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7월27일 [(녹)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제1독서 예레 3,14-17
복음 마태 13,18-23
◈ [서울]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7월27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장애가 있는 아들 때문에 걱정하는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아들이 장애로 태어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장애가 있는 아들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이야기를 듣고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아들을 잘 돌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죄가 있어서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순간포착 세상의 이런 일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가슴이
뭉클한 사연을 보았습니다. 31년 동안 장애가 있는 딸을 돌보는
부모님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딸을
정성껏 돌보고 있었습니다. 자리에 누워서 숨을 쉬고, 눈을 껌뻑하는
것이 딸이 하는 일입니다. 딸 앞에서 연극을 하시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연극을 보고 딸이 웃었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딸이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딸에게 분유를 먹이고,
씻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기적이 일어나서 딸이 ‘아빠’라고 한
번만이라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딸은 비록 말은 하지
못하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아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용직으로 일을 하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지만, 더없이
풍요로운 가정입니다. 비록 딸이 건강하지 못하고, 31년 동안
누워있지만, 사랑이 넘치는 가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땅에 씨가 뿌려졌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정입니다. 좋은 땅은 명예, 권력, 재물로 포장된 땅이 아닙니다.
좋은 땅은 건강한 외모가 아닙니다. 좋은 땅은 학벌과 가문이
아닙니다. 그런 곳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말씀 안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좋은 땅입니다. 주어진 삶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좋은 땅입니다. 신앙 안에서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말씀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라.’라는
시편의 말씀을 서품 성구로 정했습니다. 허황한 꿈, 노력하지 않는
성공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권을 과도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복권구입 한도를
법으로 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푸는
의미로 복권을 사거나, 주택복권처럼 내가 사는 복권이 무주택자에게
주택마련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약간의 복권을 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일확천금을 노리는 과도한 복권구매는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또 하나 저의 사제생활을 이끌어주는 말씀은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시련이 다가와도 저를 일어서게 해 줍니다.
저를 긍정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기뻐하면 기쁠 일들이 생기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응답을 해 주신다는
믿음은 저에게는 많은 재산보다, 권력보다, 명예보다 더 큰 힘이 되고,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지혜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메말라서 황폐하게 되는 것도 우리
선택의 결과입니다. 작은 씨앗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것도 우리
선택의 결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강물에 떠밀려가는
나뭇잎처럼 살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살기를 바라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씨를 받을 좋은 땅이란?
2018년 나해 7얼27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씨를 받을 좋은 땅이란?>
복음: 마태오 13, 18-23
한 조각을 잃어버려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잃어버린 한 쪽을 찾아
나섰습니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에이야 디야 내 이제 찾아 나섰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구르다 마주친 벌레와 이야기도 나누고, 잠시 쉬며 꽃향기도 맡고,
지친 나비에게 등을 잠시 빌려주어 쉬게도 합니다. 잃어버린 한쪽을
찾는다는 설렘에 산을 오르는 것도, 숲을 헤치는 것도, 더위도 추위도
힘들지 않습니다.
결국 오랜 여행 끝에 잃어버린 한 쪽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한쪽은
“나는 당신의 일부분이 절대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한 쪽을
만났는데 너무 헐거워 빠져버렸고 또 다른 한쪽은 너무 뾰족하고,
다른 것은 너무 커서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정말 딱 맞는 한 쪽을 찾았습니다. 매우 기뻤습니다. 그런데
너무 꼭 맞다보니 아주 빠르게 구를 수 있어서 벌레를 만나도
이야기를 못하고 꽃향기를 맡을 여유도 없고 나비를 등에 태워줄
시간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노래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차아구나, 마치내 차아그느, 어시구나 저시구느. 마치내...”
딱 맞는 잃어버린 짝을 찾은 동그라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살며시
한 쪽을 내려놓습니다.
‘이게 이런 것이구나.’
그리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갑니다. 벌레와 이야기도 하고 꽃향기도
맡으며 나비도 쉬게 해주며...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에이야 디야 내 이제 찾아 나섰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참조: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쉘 실버스타인]
동그라미는 관계에서 오는 행복보다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하면서도
끊임없이 관계가 필요하다고 노래합니다. 어찌 보면 이 동그라미가
나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겠습니다. 관계란 것이
나의 무언가가 침해당함을 감수해야만 깊어질 수 있는데, 나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만 내어주면서 외롭다고 말합니다. 내가 당하는 손해를
상태의 탓으로 여깁니다.
