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8월26일 [(녹)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 여호 24,1-2ㄱ.15-17.18ㄴㄷ
제2독서 에페 5,21-32
복음 요한 6,60ㄴ-69
◈ [서울] 연중 제21 주일
2018년 나해 8월26일 연중 제21주일
서울시장이 옥탑방 생활을 하였습니다. 방송국에서 시장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옥탑방에서 지내는 것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기자의 질문에 시장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우문현답입니다. 이 말의 본래 뜻은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현명하게
답을 한다는 뜻입니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시장은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습니다.”
성소국에 있으면서 본당 방문을 하였습니다. 사무실에서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본당 방문을 통해서 배우는 것도 많았습니다. 본당
신부님도 교구에서 찾아 주니 좋아하셨습니다. 성소 후원회
회원들께서도 힘이 난다고 말하였습니다. 미사에 함께하면서 성소국
소개를 해 드렸고, 성소 후원회 모임에 참석해서 본당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소국의 소식지인 ‘부르심’에 담았고,
다른 본당의 성소 후원회 회원들께서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지구
사제회의에도 참석해서 신부님들께 성소국 안내를 하고,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역시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굶주린 이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악의 세력에 물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자캐오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아파서 죽어갈 때도 기꺼이 가셨고 살려 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서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호수에서도, 산에서도, 거리에서도, 집에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도 현장에 답이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둘씩 짝을 지어서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아픈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고,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제자들을 격려해 주셨고,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현장에 있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육적인 삶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적인 것이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사람들이 말 위에 십자가를 올려놓았습니다.
말이 십자가를 등에 지고 행렬을 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경배를 하는
것입니다. 분명 말이 지고 가는 십자가를 향해서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은 자신을 향해서 사람들이 경배하는 줄 알고, 기분이
좋아서 앞발을 크게 들었고, 몸을 흔들었습니다. 급기야 말 등에 있던
십자가는 떨어지고, 사람들은 더는 말에게 중요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말은 이제 무거운 짐을 지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말은
왜 사람들이 경배하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많은 젊은이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혼인을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습니다. 많은 부부가 함께 살면서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급기야는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헤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사랑이 식어서 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혼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친정아버지처럼 해
주기를 바라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엄마처럼 해 주기를 바라면 역시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발을 한쪽씩 묶고서 달리는 이인삼각 경기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뛰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호흡을 맞추어서 목적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서로의 발을 묶는 것은 결코 편하고,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분명 불편하고, 빨리 달릴 수 없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잘 돌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둘이지만 혼인을 통해서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교회를 돌보았다고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나와 내 가족은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러자 온 백성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다니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끌어내신 분이 바로 주님이신데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사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선택은 소중한 것이고, 그
선택은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선택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선택한 우리 신앙의 집을 아름답게 꾸며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다른 많은 제자는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고, 예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나의 신앙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신앙인지
돌아보고, 주님을 충실하게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에 ‘결단’이 없으면
2018년 나해 8월26일 연중 제21주일
<믿음에 ‘결단’이 없으면>
복음: 요한 6,60ㄴ-6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시니
그동안 그분을 따라다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이상 그분을
따라다니지 않게 되었다고 나옵니다. 그만큼 성체성혈의 신비는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철저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는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이 성체성혈의 신비를 이해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떠나지 않느냐는 말에 베드로는 사도들을 대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자신들이 찾는 것을 가지신 분은 예수님뿐이시고 예수님이 아니면
