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6월24일 주일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낮 미사]
제1독서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1-6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22-26
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80
◈ [서울]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18년 나해 6월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지난 주일에는 ‘생명 대행진’ 행사가 있었습니다. 낙태를 반대하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세상에 알리는 행사입니다. 생명 대행진을 대표하는
분은 예전에 산부인과 의사였습니다. 아내에게 생활비를 드렸는데
아내가 반만 받았다고 합니다. 이유를 물으니 생활비 중에는 낙태를
시켜주고 받은 돈도 있을 터인데 그런 돈으로 생활할 수는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내의 설명을 들었던 남편은 그 뒤로는 낙태 시술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낙태반대 운동을 시작하였고, 생명
대행진도 주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아내의
뜻을 받아들인 남편의 사랑이 생명 운동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행진하기에 앞서서 추기경님을 비롯한 내빈들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인사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혐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노년과 젊은이,
정상인과 장애인, 힘을 가진 자와 약한 자, 지역과 지역의 갈등이
있습니다. 이런 혐오와 갈등은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해결이 되곤 합니다. 이런 혐오와 갈등에서 가장 커다란 피해를 보는
생명은 낙태되는 아이들입니다. 따듯한 엄마의 품속에서 펀하게
지내던 아이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죽어가는 아이들이 태어나는 아이들보다 더 많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말을 해도 세상의 뜻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키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만이라도, 신앙인들만이라도 낙태를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들만이라도 낙태를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만큼 변할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뜻대로 흘러가겠지만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그 말이 제게는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신앙인이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큰 계명은 같은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이웃인가를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 강도를 당한 사람이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사람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낙태되는 아이들도 우리의 이웃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축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성인들의 축일은 죽은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태어난
날을 축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미리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앞서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알아보았고,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상대방 중심의 생각’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도
그런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여름이 긴
하지에 가깝습니다. 하지가 지나면 여름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축일은 겨울이 가장 긴 동지에 가깝습니다. 동지가 지나면 낮은 점점
길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삶의 태도입니다.
‘성소 후원회’ 임원 연수 때입니다. 강사 신부님은 제가 예전에 본당
신부님으로 모시던 분입니다. 저는 신부님을 소개해 드리면서 ‘제가
신부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끈 없는 신발을 신고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말을 유쾌한 유머로 받아 주시는 신부님은
역시 저보다는 한 차원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한없이 슬플 수 있습니다. 구약을
마치고, 신약을 시작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는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들었던 세례자
요한은 ‘살로메’의 춤 값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고 있으며, 사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휴대폰 광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때면 잠시 꺼 놓으셔도 좋습니다.’ 늘 켜져 있어야 하는 휴대폰도
소중한 사람과 있을 때면 꺼도 좋다는 광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지금 좀 서운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지금 좀 속이 상해도
웃을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질 때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셨고, 재물보다는 가난함을 택하셨고, 모욕과 멸시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멘토가 있어야 할 자리|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6월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복음: 루카 1, 57-66.80
멘토가 있어야 할 자리
부모가 돈을 좋아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아이들을 신앙심이 깊게 키울 수 있을까요? 그러기 힘듭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사랑을 주는 부모를 닮으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모기이면 자녀들도 모기처럼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고 부모가 예수면 자녀들도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세상에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다면 그만큼 그들을 그렇게
키운 이기적인 부모가 많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제도 마찬가지고
수도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삶은 그렇지 않으면서 강론만 잘
한다고 신자들이 변할 수 있을까요? 자신과 닮은 신자들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닮아가는 모델이 됩니다. 그들을 위한
책임은 그들이 닮아도 좋은 사람으로 머무는 일입니다.
클린은 마약과 폭력에 찌든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에겐
남동생이 2명 더 있었지만 부모는 자녀들의 끼니를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편의점에 가서 빵을 훔쳐 먹기까지 합니다.
클린이 9살이 되었을 때 경찰관 한 명이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그녀의 집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때마다 클린은 경찰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습니다. 클린은 말합니다.
“이름도 모르던 그 경찰관은 제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어른이었어요.”
하루는 경찰관이 클린에게 말을 걸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영웅
팔찌를 보여주면서.
“클린, 네가 도움이 필요할 때, 아저씨가 항상 옆에 있어줄게. 약속해.
나의 영웅이 내게 그래줬듯이.”
클린은 힘든 시간들을 보내며 경찰 아저씨의 말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아저씨 나도 나중에 아저씨처럼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거예요.
약속!” 그런데 어느 날 소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잘못된 걸
느끼고 당장 그녀의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잠시 뒤, 경찰은
거실에 쓰러져있는 클린을 발견합니다. 그녀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습니다.
경찰관은 당장 아이를 가슴에 안고 미친 듯이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아이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의료진이 서둘러 조치를 취하였고 다행히 클린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는 경찰의 빠른 대처가 아니었다면 클린이
영양실조로 죽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후로도 클린과 경찰관은
친한 사이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클린은 곧 텍사스로 이사를 갔고
둘의 연락도 끊겼습니다.
20년 뒤, 클린은 당시를 회상하며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한 경찰이 이 글을 보고 그가 누군지 알아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제프였고, 그는 20년 만에 클린과 재회합니다. 클린은 어렸을
때, “남을 돕겠다.”는 제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경찰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프처럼 영웅 팔찌를 차고 있었습니다.
그곳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습니다. 제프 콜빈 경사, “(나의) 진정한
영웅” 누구나 닮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닮고 싶은 사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는 부모를 닮고 싶어서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닮으려는 사람이 있어야만 성장합니다.
