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0월14일 [(녹) 연중 제28주일]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7,7-11
제2독서 히브리서 4,12-13
복음 마르코 10,17-30
◈ [서울] 연중 제28주일
2018년 나해 10월14일 연중 제28주일
대통령께서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교황님의 방북을 요청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교황님의 방북이 이루어진다면 여러 가지로 기쁜
일입니다.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새롭게 시작될 수 있고, 교황님의
방북을 계기로 남한의 성직자들이 북한에 파견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성소국에 있을 때 북한 선교를 희망하는 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교황님의 방북이 이루어진다면 국제사회도 북한에 대해서 좀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문을 처음에 열기가 어렵습니다.
한번 문이 열리면 그 문을 통해서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민주와 사랑이
들어갈 것입니다. 이는 총과 칼로는 이룰 수 없는 민족의 일치와
화합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교황님의 방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평화가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어둠에 빛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을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긴장과 갈등의 상징이었던 군사 분계선이 생태계의 보고로 국제적인
문화유산으로 변하면 좋겠습니다. 꿈은 혼자 꾸면 꿈으로 남지만
여럿이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북한이 개혁 개방의 길로 들어서고, 핵무기를 폐기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남한에서 국회의 비준이 이루어지고, 북한에 경제 협력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남한의 경제력과 북한의 자원이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남한의 기술과 북한의 노동력이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꼭 경제적인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5000년을
함께 살았던 우리 민족이 함께 잘사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남쪽이 어려운 북쪽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눈다면
남쪽에도, 북쪽에도 많은 결실이 맺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많은 것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충분히 머물 수 있는 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입을 수 있는 옷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내 가족, 내 이웃, 내
나라라는 ‘틀’에서 벗어난다면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굶주리고, 지금 헐벗고, 지금 아픈 사람들이 나의
이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이 땅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후배 신부님의 ‘꿈’을 들었습니다. 가톨릭 음악인 협회를 만들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노래하는 사람, 작곡하는 사람, 지휘하는 사람,
연주하는 사람들이 등록을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당에서는
필요한 사람들을 신청하고, 협회에서는 본당에 회원들을 파견하는
것입니다. 기금을 마련해서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 소정의 사례금을
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작은 본당에서도 전례 음악이
활성화 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톨릭 음악인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기꺼이 나눌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가톨릭
음악인들이 함께 연주를 할 수도 있고, 가톨릭 음악인들이 정보를
나눌 수 있고, 교구의 교회 음악이 더욱 풍요로워 질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여유 있는 본당이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교구에서
관심을 가진다면 후배 신부님의 꿈도 현실이 될 것 같았습니다. 이
또한 우리가 나눈다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돈으로 커다란 집을 살수는 있어도 그 집안의 화목과 행복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커다란 자동차를 살수는 있어도 그 차를 운전하는
넉넉한 마음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비싼 신발을 살수는 있어도
소외당하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는 예쁜 마음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푹신푹신한 침대를 살수는 있어도 피곤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잠을 살수는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돈의 힘과 능력을 이야기 합니다. 또한 돈의
부작용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돈을 잘 사용할 수 있는 분별력과 지혜입니다. 우리는 가난을 약속한
수도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려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남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궁핍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남을 도울 정도로 여유가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돈이 있어서
교무금과 헌금도 기쁘게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죽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지혜입니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집니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재산이 들여 있습니다. 그 지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운명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2018년 나해 10일14일 연중 제28주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운명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은 참으로 중요한 주제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선물로 주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때로
봉헌생활자로서 재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재물과 하느님
나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부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가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가난의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몇 가지
측면들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청빈생활과 관련해서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부를 죄악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된 부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이자 선물로 여기셨고,
그 축척된 부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가난을 비참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게 가난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내가 가난을
먼저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가난은
자랑꺼리였습니다. 찬미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난하다보니 매이지
않고 자유로웠습니다.
예수님의 가난은 스스로 선택한 가난, 자발적인 가난이었습니다.
가난을 모토로 삶았던 수많은 성인성녀들 역시 예수님의 이런 선택적
가난, 자발적 가난을 추종한 것입니다.
