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8월3일 [(녹)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제1독서
<온 백성이 주님의 집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몰려들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6,1-9
복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58
◈ [서울]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8월3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자매님들이 교구청을 방문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시는 분들인데,
제가 매일 올리는 묵상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교구청 경당에서
미사를 함께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복음은 무엇인가를 나누었고,
자매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두 직장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직장을 그만둔 이유는 자녀의 출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출산휴가도
적었고, 복직했어도 전에 있던 자리가 아니라 더 힘든 자리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친정이나 시댁에서 아이를 돌봐줄 형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휴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시댁이나 친정의 도움으로 집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자매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자매님들의 동네 옥탑방에서 서울시장님이 지낸다고 합니다.
서울시장님이 현장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다면 자매님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도 찾을 것 같습니다. 부모의 도움으로 집을 마련하기
어려운 신혼부부들에게 장기 임대 주택을 제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 같습니다. 출산휴가를 충분히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설을 더 많이 마련하고, 육아에 필요한 비용을
충분히 지원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집을 마련하는 부담이
적다면, 출산 후에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설이 있다면, 육아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면 저출산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고,
신혼부부들의 삶의 질도 더 좋아질 것 같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성경공부를 하고,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자매님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하는데 달을
향해 뻗은 손을 본다는 뜻입니다.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자존심, 선입견, 교만, 욕심, 질투는
견지망월의 원인이 되곤 합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학벌, 출신, 나이를 먼저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새로운 권위로 인해 자신들이 누렸던 기득권을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견지망월’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율법과
계명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바다와 같아서 모든 이를 품어 주신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직업과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틀에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견지망월’이라는 병이 자주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 병을
극복하는 길은 겸손함에서 시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신을 믿어버린 수학자의
운명
2018년 나해 8월3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자신을 믿어버린 수학자의 운명>
복음: 마태오 13,54-58
쿠르트 괴델이란 천재 수학자가 있는데 그는 심한 불안증 때문에
스스로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의 업적은 어떤 이들의 평가에 의하면
아인슈타인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는 27살에 수학으로 모든 것이
증명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팽배해 있는 학자들 앞에서 수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는 논문을 써서 학계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 대한 반발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인정해 주고 지지해준 유일한 인물이 있었으니
미국에 살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초대로 괴델은
미국으로 건너가 그와 오랜 우정을 쌓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괴델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수준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죽자 괴델은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하고 의심이 많아
불안증에 시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대학 강사를 할 때는 그 자리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했고, 교수가 되어서도 그 명성을 잃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오직 술집에서 만난 댄서였던 연상의 아내 아델만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델이 해 주는 음식만 먹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천재이기 때문에 타살을 당했다고 믿은 그는 자신도 사람들이
죽이려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아델이 수술을 하여 입원을 하게 되자 그에게 음식을 주는
어떤 이들도 믿지 않았고 병원에 입원해서도 음식 앞에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괴델은 다른 사람들이 주는 음식 안에는 반드시 독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결국 아사하고 말았습니다.
사망 당시 168cm의 키에 몸무게는 고작 29kg에 불과했습니다. 이
천재 수학자는 수학의 불완전성은 믿었지만 자신의 불완전성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완전하다고 믿는다면 누구도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남은 나의 불완전함을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완전하다면 남자를 만날 필요가 없고 남자 역시 여자를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를 채워주는 만남 없이는 인류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다면 반드시 서로 간에 부족한
면을 채워주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만남 없이 완전해 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함을 넘어서서 본래 악의 성향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생각들은 다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자신 안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누가 적인지 모르면 괴델처럼 결국 스스로를 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신뢰하지 못하는 나자렛
사람들과 같고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에 반응하지 않는 유다
백성과 같습니다. 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을 너무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을 믿는 이들의 특징은 피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는데
있습니다. 자신을 믿어야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는 자신을 파괴시키는 악이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믿으면 손해보고 자신을 믿지 않으면 이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을 믿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기 때처럼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이를 찾아야합니다. 그러면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를
초월시켜주는 이는 더 큰 사랑을 지닌 이입니다. 기적을 행해주는데도
그를 믿지 않으려하면 어떻게 악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도 자신을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신뢰를
두라고 한 것뿐입니다. 자신을 보낸 것이 하느님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주는 이를 믿으면 실패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내어주는 것보다 큰 사랑은 없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양식과 음료로 내어주는 분보다 큰 사랑을 주시는 분은 없습니다. 그
사랑 앞에서도 자신만을 믿고 입을 닫고 있다면 우리 운명은 안 봐도
뻔합니다. 살려고 하거든 자신을 믿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납시다.
벗어나는 길은 사랑을 믿는 이에게 신뢰를 둘 줄 아는 겸손함에
있습니다.
‘타인이 주는 사랑이 나를 이용하려는 술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용당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아이들은 누구에게도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에 거의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잘 보호해주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잘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절대 믿지
않는 겸손함을 보입니다. 그런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큰 낭패를 보지 않습니다. 큰 낭패를 보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에서 오는 욕심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린 이들은
욕심도 없어서 큰 투자도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믿어서 손해를 봐야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겠습니까? 그리고 아이 뒤에는 든든한 부모가
버티고 있습니다.
혹시 속아서 큰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에게 양심의 가책을 남기게
만들어 상대가 회개할 기회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를
끝까지 믿어주셨고 그의 술책에 손쉽게 당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다에게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자신과 하느님을 동시에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그저 주님의 뜻에 맡기기 위해 생각을 끊어버린다면 빠르게 자아의
압제에서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속아주십시오.
그것이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또 많은 이들에게 믿음을 주게
될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8월3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13,54-58: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을 고향 사람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고향은 나자렛이나 베들레헴보다도 그분을 거절한 유대아 전체를
의미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1코린 1,23)로 박해를 받으셨지만, 계약과
무관했던(에페 2,12 참조) 다른 민족에게서는 존경을 받으신다.
이 회당은 악의에 찬 믿지 않는 사람들,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찬, 못되고 버릇없는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54절) 그러자 그들은 놀랐다. 그들이 놀랐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놀란 것이 아니라, 무시와 분노로 끓었기
때문이다. 그 놀람은 찬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예수님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이 말은 예수님을 폄하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보다
더 거룩한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보면서 그러한 능력이 나올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 하기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는 눈을 막아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에 그리 마음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적만큼이나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그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했다. “개천에서 용났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별
볼일 없다고 여기는 가정에서 훌륭한 자녀가 나온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나자렛에서도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흠을
잡지 못하고 그분의 가족들만 들먹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고향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주님을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기타] 팔자를 고치는 방법!
2018년 8월3일 금요일
오늘은 “팔자를 고치는 방법”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잠언 16장 9절 말씀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토정비결의 서문에 보면 너무 사주팔자가 좋아서 교만하지 않고 너무
나빠 낙심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주팔자가 너무 좋은 사람의
것과 아주 나쁜 사람의 것을 빼어 좋은 팔자에는 나쁜 팔자를 나쁜
팔자에는 좋은 팔자를 조금씩 집어넣어 모든 사람을 평준하게 하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토정비결이 그 사람의 일생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막연히 말을 해주고 부정과 긍정으로 정리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팔자를 고칠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주인으로 착각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려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꾸만 실패와 절망의 팔자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면 얼마든지
나쁜 팔자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좋은 팔자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섣부른 앎이 병이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8월3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마태13,54-58)
섣부른 앎이 병이다.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 뿐인 나의 인생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선입견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요? 혹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불평불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내 마음의 옹졸함이 불평을 키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에는 '불평금지' 스티커가 붙여있답니다.
자기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내면을 모른 체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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