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8월24일 금. [(홍)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제1독서 요한 묵시록 21,9ㄴ-14
복음 요한 1,45-51
◈ [서울]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2018년 나해 8월24일 금.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오늘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저의 작은 아버님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작은 아버지는 저의 가능성을 알아주셨고, 제가
사제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방송국에서
일하시다가 정년퇴직을 하셨고 지금은 평창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면서 지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알아보신 것처럼
작은 아버님은 저를 알아주셨습니다.
저는 공부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작은 아버님은 제가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주셨고, 과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적이 오르면
자전거를 사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저는 저를 믿어 주셨던
작은 아버님께 감사를 드렸고,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전거도 선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자전거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예전에 성철 스님의 이야기입니다. 성철 스님께서 모기에 물려서
물린 곳을 긁었습니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비구니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스님 ‘일체유심조’ 아닙니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는데 큰 스님이 체통 없이 가려운 곳을 긁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야 너도 물려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나. 엠이 모임이 있어서 대부도엘 다녀왔습니다. 하루 잘
지냈는데 그만 모기들이 저를 사랑한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중에도
가려워서 긁게 됩니다.
모기에 물리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아물게 됩니다. 하지만 감정이
상하면 마음에 염증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
쉽게 긁을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서 생기는
상처가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이 모른 척하면서 생기는 상처가
있습니다. 험담하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말들 때문에 생기는 상처가
있습니다. 나의 진심을 몰라주고 오해하는 것 때문에 생기는 상처가
있습니다. 조화는 시간이 지나도 색이 바래지 않습니다. 물을 주지
않아도 시들지 않습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본능이 있고, 감정이
있고,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서로 마주 보면 때로 다툼이 있게 됩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살아온
기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좋은 점을 보기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옥에 티는 아주 작지만, 눈에 확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티 때문에 옥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마주보기보다는 같은 곳을 보면
좋겠습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 대화할 수 있습니다. 같은 취미를
가지는 것도 좋고, 같은 신앙을 가지는 것도 좋습니다. 함께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본능에 따라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삶의 목적과 가치를
따지지 않는 삶입니다. 다음은 감성에 따라서 사는 삶입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울고, 웃는 삶입니다. 이것은 동물과는 다른 삶의
시작입니다. 다음은 이성에 따라서 사는 삶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설정합니다. 도덕과 계명이 있고, 仁義禮智와
같은 덕을 삶의 가치로 여기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부끄러움을 알고,
겸손함을 알고, 자비로움을 알게 됩니다. 다음의 단계는 오성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4차원의 세계를 사는 것과 같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참된 나를 알고,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소유와 명예,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바로 그와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기쁨과 평화 그리고
자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는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신앙의 시작은 무화과 잎을 떼어내는 것으로부터
2018년 나해 8월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신앙의 시작은 무화과 잎을 떼어내는 것으로부터>
복음:요한 1,45-51
‘데블스 에드버킷(악마의 변호인)’(1997)은 인간의 허영이 자신을
거짓으로 이끌고 그것이 악마의 노리개가 되게 만드는 원천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입니다.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잘 나가는 변호인. 그는 학생을 성추행한
선생님을 변호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의 말을 믿었지만 차차 그
선생님이 진짜 범행을 저질렀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재판이
시작되었고 자신의 커리어를 망칠 수 없어 폭행을 당했다는 학생을
몰아붙여 이번에도 변호를 성공하여 무죄로 이끕니다.
이렇게 유명해진 그는 아주 큰 회사의 변호사로 취직하게 되고 그
회사를 위해 불법을 저지른 거부들을 변호하며 유명해져갑니다.
그런데 그 회사의 회장은 사람의 모습을 한 사탄입니다. 변호사는 그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돈과 음란과 허영 속에서 아내가 미쳐가는
것에도 무관심하게 됩니다. 결국 아내는 자살하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런 생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그
회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데, 바로 그때
다시 처음 선생님을 변호하는 자리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잠깐의
꿈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첫 패배가 되겠지만 선생님이 아이를 폭행했다며 아이의
편을 들어줍니다. 진실을 거부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와 평범하게 사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 위대한 결정을 신문에 내야한다고 기자가 다가옵니다. 물론 처음엔
그를 물리치지만 또 그 정도는 뽐내도 되겠다는 마음에 인터뷰를
허락합니다. 그때 그 기자가 회장의 얼굴로 변합니다. 사탄은 여러
가지 얼굴로 우리 주위에서 허영심을 이용하여 우리를 악으로
빠뜨립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게 무슨 큰 공로라고
유명해지려고 했던 것일까요?
