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6월7일 [(녹)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제1독서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2,8-15
복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 [서울] 연중 제9주간 목요일
2018년 나해 6월7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내일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며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고, 사제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사제 성화의 날을 맞이하면서 사제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였습니다.
첫째, 사제들의 가난에 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파라오처럼 살면서 가난과 청빈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입으로 가난을 말하면서 사치의 삶을 사는 것은 위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자산을 마치 개인 것인 양 투명하지 않게
사용하는 것은 파렴치한 행동입니다. 가난의 결핍이 사제를 어려움에
빠트립니다. 가난은 사제를 양육하는 어머니요, 세상의 정신으로부터
지켜주는 보루입니다.”
둘째, 사제들의 이중생활에 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성직자는
단순하고 일관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두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은
이중생활입니다. 이중생활을 하는 목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상처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에게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기도로서 하느님을 가까이하지 않고,
연민으로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는 목자의 최후입니다. 사제들은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기 전에 먼저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영적 세속성에 젖어 들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영적 세속성은 사회적, 정치적 쟁취에 대한 환상, 또는
실질적인 일 처리 능력에 대한 자만, 또는 자립과 자아실현에 대한
집착 뒤에 감춰져 있습니다. 이는 또한 보이는 것에 관한 관심, 다시
말해 여행, 회합, 회식, 연회 등으로 가득한 바쁜 사회생활로 풀이될
수도 있습니다. 사제는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성무일도와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제 성화의 날이면 생각나는 기억이 있습니다. 2002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지금은 의정부교구인 적성 성당에 있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께서 제게 경기지역 사제들을 대상으로 체험사례 발표를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부담도 되고, 자격도 없어서
거절하였습니다. 지구장 신부님께서는 제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하셨고, 강사료도 듬뿍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서 ‘내가 생각하는 사목’이라는 주제로 체험사례 발표를
하였습니다. 다행히 신부님들은 저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셨습니다.
저의 이야기는 교구청에도 알려졌고, 저는 다음 인사이동 때는 교구
사목국에서 교육담당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때 나누었던 저의 이야기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첫째, 사목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점심을 먹고 나서, 산보를 가는 것이 유일한 운동입니다. 점심을
먹고 산보를 가려고 사제관을 나서는데 비가 올 듯 말듯 하늘이 잔뜩
흐렸습니다.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서는데 초등학교 2학년인 진성이가
성당으로 왔습니다. 진성이는 성당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어린이인데
달리기를 잘합니다. "진성아! 산보갈래!" 하니까 진성이는 가방을
교육관에 벗어놓고 곧 저를 따라나섭니다.
우리는 큰 찻길을 건너, 비가 온 뒤에 물이 많아진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을 지나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장날이
아니라서 시장은 한산했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는 진성이 친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다시 큰길을 건너 진성이가 다니는 학교엘
갔습니다. 진성이가 우산을 교실에 놓고 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오랜만에 초등학교 교실엘 갔습니다. 우리는 다시 개울을 건너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놀다가, 성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평소보다 길게 산보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진성이가 말하더군요. "신부님 근데 산보는 어디에 있어요?"
저는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으잉! 다시 산보를 가자는 말인가!
진성이는 "산보"라는 장소가 어디에 있는 줄 알았나 봅니다.
문득, 하느님 앞에 저 자신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하느님의
뜻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목이라는 것도, 어쩌면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미 사제가 되었으면
어떤 사목자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 어떤 사목자가 교우들을
위해서 봉사하는지 다 배웠고,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배운 것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둘째, 사목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분들과 인사도
나누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는데 건회와 진성이가 성당 문으로
뛰어오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왜 뛰어올까 생각하면서
물어보았습니다. 두 친구는 집에서 성당까지 뛰어왔답니다. 두
아이의 집은 장현리이고, 장현리는 차로도 15분은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아이들은 성당 버스를 놓쳤고, 그래서 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3시간 30분을 뛰어서 성당에 도착한 아이들을 보니, 가슴이
찡해집니다.
뛰다 넘어지고, 그리고 또 뛰고 그렇게 성당엘 온 아이들을 생각하니,
조금만 불편해도 짜증을 내는 저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건회는 현지라는 동생이 있고, 진성이는 민정이라는 누나가 있습니다.
현지와 민정이는 뛸 수가 없어서 장현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집에서 성당 생각을 하리라 생각하니 또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건회와 진성이와 성당차로 장현리 건회의 집으로 갔습니다.
두 아이가 저를 보고 너무 반가워합니다. 우리는 함께 성당으로 왔고,
아이들은 2시 30분 군종미사 참례를 하였습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에, 두 아이가 그렇게 저에게 감동을 줍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에, 두 아이가 성지 주일의 참 의미를 알려줍니다.
어느덧, 주님께 모욕을 주고 어느덧, 주님을 모른 체하고 어느덧,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목이란 한 번에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사목이란 논에 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모를 심었다고
농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된 관심과 노력 그리고 반성을
통해서 열매를 맺어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목의 핵심을 정리해 주셨습니다.
