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1월4일 [(녹) 연중 제31주일]
제1독서 신명기 6,2-6
제2독서 히브리서 7,23-28
복음 마르코 12,28ㄱㄷ-34
◈ [서울] 연중 제31주일
2018년 나해 11월4일 연중 제31주일
산보를 가면서 신발에 작은 모래가 들어갔습니다. 작은 모래지만
신경이 쓰였고, 결국은 신발을 벗어서 모래를 털어냈습니다. 모래는
털어내야만 산보를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평온한 마음에도 가끔
작은 모래알처럼 파문이 일 때가 있습니다. 함께 사는 동료가 별 의미
없이 던진 말이 그렇기도 합니다. 연수원을 마치면 해야 할 일이
걱정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하는 이웃의 오해가 내 마음에 큰 파도가 되기도 합니다. 신발의
모래는 털어내면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만, 마음의 모래알들은
털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며칠 전 읽은 글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어린 날 담임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힘이
되어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눈이 내린 교정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였다고 합니다. “저 교정의 끝에는 큰 나무가 있습니다.
쉬는 시간에 저 나무의 끝을 걸어가 보십시오. 발만 보고 걸어가는
친구는 나무에 똑바로 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나무만 바라보고
걸어가는 친구는 결국 나무에 도착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 말씀은
큰 가르침이 되었고, 힘들고 어려울 때 힘과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저도 어린 날 담임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학년을 마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유능하고 능력이 있는 난 사람이 있습니다. 똑똑하고 많이
아는 든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웃을 도와주고
사랑하는 된 사람이 되십시오.” 40년이 넘었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제게는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난 사람과 든 사람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삶의 지침이 되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율법 학자는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이것입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는 이것입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습니다.” 율법 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께는 더 큰 제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한 말을 삶을 통해서
실천한다면 하늘나라가 당신에게서 멀리 있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말없이 실천하며 참다운 제사를 봉헌하는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침대에서 누워계시며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와 24시간 함께 지내시는
고마운 이웃이 있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정성 어린 음식을 준비해
주신 이웃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세상에 살지만 이미 천국의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월급에서 일정 금액을 후원회비로 내는 분들도 많습니다. 주말에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나누는 분들도 많습니다.
정말입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하느님이 주신 계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이웃들이 있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한가정의 아버지가 자신의 어깨에 지워지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목숨을 끊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탐욕이, 우리들의
무관심이, 우리들의 이기심이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하느님께서 주신
그 소중한 삶의 끈을 끊어버리도록 버려두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가끔 신앙인들 사이에서 가슴 아픈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또 가끔 신앙 공동체에서 서로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생기곤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 사이에, 믿음의 공동체에 불신과 분노의
차가운 벽들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미사에 참례하면서 같은 성가를 부르고, 같은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받아 영하면서도 옆에 있는 형제자매와 화해하지
못하고 하나 되지 못하고 그래서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새처럼
신앙생활이 자유롭지 못한 경우를 보곤 합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것은 양쪽 날개가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남쪽으로의 긴 여행을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식어 하느님
아버지를 잠시 외면한다고 해도 끝내 우리를 버리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면 기다리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식어 버리면 그들 역시 사랑이
식어버리곤 합니다.
2018년도 이제 2달 남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미워한 이웃을,
나를 미워한 이웃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고, 우리의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참된 예배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나의 뜻을 봉헌하는 것
2018년 나해 11월4일 연중 제31주일
<참된 예배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나의 뜻을 봉헌하는 것>
복음: 마르코 12,28ㄱㄷ-34
‘사랑받는 남편 10계명’이란 것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1.같이 자라-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같은 시간에 부부관계는
밤에 달려있다.
2.밥을 다 먹어라-맛있게, 맛있어 하면서,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3.아내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자-가로막지 말고 맞장구 쳐주자.
4.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하라-남편의 활기는 금방 아내에게 전달된다.
깨워야 일어나지 말고 미리 일어나 창문을 열어라!
5.처가에 가서는 싱글벙글 하라-갈 때는 선물을 잊지 말 것! 처가에
가서는 가장 늦게 나올 것.
6.동반모임을 즐겨라-부부모임은 가능한 한 참가하여 즐겨라. 밝고
예절 바르게
7.잘못했으면 곧 사과하라-곧 사과하라! 지금 곧.
8.아내 편을 들라-어쨌든 일단은 아내의 편을 들고 나서 잘잘못을
따져라.