거짓을 말하며 살아야 하는 삶은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나 그
비참함을 알면서도 순간적인 위기를 모면하려고 진실을 숨기고
거짓을 말하기 일쑤입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자아는 명예욕이기도
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숨기려고
위선자가 되게 만듭니다.
처음 거짓을 말하기 시작했던 사람이 아담입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립니다.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모습을 이미 정해놓았기 때문에
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그렇게 한 것이고 그런 것에
하느님께서 속을 줄 압니다.
야고보 사도는 자신의 죄를 서로 고백하라고 하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야고 5,16 참조).
이것이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마귀의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죄를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치부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십시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깔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다 거짓말쟁이이고 그렇게 죄를 고백할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오히려 존경합니다.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 참된 하늘나라의 백성입니다. 진실됨 하나로
참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칭찬을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축일을 맞는 바르톨로메오 사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르톨로메오를 보시며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은 바로톨로메오를 알아보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 예수님은 알쏭달쏭한 대답을 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바로톨로메오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필립보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난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참된
이스라엘 사람은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났다고 하면 믿지 않을
것입니다.
무과화나무는 믿음이 주제가 될 때 등장하는 나무입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잃은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거짓을 말하기 시작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르톨로메오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대로
거짓 없이 필립보에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지는 않을지라도 이 솔직함을 칭찬한 것이고 그
솔직함을 지닌 바르톨로메오는 아주 쉽게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솔직하지 않은 신앙인보다 솔직한 불신앙인이 더 하늘나라에
가깝습니다. 이에 바르톨로메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거짓말쟁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쟁이는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바르톨로메오처럼 진실하다면
어린이처럼 쉽게 하느님을 믿게 됩니다. 아주 작은 거짓말도 해서는
안 됩니다. 착한 거짓말이라고 하여 거짓말까지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거짓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짓은 그냥
나쁜 것입니다.
잘한 것을 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을
감추는 거짓에 가깝습니다. 부끄러운 것들을 말해야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밝혀야합니다. 자신을 가리는 무화과 잎을 떼어내어야 주님
앞에 서고 주님도 그 앞에 서십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열게 만들기 위한 첫 번째 행동은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어 솔직해지려는 노력입니다. 이것만 할 수 있어도
하늘나라 백성이라 불릴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8월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성 바르톨로메오는 그가 12사도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없는 분이다. 그는 필립보의 소개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는 평을 들었던 나타나엘과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아르메니아와 인도에서 전교하였다고 전해지며 순교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복음: 요한 1,45-51: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그가 만난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나자렛 출신”이라고 소개한다(45절).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메시아에 대한 회의를 갖는다. 즉
메시아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결코 대단하지 못했던
촌락이었던 나자렛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서나
랍비들의 문헌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었던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46절)라고
하였던 것이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권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었다.
처음에 필립보의 말을 듣고는 회의를 가졌던 나타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 대한 관심과 신뢰를 드러냈다. 바로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
압도되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하게 된다(47-49절). 어떻든
이렇게 믿음을 가진 나타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약속을 하신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50-51절). 즉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싹튼 그 신앙이 예수님의 계속적인 계시를 통해 커질
것이며, 확고하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은 자기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고정관념에
편견에 싸여있는 그 마음에서 나타나엘의 속마음을 알아보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과
기원을 드린다면, 그것을 알아주실 것이며, 결국은 우리도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나타나엘이 예수님께로부터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하고
칭찬을 들었듯이 우리 자신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갖는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춘다면, 오늘의 이
복음 말씀을 올바로 사는 것이며, 우리의 모습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천사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삶의 노력을 주님께 바쳐드리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스승님은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요한 1, 49)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8월24일 금.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요한 1, 49)
끊임없이 신앙고백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신앙고백안에 생명의 참된 길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됩니다.
신앙고백의 자리는 언제나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서 간절히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의 여정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걸어간 신앙의 발자국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더 내딛으며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내면을 변화시키셨듯이
우리의 내면까지도 변화시켜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기쁜 축일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참으로 살아 있는 유일한 길은?
