을 눈앞에 두고 절대로 체면 차리지
않으셨다. 잔치 집에 가시면 포도주도 한잔 드시고 흥얼거리시면서,
잔치분위기에 어울릴 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과 한 마음이 되어 축제를 즐기셨습니다. 초상집에 가셔서는
복받치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펑펑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너무도 잘 어울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그분임을 확인한
어린아이들은 멀리서부터 달려와 그분을 껴안았습니다. 그분 품에
안겨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지상
생활은 당신께서 극진히 사랑하셨던 양떼들과 함께, 기쁨 속에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던 축제의 나날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 지상 생활이 너무나 힘겨운 나머지, 울며
애통해하고 있는 우리의 등을 가만히 두드리시며, 이런 위로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복음 16장 20절)
다시 한번 일생에 도움 안되는 근심을 떨쳐버려야겠습니다. 지니고
있어봐야 거추장스럽기만 한 걱정거리들을 어떻게 해서든
몰아내야겠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분노로 가득한 내면도
말끔히 정리해야겠습니다. 그래야 그 빈공간에 주님의 성령께서
찾아오시고, 그 모든 근심은 충만한 기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주님의 현존, 성령의 인도, 성모님의 동반으로
인한 기쁨으로 충만합니까? 오늘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의 얼굴은
예수님의 얼굴처럼 환한 미소로 가득합니까? 오늘 우리의 얼굴에서는
따뜻한 인간미가 넘쳐흐르고 있습니까?(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 20)
가장 먼저 우리자신을 아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근심도 기쁨도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들어앉은 근심을 봉헌합니다.
우리의 근심또한 주님께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근심을 기쁨으로 다스려주시는 우리의 주님을 믿게됩니다.
우리의 근심을 아시는 주님께서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근심보다 더 큰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기쁨은 주님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믿음에 있습니다.
고여있는 믿음이 아니라 끝없이 정화되는 믿음입니다.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들어오시는 기쁨을 믿습니다.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시작할 모든 기쁨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뜻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믿음에서 벗어나길 기도드립니다.
근심을 녹여줄 기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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