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0월20일 [(녹)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제1독서 에페소서 1,15-23
복음 루카 12,8-12
◈ [서울]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2018년 나해 10월20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영국의 BBC 방송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완벽한 인간을 구현해
보기로 했습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결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인간의 모습은 고양이의 귀, 문어의 눈, 백조의 폐, 침팬지의 허리,
타조의 다리 그리고 캥거루의 아기 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는 최적의 조합이라지만 왠지 낯설고
기이했습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결함이 많은 신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력이 금세
나빠지고 감기에 잘 걸리며 발목을 접질리는 일이 허다합니다. 오래
서 있으면 허리와 무릎에 무리가 가고, 인간만큼 임신 기간이 긴
동물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신체적인 결함은 다른 보상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직립 보행을 하면서 손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자유로워진 손은 도구를 잡고,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더
많은 에너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단단한 허리 위에 고정된 머리는 더
큰 두뇌로 발전 될 수 있었고, 두뇌의 발전은 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시력이 나빠지면 안경을 만들었고, 감기에 걸리면
백신을 만들었습니다. 직립보행은 성대의 발전을 가져왔고, 인간은
목소리로 소통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말과 문자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도 신체적으로는 부족함이 많은 편입니다. 지금은 별로 느끼지
않지만 어릴 때는 키가 좀 더 컸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치아가
좋지 않아서 딱딱한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혈압이 있어서 늘
조심해야 합니다. 일찍 새치가 나와서 염색을 하고 있습니다.
신체적인 것은 저의 힘과 능력으로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주셨고,
기억력을 주셨고,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였던 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부하를 죽도록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었고,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토마사도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봐야만 부활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이렇게 허물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완벽함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능력과 업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부족함에도
감사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결함이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잘못을 했지만 뉘우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변화하지 않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일
2018년 나해 10월20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변화하지 않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일>
복음: 루카 12,8-12
‘레 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처럼 빅토르 위고도 커다란
회개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주색으로 집안을 망쳐가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외동딸 레오 폴린의 시체가 세느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유서에는
아버지의 심한 외도와 과음, 거기에 짓눌려 사는 비참한 엄마 때문에
살 의욕을 잃었다고 적혀있었습니다. 위고는 “이것은 나를 향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외치며 반성하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공무원이 되어 헌신적으로 일해 프랑스 교육부장관까지 지내고
프랑스 국기인 ‘3색기’의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앙생활을 하며 그의 문학도 더욱 깊어갔습니다.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통해서여야합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힘은 주님의 피, 즉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레오
폴린의 죽음으로 흘린 피는 아버지를 변화시켰습니다. 만약 딸이 자신
때문에 죽었음에도 회개하지 못하여 이전 삶을 계속 유지했다면 딸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변화가 없다면 변화를 위해 흘린
피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끊임없이 피를 흘려주고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
삶의 변화를 위해 주님께서 흘리시는 피입니다.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삶의 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 선물을 주시는 분에 대해
모욕감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했는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주는 이에 대한 모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대한 모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증언’에 대해 먼저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증언하면 당신도
마지막 심판 때에 증언해 주시겠지만,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모른다고
하면 당신도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성령에
대한 모독을 하면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고 그 피로 변한 나의 삶으로 그분을 증언합니다.
그러니 성령을 진정으로 선물로 받았다면 나의 삶이 주님을 증언하고
있어야할 것입니다.
레오 톨스토이는 ‘나의 회심’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5년 전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나의 전 생애가 변했습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들을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이 좋지 않게 보이고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나는 소위 행운의
무지개를 좇아 살았는데 그 허무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짓으로 나를
꾸미는 것이나 여인들과의 타락한 생활이나 술 취해 기분 좋은 것이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만남은 삶의 변화로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피를 흘려주신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에
대한 우리의 보답은 우리 삶의 변화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성령을 받고도 변하지 않아 주님을 증거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속 돈을 좋아하고 사람을 미워하며 산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쏟으셨던 주님 성령에 대한 모독입니다.
아프리카 어떤 추장의 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족과는 다르게
어떤 축제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선교사가 왜 생일 축제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늙어가는 게 무슨 축하할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이 변했을 때
축제를 벌입니다.”
매일 주님의 성령을 받으면서도 오늘이 어제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차에 기름을 넣고 그냥 흘려버린다면 기름을 넣어주는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듯이 주님의 성령을 받으면서도 삶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주님 선물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그러다가 결국 마지막 심판 때에
주님께서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순수한 신앙의 힘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0월20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2,8-12: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의 힘에 대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8-9절) 영원한 생명은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복음이란 것은 어떤 부분은 흔들리고 어떤 부분은 굳건한 것은 아니다.
만일, 복음이 없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은 아무 은총도 입지
못한다. 반대로 복음이 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이 복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 자신의
믿음과 희망과 덕과 영광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8절)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증거하면 받는 보상이 바로 이 말씀이다.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까?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고, 입술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그것이 증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겠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이
저지르는 어떠한 죄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이는
그분의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거스르는,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인가?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이며, 그래서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시는 사랑인데 그것을 믿지 않아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모독죄이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12절)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에게 그 위험한 순간에도 당신을 증언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로서 그분을 증언할 수 없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그러니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야 누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겠는가?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이 사회에 신앙을 전파하고 생활로써 증거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며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Always be happy!
2018년 나해 10월20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Always be happy!
