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7월1일 [(녹)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제1독서 아모스 7,12-15
제2독서 에페 1,3-14
복음 마르 6,7-13
◈ [서울] 연중 제15주일
2018년 나해 7월15일 연중 제15주일
‘방탄소년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7명으로 구성된 우리나라
가수입니다. 이 가수가 미국의 가요 순위에서 1위를 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많은 팬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어로 노래를 하는데도
외국인들이 노래를 이해하고 있으며, 기꺼이 따라부른다고 합니다.
어째서 한국의 가수가 미국의 가요 순위에서 1위를 했고, 국가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이 좋아할까요? 방탄소년단의 무엇이 사람들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게 하고,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까요?
방탄소년단을 취재한 사람은 그들의 성공 비결을 몇 가지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소통’입니다. 방탄소년단은 노래로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노래를 시작하게 된 시작부터, 소소한 일상의
삶은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해가는
방탄소년단에게서 자신들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우상이 아닌, 자신들과 같은 친구라는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발적인 팬클럽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전략’입니다. 방탄소년단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노래를 먼저 인터넷 공간에 알렸습니다. 팬들은
그들의 노래를 이웃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방탄소년단의 노래는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에게 전해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야기는
6억 명에게 전해졌을 때, 방탄소년단의 이야기는 12억 명에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인터넷의 공간에서는 방탄소년단의 힘이 트럼프
대통령보다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선한 영향력’입니다. 방탄소년단은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는
행사에 함께 하였습니다. 헌혈을 통해서 아픈 사람들과 함께하자고
했을 때, 팬들은 기꺼이 헌혈에 동참하였습니다. 물이 부족한
사람들을 도와주자고 했을 때, 팬들은 모금해서 전달하였습니다.
헌혈도, 모금도 모두 방탄소년단의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여학생은 방탄소년단을 통해서 팔레스타인의 여학생을 도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두 민족은 오랜 세월 서로 싸웠지만, 방탄소년단을
통해서 학생들은 서로에게 평화의 손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넷째는 ‘음악성’입니다. 방탄소년단은 모든 노래를 스스로 작사,
작곡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노랫말은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고,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들의 음악은 감미로우면서도
강력하였고, 신선하였습니다. 소통, 전략, 선한 영향력이 있어도 결국
가수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음악성’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방탄소년단이 그들만의 음악을 계속 추구한다면, 비틀스와 같은
음악인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생각났습니다.
방탄소년단은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통’을 강조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을 신학적으로
‘육화’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소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전략’을 말하였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계명을 알려 주셨습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권위와 율법이라는 전략을 폐기하셨습니다. 희생과
나눔이라는 전략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영향력’을 말씀하셨습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까지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까지
내주라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그대로
남겠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선행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임을
알려주었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자비와 용서가 승리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고, 우리를 위해서 죽었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은 새로운
권위가 있었고,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참된
행복에 대한 말씀은 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소경, 중풍 병자, 나병 환자, 귀머거리,
앉은뱅이를 치유해 주셨고,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든 표징은 하느님께 대한 굳센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언제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강력한
표징은 ‘십자가’였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걸림돌이었던 십자가는 구원을 향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돈도, 명예고, 권력도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방탄소년단이 보여 주었던 것들입니다. 그것은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오늘 성직자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오늘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기가 가진 것을 주는 자,
자기를 주는 자
2018년 나해 7월15일 연중 제15주일
<자기가 가진 것을 주는 자, 자기를 주는 자>
복음: 마르코 6,7-13
1976년 구소련 예례반 댐에서 전차 추락사고가 있었습니다. 승객을
태운 전차가 기계고장으로 10m아래 물속으로 곤두박질 쳤고 총
92명 중 30명이 구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30명을 구한 것은
구조대가 아닌 수영 천재로 불리던 한 남자, 샤바르시
카라페트얀이었습니다
샤바르시 카라페트얀은 세계 수영 선수권 첫 출전부터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웠고 그 후 3년간 각종 대회에서 신기록만 11개를 세워 이젠
올림픽 금메달만 목전에 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예레반
댐을 달리며 훈련을 하던 도중 전차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구조대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어 바로 물로 뛰어들었지만 물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손으로 짚으며 전차 안의
사람들을 빼내어 몇 명 정도 구조했을 때 구조대가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조대는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조대가 가져온 산소통이 모두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자
카라페트얀은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온 몸이 유리에 찢겨가며
30명을 혼자서 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승객을 구조하며 입은 상처와 탈진 때문에 46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다행히 깨어나긴 했지만 의사는 패혈증이
심해 더 이상 수영은 무리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몸을 회복해 수영에
재도전 해봤지만 이전의 기록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잊혀져갔습니다. 왜냐하면 정부에서 그가 사람들을 구조한
것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여론을 의식하여 구조대가 30명을 구조한
것으로 발표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담당했던 검사가
양심선언을 한 까닭에 이 사실이 밝혀졌고 몇 년 후 그는 국민
영웅으로 추대 받게 됩니다.