클린에게도 경찰관 아저씨가 없었다면 부모처럼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중독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미국엔 영웅 팔찌란 것이
있나봅니다. 자신의 영웅의 이름을 새겨 팔에 차고 다니면서 언제나
닮으려고 노력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영웅은 자신이 닮고 싶은 대상이고 지금 말로는 롤 모델이나 멘토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나무가 성장하지 않으면 죽은 것처럼 누군가를
닮아가지 않아도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멘토를 선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이 닮고 싶은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질 수도 있습니다.
‘위플래쉬’(2014)란 영화는 위대한 드러머를 꿈꾸는 한 청년과
플렛처라는 또 한 명의 미치광이 지휘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야.”
플렛처는 위대한 연주가들을 많이도 탄생시키는 선생님이지만
지나칠 정도로 훈련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학생들의 발전만을 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좋은 밴드를 만들어 자신이 영광을 차지하기
위함입니다.
플렛처가 지휘하는 밴드는 그야말로 ‘무한경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드러머도 세 명씩이나 되어 미친 듯이 노력하지 않으면
악보나 넘겨주어야하는 보조로 바로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주인공 앤드류는 여자 친구까지 버려야 하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미쳐야만 잔류가 가능한 그 밴드를 위해 사랑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플렛처는 사고 때문에 공연에 늦게 나타난
앤드류를 내쫓습니다. 애인과 심지어는 가족, 친구들까지 포기하고
그 선생의 말만 따라 손에 피가 나도록 드럼을 두드렸는데도 버려진
것입니다.
플렛처와 같은 선생님을 따른다면 이용당할 대로 당하고 버림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멘토로 가지면 안 되는데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에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경쟁은 세상의 무기입니다. 경쟁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경쟁시키는 멘토는 빨리 버리는 게 좋습니다. 경쟁시키는 그 사람
자체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고 세상에 속한 사람은 모기처럼 남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부모가 아이들의 경쟁을 부추긴다면 부모도 플렛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나라는 그 나라의
발전만을 위해 국민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잘못된
교육체계나 욕심 많은 어른들을 따르다보면 히틀러와 같은 또 다른
괴물이 탄생하게 되고 또 그런 괴물을 따르는 나라가 탄생됩니다.
세상과 반대되는 개념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는 경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멀리 뛰어봐야 사막입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섭리에만
의존해야 하는 곳입니다.
클린을 경찰관으로 만들었던 제프 경사는 광야의 멘토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를 이용할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멘토가 결국 자신을 따르는 이도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자리로 타인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멸망이고 세상에서 벗어나야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의 기준은 사랑인데 세상은 사랑과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모기가 사는 곳이 세상이고 도시입니다. 모기가 사랑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세상의 원리, 즉 교만이나 명예, 쾌락이나
편안함, 돈이나 영화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멘토의 역할을 해
주어야합니다. 세상 것들을 원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신 분이고 세상 반대편에 서 계십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사람들의 시선을 세상 것에서 하느님의 것으로
옮겨주는 멘토가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는 도시가 아닌 광야에서 자라고 광야에서 살고 광야로
나오라고 외칩니다. 세상 경쟁에서 벗어나라고 외칩니다.
그래야만 광야 저쪽에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나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많은 이들의 멘토였는데, 특별히 세상 경쟁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이들의 멘토였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멘토로
삼아 닮아왔고, 또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멘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
멘토인지가 중요합니다. 만약 내가 광야에 있지 않고 도시에 있는
사람이라면 나를 멘토로 삼는 사람 또한 도시에 머물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만이 그리스도로 인도할 수 있었듯이, 그렇게 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 나를 세속으로 이끄는지,
세속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지 잘 분별해야만 합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6월24일 주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루가 1,57-66.80)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자비를
베푸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 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도구역할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예수’ 곧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라는 이름과 함께 쓰여야 문장이 완성됩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신다!”라는 뜻이 될 때
그분의 뜻을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3,30)고
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3,16)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앞세웠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나는
목소리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사막의 목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신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자기 소신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신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소리만 키우고 기대하며 강요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크고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요한처럼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을 앞세우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사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목소리가 되어 용감하게 그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곧 자기 신랑에게서 빛을 받으며 그분이 커지도록
작아져야 하는 신비의 교회입니다...요한은 우리를 위해, 교회를 위해
언제나 말씀에 봉사하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취하지
않는 교회의 모델입니다.”우리도 요한처럼 철저히 주님을 가슴에
담고 그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주변은 참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이 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요한의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 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石女)
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잠시 벙어리가 되는 아픔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셨고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며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해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 크게,
그리고 우선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말
이제부터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야.
말이 많아서 도움 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얘,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한번 들어 볼래?(이규경) **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루카 1, 6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6월24일 성 요한 세례자 대축일.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루카 1, 60)
모든 탄생은 신비롭습니다.
신비롭기에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성 요한 세례자는
한 번도 안 가본 길을 걸어갑니다.
가난한 백성안에서 세례의 길을 백성과 함께
너무나 멋지게 걸어갑니다.
광야의 여정처럼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세례의 길은 먼저 탐욕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세례를 통해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억압과 죄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세례는 아는 것을 실천하는 실천의 세례입니다.
우리또한 실천에서 해답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탄생의 이유가 삶의 이유가 성 요한 세례자처럼
하느님 사랑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성 요한 세례자시여 주저앉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다시 우리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소서.
깨끗해진 마음 안에 하늘나라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알아 뵙고 자리를 내어드리신 진실된 분이십니다.
우리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길 결심합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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