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0월12일 [(녹)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제1독서 갈라티아서 3,7-14
복음 루카 11,15-26
◈ [서울]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10월12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연수원에서 함께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미사, 식사, 강의, 공동체의
날입니다. 미사는 주례가 정해져 있습니다. 주례를 하는 신부님은
강론을 준비합니다. 식사는 자유롭게 하지만 꼭 식사여부를 체크해야
합니다. 음식의 양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는 정해진
시간에 모두 모여야 합니다. 다 모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모두들 시간을 잘 지켜서 기다린 적은 없습니다. 공동체의 날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고, 건의 사항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느낌을
나누고 있습니다. 꼭 지켜야 한다고 강제하지는 않지만 모두들 잘
지켜주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수원에서 자신의 재능을 나누어 주는 분들을 봅니다. 제주도에서 꼭
가봐야 할 아름다운 장소를 소개해 주는 분도 있습니다. 제주도의
맛집을 소개해 주는 분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사진으로 올려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친교실에 간식을 넣어주는 분도 있습니다.
모임을 주선하고 예약을 해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공항에 가는 분을
위해서 차량봉사를 해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연수원 생활이 풍요로운
것은 정해진 약속을 지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서로를 위한 배려와
자신의 것을 나누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단식을 하면 좋은 날
사람들에게 불안을 준다고 비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고, 표징을 보여주었더니 사람들을 선동한다고
비판합니다. 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소경이 눈을 뜨고, 갇힌 이들이 자유를 얻고, 아픈 사람들이
치유되는 현장을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자렛에서
저렇게 멋진 예언자가 나올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완고함이 하느님의
아들까지도 마귀의 힘을 빌린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와 같은 완고함은
2018년 대한민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무질서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잘
지은 집도 3년만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먼지가 쌓이고, 엉망이 되곤
합니다. 집 앞의 텃밭도 한해만 돌보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착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와
함께 있어야 안전하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세력은 힘들고 어려운 일 속에서도 우리를 넘어트리지만, 즐겁고
기쁜 일을 통해서도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일지라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아가는 우리들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려는
사람을 조심하라
2018년 나해 10월12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려는 사람을 조심하라>
복음:루카 11,15-26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잘생긴 소년 나르시소스는 많은 요정들의
사랑을 독차지합니다. 하지만 목동이었던 그는 일만 할뿐 요정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나르시소스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한
요정이 이젠 복수의 칼을 듭니다. 복수의 여신을 찾아가
나르시소스에게 저주를 건 것입니다.
얼마 뒤 양떼를 몰고 호숫가에 들렀던 나르시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반해 사랑에 빠집니다. 그 모습이 자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나르시소스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다 굶어죽습니다.
잘못된 사랑은 저주입니다.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세상 것에 대한
사랑은 저주입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나르시소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저주는 바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살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죽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이 문제인 것입니다. 마귀란
사랑하는 대상을 하느님에서 세상 것으로 바꾸어놓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인간이 파괴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께 어떤 이들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그런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마귀가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느냐며 한 나라가 갈라지면 반드시
망하게 되는데 이는 마귀들의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한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고 그 사람의 주인이 되어 그
사람을 지켜주십니다. 그 지키는 방법은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시 주인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면 다시
더 많은 마귀들이 그 집을 차지하게 됩니다. 자기보다 훨씬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온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주인은 ‘욕구’입니다. 욕구는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좋아하고 있다면 그 집은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다른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을 ‘칠죄종’
이라 합니다. 죄는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칠죄종은 ‘교만, 욕심, 시기, 분노, 음욕, 탐식, 나태’입니다. 이것이
일곱 악령이고 일곱 욕구입니다. 악령이 자아내는 것이 욕구인데
교만은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욕구이고 욕심은 물건을, 시기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만약 그 욕구를 채우지
못하면 분노가 일고 그 부족한 것을 탐식이나 음욕, 그리고 나태로
채우려합니다. 이 모든 욕구는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욕구입니다.
나르시소스는 자신을 좋아하는 욕구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아닌 다른 무언가를 좋아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을
망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르시소스가 자기 얼굴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날 수
없게 되어 죽게 되는 것이나,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집착하게 만들어
죽게 만드는 것이나 같은 악령이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아닌 어떤
욕구도 우리를 망치게 만듭니다.
누구나 인기 있고 싶어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저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악한 욕구를 넣어주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좋아해봐야 그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고통만
커집니다. 그것을 알면서 자신을 계속 집착하게 만드는 것은 마치
고문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좋아해 달라는 사람을
조심해야합니다. 그 요정이 나르시소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악한 욕구에 우리를 걸려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좋아하게 만드는 사람만이 진정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주님 편에 있는 사람/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0월12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1,15-26: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는 그분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는 하늘의 표징을
보이라고 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냐 아니면 베엘제불에게서 온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분의 답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답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짓부순다는
사실을 알라는 말씀이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면”(20절) 여기서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을 뜻한다.
