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8월11일 토. [(백)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제1독서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 하바쿡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12─2,4
복음
<믿음이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4ㄴ-20
◈ [서울]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2018년 나해 8월11일 토.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매주 금요일 9시 30분에 교구청 회의가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예비
신학생 도보 성지 순례를 가느라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주에 회의가 있는 줄 알고 9시 20분에 회의실로 갔습니다. 회의실
문이 잠겨있었습니다. 이번 주는 무더위 때문인지 회의가 없었는데
저는 몰랐습니다. 회의가 없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들 덥고 바빠서 제게 연락 못 했을 것
같았습니다. 저도 오전에 여유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막힌 길이 뚫리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집니다.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꽉 막힌 도로 위에 있는 것처럼
답답합니다. 무더운 여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주방의 자매님들이 3일간 휴무를 하였습니다. 식사를 챙겨 먹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좋게 생각하면 모처럼 신부님들끼리 식사를
준비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숨은 실력을 보여 주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설거지를 잘합니다. 어떤 신부님은 라면을
잘 끓입니다. 어떤 신부님은 과일을 잘 깎습니다. 저녁에는
단합대회를 할 기회도 생깁니다. 저희를 위해서 수고해 주시는 주방
자매님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역시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사랑하면 칼날 위에서도 단잠을 잘 수 있다고 합니다.
원망하면 넓은 침대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 들려서
아픈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제자들은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아이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스승이신 예수님께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호통을 치셨고, 아이는 병이
나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어째서 저희는 아이를
치유하지 못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연륜, 열정, 경험을
이야기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자들에게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연륜, 열정, 경험으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은 오직
‘믿음’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사목을 잘하는 신부님이 계시지만 저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어설프기도 했습니다. 신부님이라고 부르면 다른 사람을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강론도 잘하시고, 본당의 모든 일을 물 흐르듯이
해결하시는 신부님을 보면 존경스러웠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저도 제 앞가림을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전에 모셨던
본당 신부님들의 연륜과 열정을 따라가기에는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7년 사제생활을 하는 제게도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십자가는 많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제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강론을 하는 사제는
있지만, 그 강론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제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말씀 역시 신앙 안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태산이 높다고 하지만
하늘 아래에 있는 뫼’일 뿐입니다. 오르지 못할 산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믿음은 인내와 성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겨자씨 믿음을 자라게
만들라
2018년 나해 8월11일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겨자씨 믿음을 자라게 만들라>
복음: 마태오 17,14ㄴ-20
2015년 1월 미국 텍사스 경찰서로 한 통의 신고전화가 날아듭니다.
한 남자가 총기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뇌사판정을
받은 아들의 장기를 적출하려는 의사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들이닥치자 그는 끊임없이 4시간만 있으면 아이가
깨어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경찰과 총을 들고 대치한
지 4시간이 지났을 무렵 뇌사판정을 받은 아들이 정말로
깨어났습니다. 법정은 아버지에게 처음엔 유죄판결을 내렸다가
나중엔 무죄판결을 내립니다. 그의 믿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은
지금도 같은 사업을 하며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믿음이
없었다면 아들은 살아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 때 가장 큰 이변이라면 우리나라가 세계 1위
독일을 2-0으로 이긴 것일 것입니다. 예선 탈락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독일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싸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이 기적을 만드는 것은 확실합니다.