9.생일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간 큰 남자!!
10.결혼반지를 빼지 말라.
[출처: ‘사랑 받는 남편 10계명’, 블로그 코이네]
‘한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저런 노력을 해야 하다니.’
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과 함께 사제가 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저걸 다 한다고 해서 아내가 만족할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바라는 모든 것을 해
주어야합니다. 남편의 십계명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열 가지’로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거 다 빼고 아내는 남편이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것을 바라지 않을까요?
그리고 남편으로서 해야 하는 것, 성실히 일하여 돈을 잘 벌어오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저 나머지 계명들은 어쩌면 기억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면 다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수많은 하느님의 계명
가운데 무엇이 핵심인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들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또 그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이 자신만을
사랑하며 돈을 성실히 벌어오는 것이라면, 하느님도 당신만을
사랑하며 이웃에게 잘해 주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것입니다.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들려면 이것은 해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명은 하느님의
공동체에 속하게 만드는 지령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께 마음에 들어 하느님 품 안에서 같은 공동체를
만듭니다. 이 공동체가 교회이고 하느님 나라입니다.
제가 대학생 때 데모집회에 한 번 나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집결해야 했던 곳은 서울시청 앞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철을 내렸을
때 한 여학생이 저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뭐라 쓰는지 몰라서 빤히 쳐다봤더니 또 다시
뭐라고 쓰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뭐라 쓰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뭐라 쓴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 여학생이 주위를
살피며 조금은 화가 난 표정으로, “아~ 이거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는데 ... 집회 장소가 명동성당으로 바뀌었다고요. 빨리 그리로
이동하세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명동근처까지 갔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뉴스를 보니 명동성당에 들어간 이들이
경찰병력에 둘러싸여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성당에 들어간 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저는 그 하늘나라 공동체에 섞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령을 따르지 않고 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여학생은 하느님을 전하는 사람이었고
손바닥에 써 준 것은 계명입니다. 계명만이 하늘나라에 도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당신 나라로 이끄시기 위해 지령을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 지령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모세는 이 지령을 가슴에 품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민족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민족들은
그 지령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뜻대로만 살고 싶어서
하느님까지도 ‘황금송아지’로 만든 상태였습니다. 하느님을 소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을 조정하는 주인이 되고 싶다는
의도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을 조정하고 싶은데 하느님의 지령에
관심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제 더 이상 쓸모없게
돼버린 계명 판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명이 깨졌다는 말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방법이 없어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내 뜻과 반대됩니다. 내 뜻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의 계명은 내 안에서 성취될 수 없습니다. 계명을 주시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주인이 되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은 계명에 집중해야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품에 안고
내려오던 모세는 그 계명을 어떤 마음으로 안고 왔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처럼 안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한
계명을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랑을
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이 ‘다하는 마음’이 참된 예배입니다. 나의 온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위해 내가 봉헌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나의 봉헌은 이렇게 계명의 성취로 이어져야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예배를 봉헌하러 갑니다. 하지만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처지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극진히 도와줍니다.
하느님의 지령은 예배를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예배로 봉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령은
외면한 채 미사만 보러온다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계명이 우리를 그분 나라에 들여보내 주는 것이지 외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도 이제 그분의 계명을 알았다면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겠습니다. 모세가 이 계명을 가슴에 품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듯이 우리도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코 잊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4일 연중 제31주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은 항상 절대적 척도이며, 인간은 그 하느님의 위대함에
대한 미소한 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사상은
아무리 선의로 받아들인다 해도 반인문주의 사상의 하나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이 오늘 복음에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동기와 이유로
제시하실 만큼 밀접히 결합시키신다. 즉 인간이 위대한 존재로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죽는 곳에서는 인간도 죽게 된다는 것을 현대의 일부 사조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제1독서: 신명 6,2-6: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1독서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4-5절). 이 두 구절은 구약의 신학과 영성의 정점이며
절대적 유일신론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으로 나타난다. 즉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명령은 밖에서 부과된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 본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 백성의 본성이며, 하느님의 백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찬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복음: 마르 12,28-34: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어떤 계명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인지 묻는
율법학자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그 계명에 다른 계명,
즉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까이 놓으신다. 이
계명도 구약성서에 나타나지만 ‘동족’만을 가리킨다(레위 19,18).
마태오는 첫째 계명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22,39).