관계가 유지되려면 내가 상대 때문에 잃는 것에 비해 상대 때문에
얻는 것이 더 많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안엔
영원한 불만족이란 자아가 있어서 관계 때문에 얻는 행복을 잊게
만들고 손해 본 것만 생각나게 합니다. 예를 들면 아기를 보면서는
태어나주어 감사하고 잠자는 모습까지 좋다고 하지만 학생이 되면
공부는 안 하고 잠만 잔다며 나무랍니다. 내가 한 것에 비해
아이에게서 오는 것이 적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혼해 주어 감사해야
하겠지만 살다보면 그런 것은 사라지고 상대 때문에 고생한 생각만
남아 상대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습성이 고쳐지지 않으면
영원히 누군가와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이별을 반복하며 외로운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저 벌레와 꽃과
나비만을 주위에 두고.
예수님은 우리 밭에 심겨지시는 씨앗입니다. 씨앗이 심겨지면 밭의
영양분을 빼앗아 당신이 그 밭을 차지하게 됩니다. 작은 씨앗처럼
뿌려지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것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됩니다.
길로 상징되는 사람은 아예 씨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자신을 걸어
잠그는 사람입니다.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관계 안에서
상처를 아주 심하게 받아 큰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돌밭으로 상징되는 사람은 육체적인 사람입니다. 관계를 육체에
한계지어 생각하니 육체적인 만족이 사라지면 이내 다른 상대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지 않고 십자가를 내미는
때가 되면 가차 없이 밀쳐냅니다.
가시밭으로 상징되는 사람은 주님, 주님 하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을
이용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적인 손해를 끼치게 된다면 예수님 탓을 하며 밀쳐냅니다.
좋은 밭도 30배, 60배, 100배의 각기 다른 양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을 나타냅니다. 관계라 해도 다 같은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상대를 위해 얼마를 잃어도 되는가에 따라 그
친밀함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다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도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우선 내가 혼자 지내는 게 좋은지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좋은지 결정해야합니다. 만약 누군가와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면 내가 상대 때문에 불편해지는 것은 잊어야합니다. 그 관계가
유지되려면 상대에 대한 무한 감사만 남겨야합니다. 그래야 그 관계가
오래 유지될 수 있습니다. 상대는 나를 변하게 하기 위해 씨가 되어
오는 것입니다. 상대는 나에게 오기 위해 죽어 내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상대를 변하게 하려면 씨앗이 되어 나도 상대
안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죽는다는 말은 불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죽는다는 말은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좋은 땅이 되려면 상대가
내 안에서 일으키는 변화를 죽은 듯 감당해내야 합니다. 좋은 땅은
불만이 사라지고 감사의 순종만이 남은 땅입니다. 관계 맺을 준비가
된 땅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춥고 외로우며, 신산(辛酸)하고 서글픈 예언자로서의 삶
2018년 나해 7월27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춥고 외로우며, 신산(辛酸)하고 서글픈 예언자로서의 삶
혹시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하겠습니까?
나이는 16세, 아직도 또래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중학교
3학년이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갑자기 그분께서 부르셨습니다.
아니 그분께서 던지신 그물에 걸려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 “내가 너를 선택하였다! 가거라.”“네? 가기는
어디로요?” “국회의사당으로!”“아니, 아직 저는 학생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제가 거기 가서 뭘 하라고요?”“가서 그들의 비리를
고발하여라! 백성들의 주린 배는 뒷전이고, 자신들 배만 채우기 위해
골몰하는 거짓 지도자들의 악행을 낱낱이 밝혀라!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제 힘만 믿고 설쳐대는 그 사악한 자들에게 멸망을
선포하여라!”
너무나 당혹스런 나머지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이제
중3입니다. 머리에 든 것도 없고, 말주변도 없습니다.” 너무나 기가
차서 “다른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저는 절대 안됩니다.”하며 도망을
가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도망가 봐야 그분 손바닥 안입니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작은 인형 하나 돌려놓듯이, 하느님께서는 즉시
원위치시키실 것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국회의사당으로 갔습니다.