그러면 팔은 누구를 말하는가? 아드님이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모든 일을 하신다. 몸-팔-손-손가락은 한 몸이다. 그러므로
마귀를 쫓아내시는 일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의 행위이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분이시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분이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마귀를 쫓아낸다면, 인간 본성이 그분 안에서 먼저 하느님
나라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 본성이 사탄의 힘을 꺾고 더러운 영들을
꾸짖음으로써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절)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21-22)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사탄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하느님의 것인
양들을 멋대로 끌고 다니며 자기 우리에 가두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자 사탄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전리품이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매여 불경과 잘못을 저지르던 자들을
구원하시어 진리 안에서 아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 이 때문에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23절) 사탄은 예수님 편이
아니고, 그분을 반대한다. 예수님께서 모으신 것을 흩어 버리려 하는
사탄이 예수님을 도와 자기를 무너트릴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자들이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더러운 영이 우리 안에 살았다. 다른
신을 섬기고 온갖 죄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비로
우리를 받아 주셨고, 우리 마음의 집은 모든 죄가 깨끗이 치워졌다.
그 안에는 성사들이라는 가구로 채워졌다. 이제 그 집은 어떤 집이
되어야 하느냐?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성전이 되지 못하면 또다시 더러운 영이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26절) 어떻게 할까?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루카 11,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0월12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 23)
예수님조차도 마귀로 몰아가는 우리의 오만함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세상에는 어둠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둠을 빛으로 밝히시고 마귀를 끝내 추방하시는
예수님이 우리가운데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피나는 싸움을 멈추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모두를 살리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힘보다는 하늘나라의 사랑으로
우리의 교만한 자아를 조금씩 정화시켜 나가십니다.
우리의 내면이 일치와 평화로 나아가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아들이는 겸손의 여정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10월12일 (금) - 생명의 떡
오늘은 “생명의 떡”에 대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48절 말씀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어릴 때 예수님의 떡이라 할 때 한 순간은 참 좀 섬뜩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떡이라고 말하고 그 떡을 먹는 자 예수님을
먹는 자는 죽지 않고 산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저는 이 말을 들으며 오랜 시간동안 고민을 했지요. 하지만 우리는
바로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적 양식을 채우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위로를 받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살아갈 수 가 있습니다. 이 말은 마치 내가 A라는 회사에 다니면
A라는 회사가 나를 먹여 살린다는 말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떡입니다. 이 떡은 이 땅에서의
양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죽어 이 땅을 떠나 하늘나라에 가도
영원히먹고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떡이라 함은 배고플 때 한두 번 먹고 마는 이 땅의
떡이 아니지요. 영원히 먹고 배부르고 영원한 양식 걱정거리가 없는
이것이야 말로 참 영원한 떡 바로 생명의 떡 예수님의 삶의 전부를
우리가 소유하고 얻고 함께 사는 떡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마귀를 물리치는 길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0월12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루카11,15-26)
마귀를 물리치는 길
마귀라는 말은 ‘중상자’, ‘고자질쟁이’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에 대적하는 이 세상의 왕 또는 악한 세력입니다
(루카4,6. 2고린4,4). 그래서 하느님을 사칭하고(2테살2,4) 하느님
일에 반대하며(마태16,23), 악인을 조종(에페2,2)합니다. 인간을
모함(욥기1,9-11)할뿐 아니라 유혹(2코린11,3)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유혹(루카4,5-7)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좆아 내셨는데 그에
대한 반응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 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했고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군중의 반응은
이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일을 하고도 뺨 맞는
격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귀의 속성입니다.
주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지만 마귀는 선한 것 안에서
악한 것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참과 거짓의 대립을 놓고 심판관을 자처한다면
아마도 그곳은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 중상, 모략의
마음을 버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는 상태는 이미
천국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한번 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게 될 터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가슴 안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지 내
뜻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루카4,1-14)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12장
28절에는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에페4,26-27)…...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 하십시오”(에페6,1)하고
권고합니다. 묵시록에서는 “우리 형제들은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진리의 힘으로 그 악마를 이겨냈다.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기까지 싸웠다”(묵시12,11)고 말합니다. 결국 마귀를
물리치는 길은 말씀과 성령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힘과 위로가 되고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며 살고 있다면 그를 천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흉보며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마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선을 선으로 볼 수
있고 악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길 희망하며 마귀를 물리치는
사람 되시길 빕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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