이제는 다들 머리가 희끗희끗한 성인이 된 수많은 한국의 제자들과
신자들로부터 ‘모모 신부’ ‘모대감’라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열정과 기쁨의 사제요 선교사, 모지웅 미카엘 신부님
((Jesus M.Molero, 1928~2018)께서 어제 향년 91세의 일기로
선종하셨습니다.
꽤나 장수를 누리신 탓에 모신부님 약력도 참 다양했습니다.
모신부님의 약력을 잠깐 훑어보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
살레시오회 곳곳에 당신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그야말로 한국 살레시오회의 초석이고 기둥이셨습니다. 저희
후배들의 큰 언덕이셨습니다.
말년에 이르러 숙환으로 인해 참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입버릇처럼
“아마도 하느님께서 저를 잊어버리셨나봐요!”라며 힘들어하셨는데,
이제는 그리도 간절히 바라셨던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셨으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90노인답지 않게 우렁찼던 그분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텅 빈것 같습니다.
신부님께서 살아생전 만나는 모든 청소년들과 신자들에게 자주
강조하시던 몇 마디 말씀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십번씩 하시던
말씀이라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극심한 병고로 인해 힘겨워하실 때
조차도 계속 반복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고 돈보스코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Always be happy!” “Sempre allegro!” “항상 기뻐하십시오!”
1956년 한국에 첫발을 내딪으셨으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만 62년을
한국 땅에서 사셨습니다. 스페인을 떠나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건너오셨는데, 전쟁 직후 모든 것이 다 파괴되고,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참으로 큰 고생을 하셨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하던 시절,
어떻게 하면 단 한명의 청소년이라도 더 교육시키고, 그들의 진로를
잡아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1956년 광주에 내려갔더니, 보리밥 도시락도 못 싸오는 학생이
절반을 넘었습니다. 그래서 늘 제 도시락을 넉넉히 준비했습니다. 그
학생들이 지금은 나를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80 노인이 되신 후에도 모신부님은 언제나 청소년들 사이에
현존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지금 모신부님이 어디에 계실까요?’
정답은 언제나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운동장이요 실습장이었습니다.
장례식장을 찾아오신 수많은 모신부님의 제자들은 다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계시더군요. 그분의 불같은 사목적 열정과 제자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 조금은 과한 애정 표현을. 모신부님의 주례로
혼배성사나 결혼식을 올린 제자 부부들 역시 셀수 조차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모신부님께서 전성기 때는 얼마나 ‘잘 나가셨던지’ 수많은 상들을
수상하셨습니다. 국민훈장 석류장, 대한적십자 최고훈장인 인도장
금장, 스페인 국왕 훈장 등등에다 명예 서울시민증까지 받으셨습니다.
너무 많은 상을 받으시다보니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이 없으면
어떡합니까?”라고 걱정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불과 사흘 전 모신부님을 찾아뵈었을 때의 일입니다.
언제나 쩌렁쩌렁 호령하시던 큰 목소리, 늘 활기로 충만하던 영원한
청년 모신부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작고 왜소한 갓난 아기 같은
모신부님이 거기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영혼을 당신께로 불러가시기 전 반드시 행하시는
작업이 있으십니다. 아기처럼 작게 만드십니다. 아기처럼
천진난만하게 만드십니다. 당시 우리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
이제는 모신부님께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순간이 다가왔구나!’
가톨릭의대에 시신을 기증하시면서 모신부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제 껍데기를 세상에 돌려주는 게 제 일의
마지막입니다.” 이런 모신부님의 유지를 받들어, 21일 주일 오전 9시
장례 미사후, 모신부님의 시신은 장지로 향하지 않고 대학병원으로
모시게 될 것입니다.
입관 예절: 2018년 10월 20일(토) 오전 10시
장례 미사: 2018년 10월 21일(일) 오전 9시
영안실 및 장례식 장소: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방로 65 살레시오회
관구관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루카 12,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0월20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 12)
떨어져내리는 단풍을 보며 가야할 길과 돌아갈 길을 다시 알게됩니다.
탄생과 소멸을 묵상하게 됩니다.
이렇듯 단풍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감사하며
기쁘게 볼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삶을 믿게 하는 것은 분명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알게하시고 예수님을 믿게하십니다.
구원의 성령께 순종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한 우리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삶을 안내하시는 성령이십니다.
뜨겁고 기쁘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더 풍성하게 하시는 성령께 우리의 걱정과 두려움을 의탁합니다.
성령을 모독하지 않는 삶이란 십자가의 진리에
기꺼이 참여하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녀들은 무엇보다도 성령에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성령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10월20일(토) 과정을 중시하는 성도
오늘은 “과정을 중시하는 성도”에 대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 말씀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처음 접하면서 구하면 찰카닥 주시고 두드리면
순식간에 열리고 찾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펑 터져 나오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너무 쉽게 만들어진 말씀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처음과 끝만 말씀하셨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작도 중요하고 끝도 중요하지만 바로
과정으로 이어지는 그 과정, 길이나 크기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바로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를 하게 되지요. 하지만 진정한 응답을 받는 자는 바로 이
과정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시작했던 때의 마음 자세로
마무리를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동안에 얼마나 구하다가 포기를 했습니까? 찾다가 중단한 적이 몇
번이나 됩니까? 이로 인해서 투자했던 시간과 물질의 낭비는 얼마나
됩니까?
이제부터 과정을 중시하고 포기하지 않는 끝까지 가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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