정문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힐 것입니다. 경비 업무를 보는 분이 야단을
칩니다. “학생이 지금 학교에 있지 않고 왜 여기 있는가?”우여곡절
끝에 국회 본회의장에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거기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기가 팍 죽었습니다. 다들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 TV 화면에서나 볼 수 있는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있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비호처럼 단상에 올라
서서 마침내 외쳤습니다. “여러분! 빨리 회개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악행 때문에 진노하셨습니다! 그릇된 길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서십시오!”
앉아있던 사람들은 다들 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웬 또라이가 하나 나타나서 떠들어대지? 날씨가 너무 덥다 보니 맛이
갔구먼! 빨리 저거 끌어내!”
위대한 대 예언자 예레미야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거절합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을 모릅니다.”
(예레미야 1장 6절)
그러나 주님께서도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저는
아이입니다.› 라고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예레미야 1장 7절) 이렇게 예레미야는 울며 겨자먹기로 예언직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라고 하신 예언의 말씀을 유다 고관대작들, 유다
의회 의원들, 지도자들에게 건네자, 즉시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이요,
물벼락, 욕설이요 악담이었습니다. 예언자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어느날 그는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미야 15장 10절)
예레미야는 원래 착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남들처럼
이웃들과 어울려 평범하게 살아가는 서민적 삶을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선포하라고 건네시는 예언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이 위선자들에 대한 신랄한 고발, 조국의 처절한 파괴와 멸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뿌리채
뽑히고, 산산히 허물어지는 과정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완전히
파멸된 그 위에 주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하실 것임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이 너무나 벅차고 힘겨웠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때로 자신을 부르신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멀리 도망가고도
싶었지만, 결국 우리 인간은 옹기장이이신 주님 손에 들린 옹기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예언자로서 거듭납니다.
주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백성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예언자들의 운명은 본래 그렇게 춥고 외로우며, 신산(辛酸)하고
서글픈 것인가 봅니다.
우리는 최근 또 다른 한 예언자의 슬프고 혹독한 운명 앞에 크게
슬퍼하고 있습니다. 평생토록, 일관되게, 우리 시대 가장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위한 든든한 후원자로 살아오셨던 분, 위선자들과
삯꾼들에게는 단호하고 준엄한 예언자로서 살아오셨던 그분을,
자비하신 주님께서 따뜻히 당신 품에 안아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주님,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맡기면 됩니다!
2018년 나해 7월27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오늘은 “맡기면 됩니다”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명절인 유월절을 앞두고 유대인 한 사람이 유대교 스승인
랍비에게 말했습니다.
“랍비님, 저는 지금 너무 걱정이 많아 죽을 것 같습니다” 랍비는 무슨
일로 그러냐고 물었지요. 그는 명절 때 쓸 무교병 살 돈도 없고,
포도주 살 돈도 없고, 자기 옷 살 돈도 없고, 아내 옷 살 돈도 없고,
자녀 옷 살 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랍비가 물었습니다.
“무교병은 얼마요?” “만원입니다.” “포도주는 얼마요?”
“2만원입니다.” “자네 옷은?” “5만원입니다.”
“아내 옷은?” “10만원입니다.” “자녀의 옷은?” “3만원입니다.”
이 말을 다 듣고 랍비는 조용히 말합니다. “이제 자네는 돌아가서
너무 많은 걱정을 하지 말고 21만원, 한 가지만 생각하고 걱정을
하게. 그리고 하나님께 한 가지, 21만원을 달라고 말하게”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무 잡다한 것까지
걱정하지 않습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맡아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모든 무거운 짐, 걱정 짐을 모두 예수께 다 맡기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열매를 맺으려면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7월27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마태13,18-23)
열매를 맺으려면
몇 개의 작은 화분을 한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보기는 좋은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 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 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자기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써 그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하고
말했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커가고 그 사랑이 이웃으로 향할 때 비로소 열매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가13,8).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지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능이 가까워 오면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 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새기고 행하는 만큼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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