다른 갈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갈 곳이 없다는 뜻은 온전히
투신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전한 투신은 완전한 결단에서
나옵니다. 완전한 결단은 그것 외에 다른 행복은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탈출구를 만들어놓고 상황을
살핍니다. 양다리를 걸친다 할 수 있습니다. 제 1 옵션이 실패하면 제
2 옵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차하면 도망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믿으려면 내 온 존재를 투신해서 믿어야지 ‘만약’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투신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비록
잘못된 믿음을 가진다하더라도 주님께서 바로잡아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처음엔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진리를 위한 길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하느님은 그 열정을 당신을 위해 쓰도록 만드셨습니다. 확신해서
하는 것은 죄가 되더라도 죄가 아닙니다. 확신 없이 하는 것은 죄가
아니더라도 죄가 됩니다. 확신이 없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결단하지 않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갈
곳이 없는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한 주술사의 말을 믿고 인도에서 스웨덴까지 6,000킬로를 달려간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본래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 학교에도 다닐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계를
유지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림솜씨는 지역신문에 실릴 만큼
좋았습니다. 하지만 어찌 불가촉천민이 사람의 얼굴을 뻔히 쳐다보며
그림을 그리느냐고 괴롭힘이 이만저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한 주술사를 만나고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운명의 짝을 만날 것인데, 그녀는 사자자리의 먼
나라에서 올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에 조예가 깊고 큰 숲을
소유할 만큼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청년 마하난디아는 어이가 없어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며칠 뒤 스웨덴에서 온 사자자리 여학생 샤롯테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피아노 전공의 19살 소녀였고 큰 숲을 가진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마하난디아는 첫 눈에 반해 그녀에게 일부러
초상화를 잘못 그리며 자신을 여러 번 만나러 오도록 했습니다.
매번 초상화를 망치자 샤롯테는 화를 냅니다. 그러자 마하난디아는
주술사의 예언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운명의 여자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습니다. 샤롯테도 싫지 않았는지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샤롯테는 여행기간이 끝나자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야 했고 마하난디아는 다시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2년 후 샤롯테를 잊지 못하던 마하난디아는 샤롯테가 보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남은 돈은 낡은 자전거를 한 대 살만한
액수였습니다. 그는 무려 4달 동안 6,000킬로미터를 밤낮없이
자전거를 타고 샤롯테를 향해 갑니다. 여비는 중간 중간 초상화를
그려주며 충당하였습니다. 결국 그녀의 집에 도착하여 청혼을 합니다.
둘은 결혼하였고 마하난디아는 정식으로 미술을 배워 세계
유명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로서도 큰 성공을 거둡니다.
영국의 BBC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이
둘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젠 60대가 되었지만
마하난디아는 여전히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녀를 만나야했지만 돈이 없었죠. 그래서 사랑을 위해 페달을
밟았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1975년 그때처럼 지금도 샤롯테를
사랑합니다.”
어쩌면 샤롯테가 떠났을 때 마하난디아는 주술사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해 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인도에 머물면 최하층 계급으로
살아야하기에 희망이 없습니다. 그는 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늦게나마 주술사의 말을 자신의 온 존재를 내어던질 정도로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그것을 위해 다른 것을 끊는 노력과
함께 병행돼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론 유배 때 페르시아 왕국으로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첫 왕인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국으로
돌려보내어 성전을 재건하고 그들의 신을 섬기라고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자신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
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바빌론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차피 거기서도 희망이
없기에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돌아와서는 그들을 음해하는 세력 때문에 성전을 재건하는 노력을
포기하고 각자 자신의 집을 짓는 데만 더 신경을 씁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떠나는 이들의 미지근함을 질책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영과 육은 서로 반대가 됩니다. 육체의 만족을 채우면 영적인 만족은
줄어듭니다. 미지근한 믿음은 세상 욕심과 하느님을 둘 다 추구하려는
데서 생깁니다. 예수님은 뜨겁거나 찬 것을 좋아하십니다.
만약 마하난디아가 부자이고 상류층계급으로 그 곳에서도 충분히
그림을 그리며 잘 살 수 있었다면 6,000킬로를 자전거로 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갈 곳이 없는 것,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어차피 손해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떠나간 이들은 갈 곳이 있었던 것이고, 사도들은 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 곳이 많은 사람들은 온전히 믿고 사랑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갈 곳이 없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외에 아무 것도 희망할 것이 없는 이들입니다.