불과 50년 전에는 뜀틀을 넘을 때 넘는 것 외에 다른 동작을 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양학선 선수는 하늘에서 정신없이 돌다
착지합니다. 양학선 선수가 50년 전 뜀틀 선수들보다 연습을 더 많이
해서 그럴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연습량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는 ‘믿음’에서 옵니다. 각자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달랐던
것입니다. 마루운동에서 하는 공중제비를 왜 뜀틀에서는 할 수
없느냐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물론 마루운동에서도 수십 년 전에는
그저 한 바퀴 도는 것도 큰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똑바로 서서
두 바퀴를 돌고 착지를 합니다. 다른 모든 종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불에 뛰어들고 물에 뛰어드는 아이를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산을 옮기는 힘이 있다고 하십니다. 산이
옮겨질 것이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마귀를 쫓아낼 믿음을 갖지 못했을까요? 믿음을
키우는 노력을 하지 앉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겨자씨’로
비유하십니다. 겨자씨는 자라나면 큰 나무가 됩니다. 이처럼 믿음은
키우는 것입니다. 믿음은 복권당첨 되듯 한 순간에 커지는 게
아닙니다. 꾸준히 저축을 하듯 매일의 믿음의 삶이 모여 커다란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극단적 믿음이 극단적 기적을
가져오지만, 극단적 믿음은 작은 기적들을 통하여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해지려면 작은 것부터 기적을 체험해야합니다. 양학선
선수가 갑자기 하늘을 그렇게 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것을 해보고 또 해보니 불가능해 보이는 것까지도
가능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전의 사람들이 계속 더 새로운 기술들을
쌓아올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늘 하루를 기적의 날로
만들어야합니다. 전에는 안 되던 것을 하루만이라도 해 보는
것입니다. 하루를 할 수 있으면 평생 할 수 있습니다. 일생은 하루의
연속일 뿐입니다. 오늘 변화될 수 있다면 인생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자신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내가 바뀌는 것이
기적입니다. 오늘의 작은 변화가 내일의 큰 변화를 가져오기에 오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면 내일의 나도 변화 없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변하고 싶으면 시도하게 되고 그러면 변하게 됩니다. 변하게 되면 더
큰 믿음이 생겨 더 많이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일생동안
이렇게 더 큰 믿음을 지니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기적은 오늘의
믿음을 통한 작은 변화가 쌓여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텃밭에도 믿음의 겨자씨를 뿌려 매일 잘 가꾸어 큰 나무로 자라나게
해야겠습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믿음/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8월11일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7,14-20: 믿음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
간질병이란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꽤 큰 시차를 두고 사람을
공격하는 병이다. 증세가 나타나지 않으면 정상인과 똑같다. 증세가
나타나면 정신을 잃고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다가 멀쩡하게 일어나는
병이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겉으로는 건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간질병이 공격을
하면 그들은 사기와 이 세상의 갖가지 욕망에 사로잡힌 것처럼 되고
만다.
예수께서 산에 계시는 동안에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그 아들을 고쳐달라고 제자들에게 갔으나,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마태 10,1) 그 아들을 치유하지 못했다. 그
아버지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그 앞에 꿇어
애원하고 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15-16절)
이를 보신 예수님은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17절) 하시고 호통을 치셔서 마귀를 나가게 하시고 그
아들을 낳게 해주셨다.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다. 많은
신자들이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에 대하여 실망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이기에 예수님께 확실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19절) 제자들은 마귀를 몰아내는 권능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는 권능까지 받았는데(마태 10,8 참조) 자신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은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20절)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러한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르 9,29) 다른 사람 안에 든 마귀를 쫓아내려 기도하는데, 자신의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는가! 이 기도와
함께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완전한 믿음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산은 간질병 환자의 경우 귀먹고 말 못하는 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로 말미암아 인간들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에는 하느님과
가깝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 아픔, 고통에 응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의 일치는 바로 나의 이웃들과의 일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제2의 마리아, 클라라
2018년 나해 8월11일 토.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제2의 마리아, 클라라
언젠가 아시시에 들렀을 때의 경건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특히 클라라 성녀와 동료 수도자들이
기거했던 다미아노 성당에 들렀을 때, 그 가난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눈에 선합니다.
그 좁디좁은 공간에서, 처참할 정도의 청빈한 생활 가운데서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자매들과 함께 찬미가를 불렀던
클라라였습니다. 가난이라고 다 똑같은 가난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웬일인지 그녀의 가난은 우리들의 옹색하고 남루한
가난과는 달리 찬란하고 영롱했습니다.
클라라의 생애는 한 마디로 성모님 생애의 복사판이었습니다. 회심,
그리고 출가이후 그녀가 일관되게 유지한 삶의 모습은 성모님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주님의 여종!
그녀는 자신의 인생 여정의 롤 모델로 성모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클라라는 동정녀이신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정배로서, 지존하신 하느님의 충실한 딸이자 겸손한 종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가 만삭인 엘리사벳을 찾아가 봉사하였듯이 클라라는
겸손한 여종의 모습으로 동료 수녀들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때로
인정 많은 어머니처럼, 때로 절친한 친누이처럼 동료 수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가난하지만 찬란한 여인의 신앙 여정을 충실히
동반해주셨고, 그녀가 계획했던 사명을 충실히 완수할 수 있도록
평생에 걸쳐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프란치스코를
향해 제2의 그리스도라고 칭했습니다. 그녀 역시 제2의 마리아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클라라는 프라하의 공주 아녜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자신의 각별한
성모신심을 표현했습니다.