[출처: ‘구소련의 영웅 샤바르시카라페트얀’, 서프라이즈]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을 주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줍니다. 카라페트얀은 자신을 줄 준비가 되어있었던
사람이고 구조대원들은 가진 것을 줄 준비가 되어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모두가 사랑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깊이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 살과 피를 주십니다. 당신 가진 것을 다
주신 것도 모자라 자신을 온전해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도 당신처럼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미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가진 것을 주면서 충분히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서는
가진 것이 다 떨어져야합니다.
카라페트얀은 가진 것이 없고 몸만 있었기 때문에 바로 물로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가진 것만을 주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이나 꼭
필요한 무언가에 피해가 온다면 곧 내어주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는데도 사랑이 있다면 자신을 내어주게 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생명을 내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건강을 먼저 생각한다면 자신을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제자들이 가진 것은 오로지 악령을 쫓아낼 수 있는
성령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바로 내어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가난해야합니다.
사랑의 더 깊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부자가
당신을 따르려고 할 때 가진 것을 먼저 다 팔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돈만 나누어주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정도라면 당신 제자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제이면서도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줄 수 있는
만큼만 주며 먼저 ‘건강’을 챙깁니다. 건강이 나빠질 것 같으면
무리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단계에까지는 가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피해입지 않는 사랑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지금 제주도에는 예멘 난민 500여명이 난민 심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럽 많은 나라들은 난민들을 받아들여 사회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난민들이 저지르는 범죄가 적지 않은
실정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우리나라 국민 중 많은 이들은 난민을
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국민안전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는 줄 수 있는 것은 주겠지만 우리 자신은 주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가진 것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하지만
내 자신을 내어줄 수 없으면 참다운 사랑은 아닙니다.
과연 유럽사회가 난민 때문에 더 병들어갈까요, 아니면 인종차별적
이기주의나 물질만능주의 때문에 더 병들어갈까요? 상처 하나도
받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려면 자신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전재용 선장은 베트남
난민 96명을 구해주고 큰 원양어선의 선장에서 통통배를 타며 멍게를
걷어 올리는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내가 손해 보아야 참 사랑입니다.
1997년 콜롬비아 시골마을 산토나의 파블로라는 한 젊은이가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런데 그는 반군에게 잡혀 인질이 됩니다. 반군은 이
군인들의 목숨 값으로 정부에 자신들의 포로들을 석방하라고 합니다.
군 복무하다 그렇게 된 것이니 아들을 살려달라는 아버지의 청원에도
정부는 반군과의 타협은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파블로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거리로 나가 200만 명의 서명을 받아냅니다. 하지만
역시 나라에서는 원칙을 바꿀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그렇게 10년이 흐르고 모두 아들을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연히 반군이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에 아들이 생존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만 포로가 되어 고생하게 할 수 없다며 자신도
쇠사슬로 손을 묶고 산토나에서 보고타까지 1,200km가 되는 길을
46일 동안 걷습니다. 이 이야기가 매스컴을 타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 행진에 동참했고 보고타 입성 때는 수많은 인파가 그를
맞아주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도 아들의
석방을 외치며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비롯해 프랑스, 스페인,
독일까지 행군을 계속했고, 바티칸에 이르러 베네딕도 16세 교황을
만나 위로를 받습니다.