세상에선 더 이상 그들에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행복이 아니시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가난한 사람들이어야 하느님을 차지합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당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가 아니면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어서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을 내어놓을 수도 있는 믿음을 찾으십니다. ‘놀러갔다
와서 고해성사 하면 되지’라는 식의 믿음은 이미 절대적인 믿음이
아니라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우리 신앙을 무디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결단이 없으면 어려움이 닥칠 때 그 작은 믿음도 잃을 수
있습니다. 육적인 즐거움을 끊고 영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영웅적인
신앙인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 29일까지 휴가기간이라 강론을 올리지 못합니다. 돌아와서
뵙겠습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요한 6, 68)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8월26일 연중 제21주일.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요한 6, 68)
언제나 가장 소중한 관계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관계의 소명에 저마다 충실하길 기도드립니다.
매일매일이 회개의 중요한 날들이 됩니다.
회개로 우리자신을 정직히 주님께 봉헌하게됩니다.
오늘을 기쁘게 따르기위해서는 타성에 젖은
어제를 떠나 보낼 수 있어야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어제를 떠나 보내야
하느님 중심적인 오늘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진실된 방향전환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생명과 사랑의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섬기는 길입니다.
섬기는 삶은 기도의 삶입니다.
기도는 가장 좋은 주님과 함께 있도록 우리마음을 변화시켜줍니다.
주님께 우리자신을 맡겨 드리는 믿음이 없기에 떠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는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 참행복이며 참자유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이 우리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으신 주님을 이제는 떠나지 않길 결심합시다.
이미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주님을진심으로 믿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끝까지 남아있어야겠습니다!
2018년 나해 8월26일 연중 제21주일
끝까지 남아 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끝까지 남았던 제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많은
제자들이 그분을 떠났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매료되어 입교를 하고 세례를 받았지만, 죽는
순간까지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수도원이나 신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불충실과 떠나감은 나약한 우리 인간의 현실을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안에서 그리도 중요한 것이 충실성,
지속성, 항구성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하면 흔히 열두 사도가 먼저 떠오르는데, 사실
그분들은 예수님의 핵심 제자단이었고, 그분들 외에도 훨씬 더 많은
제자들이 그분을 따랐습니다.
예를 들면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교육시킨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그 뒤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보내시며...”(루카 복음 10장 1절) 일흔두 제자 말고도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제자들은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한 가르침을 계기로 많은 제자들이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말씀,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복음 6장 51절)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생명의 빵과 관련된 심오한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많은 유다인들, 그리고 제자들마저, 그 말씀 끝에
떠나갔습니다.
유다 전통 안에서 금기 단어였던 ‘살’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라는
그분 말씀이 사람들의 귀를 거슬리게 하고 거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뒷담화를 하고
투덜거리면서 결국 떠나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과 헌신으로 거룩하게 변모된 살, 당신의 육화
강생으로 새롭게 된 영적인 살, 하느님 아버지와 더불어 영생을 누릴
영원불멸의 살을 말씀하셨지만, 떠난 사람들은 썩어없어질 살, 세월
앞에 진토가 될 한시적인 살로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시고,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기적까지 행하시면서 당신 백성들을 구원에로 초대하셨지만, 끝끝내
떠나가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참으로 착찹하고 슬펐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측은지심과 동시에 짙은 비애로 가득했던 예수님께서
남아있던 열두 제자들에게도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가고 싶으나?”
(요한 복음 6장 67절)
기특하게도 대견스럽게도 베드로 사도가 오랜만에 예수님을 크게
위로하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고백, 주님 마음에 드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복음 6장 68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떠나갔고, 또 지금도 떠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오늘 우리를 바라보실 주님의 마음, 마찬가지로 착찹하고
괴로우실 것입니다. 우리만큼은 어떻게서든 끝까지 남아
있어야겠습니다.
교회가 실망스러우면 실망스러울수록 더 많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작고 미성숙한 신앙이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겠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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