사실 가난은 뭔가 결핍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비참함으로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가난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수도자들에게 주어진 과제 가난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을 결핍과
궁핍함으로,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수도자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수도자들은 부자들을 멀리해서도 안됩니다.
부자들에게 주어진 재물이 자신들의 것이 아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들을 잘 영적으로 인도하고 설득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도록 안내해야 합니다.
부자는 크게 두 가지 부자로 나눠집니다. 안하무인의 부자들과 착한
부자들로 나눠집니다. 절대로 모든 부자들을 싸잡아 경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평생 땀흘리고 정직하게 모아서 일어선 부자들, 박수받아야
하고 축복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부자로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설명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관대한 나눔을 통한 구원의
길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한 신부님께서 얼마 전에 아주 공감가는 한 마디 표현을 해주셨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운명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희 수도자들이 가난을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추종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다보니 그의 운명까지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추구했던 생활 방식이 극단적 청빈이어서 그분의
생활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청빈하게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운명까지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공유하는데서 오는 가난, 그리고 그 자발적 가난의
실천의 결과인 재물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
수도자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 기간 중 수도자들과의 만남 시간 때
청빈과 관련된 말씀이 아직도 강한 울림으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이자 ‘어머니’입니다. 봉헌 생활을 지켜
주기에 ‘방벽’이고, 성장하도록 돕고 올바른 길로 이끌기에
‘어머니’입니다.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수도자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교황님 말씀처럼 우리의 넘치는 생활, 반복음적 생활, 부유한 생활이
그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늘 돌아봐야겠습니다.
청빈에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과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아끼고 절약하며 사는 것,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은 조금은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다양한 가능성과 장점, 강점이 무엇인지를 찾고,
최대한 개발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 정말 근사한
청빈생활입니다.
내게 주어진 24시간이란 보물을 효과 있게 구성해서 보다 충만하고
기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래서 힘겨워하는 이웃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청빈생활이겠습니까?
한평생 게으르게 살지 않는 것, 꾸준히 맡은 일에 충실한 것, 하루하루
보람되게 살아가는 것, 결국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선물이 되어주는
일,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건강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일, 참으로
의미 있는 청빈생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마르 10,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0월14일 연중 제28주일.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 21)
주님께서는 나눌 수 있는 오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줄 수 있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나눔의 삶으로 우리의 삶은 살맛나는 삶이 됩니다.
나누게 될 때 알게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실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기쁨을 알려주십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나눔입니다.
나눔의 삶이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삶입니다.
다시금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삶은 나눔이며 나눔은 기쁨이며 기쁨은 가난한 이들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행복으로 나아가는 나눔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복음임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면
2018년 나해 10월14일 연중 제28주일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면>
복음: 마르코 10,17-30
‘아이언 맨’은 전 세계가 좋아하는 슈퍼 영웅입니다. 아이언 맨은 돈
많은 과학자가 하늘을 나는 기계 슈트를 만들어 어려운 사람도 돕고
지구도 지킨다는 좀 황당하지만 누구나 꿈꾸는 삶을 대변해주는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언 맨’의 실제 모델이 있습니다. ‘테슬라’라고 하는
전기자동차회사를 만든 사람인데 ‘일론 머스크’라고 합니다. 그는
실제로 아이언 맨 영화에도 깜짝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전기자동차의 에너지를 태양광으로 충전시킬 생각을 해서
태양광 회사(솔라시티)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성에 인류를
살게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스페이스 엑스라는 로케트 회사도 만들어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처음 로케트 세 대의 발사가 모두
실패하여 엄청난 손해를 보았을 때 포기할 마음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혀요. 저는 포기를 모릅니다. 제가 죽거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병원에 누워있지 않다면 말이죠.”