이렇게 국제 여론이 뒤끓고 교황청까지도 가세하자 콜롬비아 정부도
파블로의 석방을 두고 반군과 협상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기나긴 협상 끝에 2010년 파블로는 아버지 곁으로 올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직접 아버지 팔에 감겨있는 쇠사슬을 풀어주었습니다.
줄 것이 하나도 없을 때 비로소 참으로 줄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가진 것을 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을 주어야 참 사랑입니다. 자신
안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자신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을 때 하느님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머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하느님의 구원계획 실현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7월15일 연중 제15주일: 나해: 하느님의 구원계획 실현
오늘 독서와 복음은 두 가지 기본적 사상을 전해주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가지시고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에페 1,4)하셨다는 것과, 이 구원계획은
제자들의 복음선포를 통하여 실현된다는 것이다(마르 6,7-13 참조).
오늘의 중심 주제는 복음선포이다. 오늘 우리의 활동들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다.
제1독서: 아모 7,12-15: 나의 백성에게 가서 말을 전하여라.
제1독서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목자이면서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인
아모스를 선택하신 것을 전혀 뜻밖의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택하실 때 하신 것같이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 아모스는 자신의 예언적 소명이 절대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고 한다. 왕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말하는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만일에 왕의
마음에 드는 말만 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배반할 수 있다.
예언자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하느님을 선포해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거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언제 어디에서나 부정과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자유로운 예언사상의 전형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바로 나자렛의 목수(마르 6,3)인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고(마르 1,14참조) 세상이 심판 받을 때가 되었다
(요한 12,31 참조)는 사실을 선포한 충실성과 진실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복음: 마르 6,7-13: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구원계획을 첫 번째로 실행하시는데 아모스의
경우와 같은 모습이다. 그들의 사명 역시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적 사명이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사도들의 파견은 인간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존하라는 것이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8-9절). 즉 이 말은 그 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한 “열정”이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리라는 무한한 신뢰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이제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협조자가 된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10절).
그러나 때로는 거절당할 수도 있다.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실현되고 있는
약속의 새로운 땅에 가까이 갔느냐 못 갔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전교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복음선포와 구원의 활동을 계속한다
(12-13절 참조). 이렇게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반영시키고 그분의 모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성과는 어느 정도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복음선교 76).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복음선포가 아모스의 경우나
그리스도의 예언적 선포와 같이 권력이나 힘 앞에 항상 자유로운가?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할 용기를 항상 가지고 있는가?(로마 1,14참조).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가 아니면 우리의 능력을 믿는가? 극단적인 경우에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버릴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제2독서: 에페 1,3-14: 하느님의 구원계획-그리스도 안에 완성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이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0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
anakefalaiósasthai, recapitolare’라는 말은 전에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다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지배권을 다시
인식시키고자 하는 창조의 근본적 의미가 다시 드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 구원계획은 우리들의 협력, 특히 교회가 실현하여야
하는 것이며, 이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비록 고달프게 느껴져도 우리가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주님께 파견 받은 제자들과 같이 힘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청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너희 발 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7월15일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너희 발 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 11)
놓아주어야 할 순간 순간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감정입니다.
감정도 닦아주어야 밝아질 수 있습니다.
먼지 조차 소유할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발밑의 시간도 감사하며 나누는 것입니다.
헛된 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발밑의 먼지같은 감정도 주님께 봉헌합니다.
우리가 일으킨 먼지이기에 우리가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나가야 할 모든 시간입니다.
생명은 먼지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먹거리를 위해 애쓰는 농민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정직한 농민들의 농작물이 제대로
대접받는 사회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믿고 먹을 수 있는 건강한 먹거리가 제대로 유통되어
농민들이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땀방울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먼지야 주님을 찬미하여라.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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