“감미로운 성모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늘도
담을 수 없는 위대하신 주님을 작지만 거룩하신 당신의 태중에
품으셨습니다. 그대도 성모님의 발자취를, 특히 그분의 겸손과 가난의
발자취를 따른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대의 순결한 몸 안에 주님을
항상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클라라 성녀의 시성 절차의 증인으로 출석한 한 동료 수녀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이미 지상에서부터 제2의 마리아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세상을 하직할 순간이 다가오자 성모님께 남겨질 자매들을
보호해주실 것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이에 성모님께서 기쁘게
응답하셨답니다. 선종하기 사흘 전, 그분께서는 거룩한 동정녀들의
무리와 함께 내려오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흰 베일로 그녀의 몸을
덮고 친구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그녀를 향해 몸을 굽히는 순간 두 분의 얼굴이 합쳐지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두 분의 얼굴이 너무나 닮아 구별할 수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렇게 클라라의 얼굴은 성모님의 빛나는
얼굴의 거울이었습니다. 평생에 걸친 클라라의 삶은 빛나는 성모님
삶의 반영이었습니다.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생활성서,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마태 17,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8월11일 토.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마태 17, 20)
서로의 길을 응원하고 밝혀주었던 클라라 성녀의 축일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언제나 회개와 청빈의 길로 구체화됩니다.
순명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성녀의 순명과 가난은 기도로 더욱 서로를 빛나게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을 공동체의 삶으로 더욱 가치있게 하였습니다.
함께 걸어가는 것이 복음의 참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또한 소유하지 않는 내적 기쁨의
새로운 걸음을 내딛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녀 클라라의 삶을 통해 우리또한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를 겸손되이 배우게됩니다.
가난으로 하느님께 주시는 기쁨을 받아들이게 되듯
우리의 믿음으로 하느님께 주시는 온전하신 사랑을
우리의 삶으로 기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강력한 사랑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을 온통 설레게 하는 하느님 사랑을 가난으로 맡겨드립시다.
가난이 믿음이고 가난이 기쁨이고 가난이 사랑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난을 통해 찬미받으소서.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카더라통신 : 오늘의 능력 말씀
2018년 8월11일 토요일
오늘은 “카더라통신”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 말씀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카더라통신은 경상도 사투리 카더라를 이용한 신조어입니다.
“아무개가 ~라고 하더라” 식으로 정확한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소문을 사실처럼 말하거나, 소문의 출처로 ‘아는 사람’,
‘어느 잡지’, ‘예전에 모 방송’ 등의 모호한 출처를 사용해 나름의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소문을 퍼트리는 것을 ‘카더라 통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카더라 통신을 좋아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진리를 “혹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거짓뉴스를
흘려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래도
‘카더라’식의 말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알라” 말씀하십니다.
출처도 없는 사탄의 소리에는 철저히 귀를 닫고 참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 기울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눈높이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8월11일 연중 제18주간 토요일(마태17,14-20)
눈높이 사랑
예수님께서는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시며 불평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사람들의 불신의 태도에서
왔습니다. 당신의 구원활동에 대해 배은망덕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히브5,7). 예수님께서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심은
우리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의 눈높이로
품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께 와서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하고 말씀하시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능력은
믿음 안에서 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살아나고
기적을 가능케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배를 떠나 물위를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 능력을 주십니다. 아니 나를 통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어떠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믿고 바라보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면 고통만
키우게 됩니다. 바오로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피1,29).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마태28,20)을 믿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믿음에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분명히 그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믿는 만큼 체험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음식을 나누시고 앞 못 보는 이의 눈을 침을 발라 뜨게
하셨으며 때로는 병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고 믿음으로 구하는
곳에는 어디에든 마다 않고 계셨습니다. 성전 정화를 위해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마태21,12)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지셨으면서도
그것을 뽐내지 않으시고 필요한 이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며
기쁨이 되어 주셨으며 모든 사람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주님의 품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웃을 향한
눈높이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단지 내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
마음이 비뚤어져 세상에 더 기울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의
동행을 믿으며 나에게는 엄격하되 이웃에게는 한없이 넉넉하길
소망해 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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