그는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본래부터 실패의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본래 돈이 없었습니다. 당장 가진
돈 가지고는 그런 일을 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투자는 항상
무일푼이 되거나 빚쟁이가 되어야하는 위험부담이 있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투자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1달러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돈이 있었는데도 그랬던 것이 아니고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그의 동생과 첫 인터넷 사업을
하며 창업을 할 때 하루에 1달러만 쓰고 한 달을 버틸 수 있는지를
시험한 것입니다. 그는 마트에 가서 30달러를 주고 한 달 동안 먹을
냉동 핫도그와 오렌지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만 한 달을
살아보았습니다. 생각보다 견딜 만 했습니다. 컴퓨터 한 대와
30달러로 일을 하면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안 돼도 한 달에 30달러는 벌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모든 사람이 말리는 일에 투자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성공시킨 사업이 결국 우주 산업까지 뛰어들 수
있게 자금을 만들어준 최초의 인터넷 금융결제 시스템인
페이팔입니다.
지금은 땅굴을 파서 차들이 막힐 때 지하도로로 들어가 자동주행을
통해 목적지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만드는 회사(땅 파는 회사)를
‘정말’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땅굴을 파는 기계를 만들어
땅을 파고 있습니다. 그는 땅 속으로 그리고 우주 밖으로 나아가는 좀
비현실적인 회사를 만들며 지금까지도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대부분은 돈이 없더라도 굶어죽지는 않을 시스템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업이 실패하지는 않을까, 직장에서
해고당하지는 않을까, 자녀가 이혼하지는 않을까 등의 고민으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만약 일론 모스크도 그랬다면 지금의 혁신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모든 재산을 자신의 꿈에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믿음이 바탕이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두려움에
직면하여 보고 얻은 결과물입니다. 거지와 다름없이 가난하게
살아봤지만 크게 나쁠 거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예수님께 달려와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가 율법은 다 잘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가 열심히 살아온 것을
아시자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고
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시며, 그 일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화성으로 가고 싶어서 모든 것을 투자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누리는 하늘나라를 가기 위해 무엇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가진 것을 다 바칠 만큼 간절히 원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투자에는 위험부담이 따름입니다. 하늘나라를
위한 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위험부담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부담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도 마치 밭에 묻힌 보물과 같아서 가진 것을 다
팔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투자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 별로 투자하지 않습니다. 이는 5만원만
투자하고 화성보다 더 살기 좋은 곳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사람과
같습니다. 화성까지 가는데도 완전히 미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영원히 살 곳을 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투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1달러 프로젝트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도 별거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투자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들어가기 전에 좋아졌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군대에
들어가서 편지를 기다리는데 한 통도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7개월
만에 휴가를 나올 때까지 온갖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별의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다른 사람과 사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나를 떠나가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
때문에 혼자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는 그 사람이 없으면 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져 그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갖은 방법을 씁니다. 이것이
두려움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하지만 막상 그 사람이 떠나가도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습니다. 무언가 자유롭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크게 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뜨거운 사우나를 한 번 하고
마음을 접었습니다. 두려움은 항상 자신 안에서 현실보다 부풀려져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전쟁 때문에 죽는 사람의 숫자보다 그 두려움 때문에
스트레스로 죽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두려움의 실재는 별거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현실보다 훨씬 크게
두려워합니다. 우리 자아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일론 머스크처럼 그 최악의 상황을 한 번 살아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신학교 들어가서도 ‘쫓겨나서 신부 못 되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쫓겨나면 프란치스코처럼
거지로 살면서 복음을 전하면 되지 뭐.’라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오히려 사제가 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던 어떤 신학생들은 그
두려움을 스스로 사제가 되지 않으며 극복하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자살로 극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다보면
그 두려운 일이 일어나고야맙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잃는 두려움을 넘어서야 비로소 체험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이 존재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울증을 겪을 때 우주로 나가고 싶다는 젊었을 때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꿈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가난해지는 두려움을
극복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별거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인생에 과감하게 투자하며 꿈을 펼쳐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밭에 묻힌 보물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과연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주님께서
알려주신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 ‘십일조’인데도 그것조차도 내지
못하면 진정 그 뒤에 따라오는 삶을 맛볼 수 없습니다. 정녕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돈인지 천국인지 결정해야합니다. 돈을 잃는 두려움을
넘어서지 못하면 바늘귀 앞에서 망설이는 낙타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면 가진 것을 모두 잃는 두려움을 넘어서야
합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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