2018년 나해 8월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참으로 살아 있는 유일한 길은?
열두 사도들 가운데, 언제나 한 쌍으로 붙어다니는 두 제자가
있습니다. 필립보와 나타나엘(바르톨로메오) 사도입니다. 두 사람은
아마도 깊은 우정 관계를 맺고 있던 절친이자 영혼의 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난 필립보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그 오랜 세월 기다려온 메시아시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그분이야 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떠오른 생각이 ‘한시라도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절친
나타나엘에게 전해야겠다. 어서 빨리 친구에게 우리 주님을
소개해드려야겠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나타나엘의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복음 1장 46절)
그도 그럴 것이 나타나엘은 나자렛보다 조금 큰 고을이었던 카나
사람이었습니다. 나자렛과 카나 사이의 거리는 약 8킬로미터
정도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환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나타나엘이 살았던 카나는 우리 나라로 치면 나타나엘은
군청이 있는 읍 소재지였고, 예수님 고향인 나자렛은 면사무소가 있는
면 소재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나타나엘은 ‘그 척박한 깡촌’에서
메시아가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된 친구의 초대 앞에 나타나엘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나섰습니다. 아예 애초부터 귀를 막고 눈을 막아버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는 크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 마주 선 나타나엘, 그분의 얼굴을 대면하는 즉시,
그분의 말씀, 그분의 인품, 그분을 감싸고 있는 특별한 분위기에 완전
매료되고 맙니다.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그리고
즉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수용하게 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복음 1장 49절)
그도 그럴 것이 나타나엘은 평소 기도에 열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것 처럼, 그는 ‘무화과 나무 아래 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왜 무화과 나무 아래 서 있었으며, 거기서
무엇을 했을까요?
팔레스티나 사람들의 전통에 따르면, 당시 기도 좀 한다는 사람들은
주로 선선한 무화과 나무 그늘 아래서 기도를 했고 묵상을 했습니다.
나타나엘은 평소부터 진리를 찾기 위해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던
구도자였던 것입니다.
나타나엘와 필립보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님을 메시아로
당당하게 고백했지만, 아직도 그들 믿음의 기반은 튼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부족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그들의 신앙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좁은 전망,좁은 시야, 나약한 신앙을 더
키우고 넓히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자극하고
격려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복음 1장 51절)
충만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도 자아의 가장
깊숙한 곳을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이요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참으로 살아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현존과 실재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개미에게 배우라.
2018년 8월24일 금요일
오늘은 “개미에게 배우라”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마서 5장 4절 말씀에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병사가 전쟁 중에 적에게 쫓겨서 폐허가 된 건물 구석에 오랜 시간
숨어 있었습니다. 그 절망의 상황에서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개미 한
마리가 자기 몸보다 훨씬 더 큰 곡식 알맹이를 물고 벽을 넘어가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개미가 과연 그 벽을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개미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개미는 곡식 알맹이가 무거워서 벽을
오르다가 떨어지고, 기어오르다가 또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재미가 있어 몇 번이나 넘어지면 포기할지 헤아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개미는 69번째 실패하고 70번째 드디어 성공하고
벽을 넘어갔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병사는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실패 또 실패 또 실패! 거듭되는 실패로 낙망 되십니까?
낙망치 않고 도전하는 개미를 보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와서 보시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8월24일 금.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요한1,45-51)
와서 보시오.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라 합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래서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거듭 말했습니다. 결국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권고에 따라 발길을
옮겼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필립보의 거듭된 권고는 우리에게 주님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내를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나타나엘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모든 것을 꿰뚫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의
은총은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도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나의
은혜로움을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삶의 모범을 통해 주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나의 모습을 이웃이 보게 될 때 주님을
더욱더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한 논쟁을 피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이 얼마나 큰 장애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이라는 별 볼일 없는 촌동네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 메시아는 유다 땅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주님을 알아보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안 되나요?’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은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열린 마음으로 상황과 사람,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
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조 야곱이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층계를 보았는데,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내용입니다(창세28,12-13).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층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는 곧 예수님 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매 미사 안에서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통해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구원을 체험하며
‘와서 보시오’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라삐 전통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나타나엘의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나만의 고요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기 위해 하루 일과 중에 구체적으로 언제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인지 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주님을
위해 바쳐지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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