“사목이란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지식의 한계를 극복하는 법|오늘의 강론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2018년 나해 6월7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코 12,28ㄱㄷ-34
지식의 한계를 극복하는 법
「인간의 굴레」는 작가인 서머셋 모옴의 자서전적인 삶을 담은
내용의 책입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어머니마저 일찍 여의고 친척
집에서 어린 시절을 지낸 그는 학창 시절을 무척 외롭고 힘들게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살아 있을 때 항상 아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습관적으로라도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내 다리를 본래의 모습대로 고쳐 주시면
하느님께서 정말로 계심을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만 살겠습니다.”
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에 분명히 다리가
정상적으로 되었다고 믿고 침대에서 일어나 두 발을 내디뎌
보았습니다. 완전한 믿음은 반드시 보상을 받을까요?
그러나 그의 다리는 변하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이후 신앙을 버립니다. 결국 서머셋 모옴은
버틀란트 러셀과 함께 영국의 지성 가운데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회의론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법이 모든
율법의 근간임을 잘 깨우친 율법학자에게 하늘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칭찬해주십니다. 심판이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기에 사랑의
실천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만 알아도 이미 하늘나라 문 앞에
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지식은 거기까지입니다. 문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지식은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사실 알려고 해도 한 사람도 온전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사람을 이해한다고 하고 하느님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 너 알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치고
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 너 이해해!”,
“그래, 네 맘 알아!”라는 말을 거의 하려하지 않습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문 앞까지만 인도할 뿐 그 사람의
내면까지 알 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책으로 바다에 대해
배웠다고 바다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소우주라고 합니다.
바다와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세계가 뭉쳐진 것이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나라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의 지식을 맹신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 구원을 청하고 자비를 청해야합니다.
물론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면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이 가장 큰 율법임을 아는 것까지가 지식이고 그 지식은 무언가를
아는 바로 문 앞까지만 인도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아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내가 사랑이 되면 하느님처럼 알 수 있게 됩니다.
바다 밖에서는 바다를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바다 속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그러면 밖에서 보던 바다와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더
바다를 알고 싶으면 마치 소금인형처럼 바다에 녹아버려 바다와
하나가 되면 됩니다.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면 이제 바다를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식은 바다까지 인도하고 그 다음부터는 사랑이 바다를 알게 하고
바다와 하나가 되게 만듭니다. 사랑 없이 안다고 말하는 것은
비난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해야합니다. 그러면 알게 될
것입니다. 알게 되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을 참아줄
수 있게 됩니다. 안다면 왜 참아줄 수 없을까요? 모르니까 못 참는
것입니다. 못 참으면 심판하지 말아야합니다.
“나는 저 사람이 왜 저러는 지 알아!” 라고 말하며 화를 낸다면 말이
안 됩니다. 알면 왜 화가 나겠습니까? 남편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어렸을 때의 상처 때문임을 알았다면 오히려 화가 나지 않고 연민의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화를 내며 상대를 비난하는 사람은 상대를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려고도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참아내며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늘나라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모든 지식의 한계는 사랑만으로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아버지의 원대로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6월7일 목요일
아버지의 원대로
오늘은 “아버지의 원대로”라는 말씀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 말씀에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목사님이 여섯 살 된 딸에게 선물을 사다주었는데,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내던지고 울고불고 난리였습니다. 부모입장에서
보면 그런 딸의 태도는 참 어이가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에게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내 모습이 저 아이의 모습과 같구나! 하나님께서 내게선물을
주셔도 내 생각과 다르다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 때는 원망하고
오히려 슬퍼하고 저러는구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기 생각과 자기 소원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면 원망부터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간구하셨습니다.
내 뜻대로만 응답되길 원한다면 하나님을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
소원을 들어주는 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되 그 응답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맡겨야 합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수도회] 첫째는 이것이다.(마르 12,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6월7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첫째는 이것이다.(마르 12, 29)
가장 중요한 것을 일깨워주십니다.
사랑안에 서로를 살리는 계명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의 첫째는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첫째인 하느님 사랑으로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안에 모든 사랑이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사랑을 알게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때 얻게 되는 사랑의 참된 기쁨입니다.
사랑으로 빚어진 우리들임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대답과 실천이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참된 사랑이길 기도드립니다.
거짓된 자아를 벗어나게 하는 하느님 사랑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임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청주] 온 몸으로 사랑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6월7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마르12,28-34)
온 몸으로 사랑하라.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20년(폴란드의 철도 기술원 그르제프스키 씨
(65))만에,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12,30.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을 위해
손해 볼 작정을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고 변명을 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진정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하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더 나은 이유는 번제물보다
더 큰 자기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생각할 수 있는 소나 양, 염소를 통째로 하느님께 바쳤던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습니다. 무려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을 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좋은 가르침을 주고
좋은 말씀을 하는 존재 그 이상입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많이 아는 것과 천국은
별개입니다. 천국은 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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