루카는 두 계명을 종속관계로 보지 않고(10,27),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모두 ‘이웃’으로 간주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10,30-37). 그러나 마르코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자리에 놓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두 번째 자리에 놓은 것을 보면
유일신론적 배경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첫 자리에 계셔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성이나 품위도 올바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랑이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사랑은 서로
교차하며 서로를 요청한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 받는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 종교이다. 오로지
이웃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고 하시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라고 하신다.
이 두 계명은 다시 율법학자의 말로써 강조되고 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2-33절). 즉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다 같이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잘못하기 쉬운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행위가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국한시켜 그 의미를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펼 때, 하느님은 ‘사회적인
분’이시며 위대한 창조를 행하시는 분임을 증거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형제들에 대한 봉사가 되고, 또한
구체적인 필요에서 구현되기에 ‘참된 예배’가 된다.
우리가 주일을 지내는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주일미사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바쳤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이다. 봉헌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들은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라고 칭찬을 듣는다. 율법학자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이 자리에서 가까이 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즉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가까이 와 있다. 예수께서는 누가 당신
가까이 있는지를 아시고 또 명백하게 규정하신다. 이 일은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시게 될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름을
말해준다”(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p. 267-268).
제2독서: 히브 7,23-28: 그분의 사제직은 영구한 것입니다
2독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구약의 사제직은 죽음으로 중단되기 때문에 일시적이지만,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영원하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25절) 그리고 현재도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분의 사제직은 절대적인 성성을 통하여 실행되기 때문에
구원의 능력이 조금도 상실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자발적으로 봉헌하신 당신의
희생으로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를 확실히 가르쳐 주셨다. 즉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성이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게 하는 요청이다. 이 요청은 이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작은 일에서부터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참된 예배를 우리도 이제 이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미사가 더 기쁘고 하느님 앞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몸만 왔다 갔다 하는 타성적인 신앙생활
그래서 아무 맛이 없는 신앙생활, 전례생활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이고 활기찬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진정으로 오늘 여기서 감사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2018년 나해 11월4일 연중 제31주일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장거리 운전중에 하도 잠이 와서, 휴게소 들러 그 유명한 7080 가요
시디 한장을 사서 듣기 시작했습니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스무곡 가까운 노래들 가운데, 사랑을
주제로 하지 않은 노래는 단 한곡도 없었습니다. 틈만 나면 사랑이란
단어가 반복되었습니다. 끝사랑, 바보같은 사랑, 거지같은 사랑,
중독된 사랑, 금지된 사랑, 그 잘난 사랑, 사랑없인 난 못살아요...^^
따지고 보니 우리는 틈만 나면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을 추구하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한 노력은 참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저 유행가 가사
정도의 통속적인 사랑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
이란 주제로 시노드를 개최하셨는데, 폐막 미사 강론에서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우리가 행여나 젊은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또 우리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젊은이들 귀만 가득 채우려고 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생각할수록 우리 양떼를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인듯 합니다. 그분의 말씀 속에 참사랑,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녹아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통속적인 사랑, 유행가적인 사랑을
넘어서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사랑입니다.우선 참사랑은
상대을 향해 마음의 창을 여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는 노력을 그치지 않습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의 아주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합니다.
오늘 참사랑의 전문가요,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도 빈약한 사랑으로
인해 늘 허전해하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복음 12장 29~31절)
우리의 사랑이 좀 더 큰 사랑, 좀 더 사심없는 공평한 사랑, 좀 더
폭넓은 사랑, 좀 더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랑, 참 사랑이 될 수 있도록 늘
고민하고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사랑이란 보다 단순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과의 작은 약속을
지켜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원치 않는 행동을 자제하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 안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통해서 상대방의 이름으로
행하여 주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최인호 베드로, ‘사랑의 기쁨’)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 30)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4일 연중 제31주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 30)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기쁨도 맛 볼수 없습니다.
사랑의 맛이 인생의 참맛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핵심적으로 전달하여 주십니다.
살아 숨쉬는 모든 순간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기본을 벗어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본을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참된 기본입니다.
기본은 지킬 때 아름답습니다.
기본을 지킬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롭습니다.
기본은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아줍니다.
우리 존재 의미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아름답고 귀한 존재가 됩니다.
사랑이 창조의 힘이며 원천입니다.
사랑은 살아가야 할 우리 삶의 자세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하느님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 생활의 태도이며 실행의 모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갑시다.
하느님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더욱 깊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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