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1월8일 [(녹)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제1독서 필리피서 3,3-8ㄱ
복음 루카 15,1-10
◈ [서울]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2018년 나해 11월8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매일 아침 샤워를 하면서 따뜻한 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밸브를
뜨거운 곳으로 돌리면 너무 뜨거워서 샤워할 수 없습니다. 밸브를
차가운 곳으로 돌리면 너무 차가워서 샤워할 수 없습니다. 온도를
표시하는 숫자가 없어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합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의 경계를 찾으면 편하게 샤워를 할 수 있습니다. 방의
온도도 그렇습니다. 외부의 날씨에 따라서 온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높으면 지나치게 더워서 무기력해지곤 합니다. 너무
낮으면 추위를 많이 느끼기 때문에 불편하기도 합니다. 역시 적당한
온도를 맞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과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친하다고 너무
가깝게 나의 삶 안으로 들어오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서운하다고
너무 멀리 있으면 오해하게 되고, 역시 생활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샤워기의 물은 평균을 내는 것이 좋지만, 방의 온도도 적당한 온도를
맞추는 것이 좋지만 이웃들과의 관계는 중용의 멋이 필요합니다. 내게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중용입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한 번 더 생각하면서 다가가는 것이
중요입니다.
현대사회를 이끌어오는 4가지 패러다임이 있습니다. 풍요와 발전의
기둥이 되었고 많은 장점을 지닌 패러다임입니다. 오로지 물질만이
중요하다는 물질 만능주의입니다. 적자생존, 양육강식의 모델이 된
진화론입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모든 것은 유전자 속에
있다는 유전자 중심론입니다. 진화는 임의적으로 일어난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패러다임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던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들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신화와 종교, 생명과 나눔의 가치입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이 세상은 엄청난 에너지가 함께 하고 있으며 물질은 에너지에 의해서
형성되기고 하고, 변화되기도 합니다. 진화는 적자생존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연대와 협력, 나눔과
상생이 생태계를 건강하게 이끌어 왔습니다. 유전자는 생명이 머무는
장소이며, 유전자는 생명이 입고 있는 옷입니다. 생명은, 우리의 삶과
역사는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의지와
창조적인 노력에 의해서 이끌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통해서 진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임의의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 같지만 진화는 일정한 패턴과 방향을 향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는 우리 보다 오랜 시간 지구별에
살아왔습니다. 박테리아는 어려운 환경이 주어지면 특정한
박테리아가 변이의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특정한 박테리아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삶을 이어갑니다. 작지만 우리보다 훨씬 오래
지구별에서 살고 있는 개미도 그렇습니다. 급격한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면 몇몇 개미들이 전체 개미들이 갈 방향을 제시하며 다른
개미들은 새로운 길을 찾은 개미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것 같은 이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적자생존, 양육강식의 살벌한 정글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함께 사는 공동체라고 하십니다.
가장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진정한
진화라고 말씀하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인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친교에
연결되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
맺어진 신비체이며, 우리는 모두 하느님과 연결된 공동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시작이며 마침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머무는
존재입니다. 삶의 순간에 임의성이 있어서 갈등, 분열, 전쟁, 폭력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언젠가는 사랑, 평화, 일치, 나눔의 공동체를 이룰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광야의 백 마리 양
2018년 나해 11월8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광야의 백 마리 양> 복음:루카 15,1-10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어디에
두었는지 주목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광야’에 놓아둔다는 것이 썩 이치에 맞아보이지는 않습니다. 광야는
양들이 머물기에는 아주 합당하지 못한 장소입니다. 먹고 마실 것도
없으며 맹수나 뱀, 전갈로부터 그들을 지켜줄 목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자는 광야를 가장 안전한 장소처럼 여기고 거기에
자신의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남겨둔 것일까요?
광야는 매우 삭막한 곳이지만 사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당신
자녀들이 머물 가장 안전한 장소입니다. 세상에 물들기 전의 아이들이
가장 안전한 것과 같습니다. 광야는 세상 유혹으로부터 멀어진
곳입니다. 그렇게 멀어지게 만든 것이 목자입니다. 또 그렇게 세상
것들을 버리는 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겠다고 모이면 그들이 광야의 양떼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양들이 흩어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래리 도비(Larry Doby)는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이면 우수한
타자였습니다. 1947년의 어는 날, 그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팀에
들어가 출전하는 첫날입니다. 3만 관중의 시선이 처음 보는
흑인에게로 모였습니다. 전국의 라디오 야구팬 청취자들의 기대 또한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도비는 극도로 긴장한 탓으로 타석에서 삼진
아웃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몹시 실망한 도비는 힘없이 자리에
돌아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도비 다음으로
타석에 나간 선수는 구단 최고의 강타자 조 고든(Joe gordon)
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뛰어난 감각으로 배트로 공을 맞춰 볼
아웃을 당할망정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하는 일이 없던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이날 고든은 나가자마자 연거푸 삼진 아웃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가더니 도비 곁에 앉아 도비처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습니다. 자신 같은 강타자도 안 맞을 때가
있으니 동료에게 낙심하지 말라는 위로를 몸소 행동으로 실천한
것입니다.
래리 도비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홀로 광야에 섰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 자신과 함께 있어주는 조 고든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라면
래리 도비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광야에 남겨진 아흔아홉
마리 양들은 어쩌면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위해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신앙인들입니다. 잃었던 한 마리 양도 목자는 다시 광야로 데려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 섞이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안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잃었던 양이 광야의 양떼에게로 돌아오면
하늘의 천사들도 기뻐할 것입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낭떠러지가 나타났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의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잠을 깨었습니다.
길 잃은 양은 십자가를 거부하는 양입니다. 십자가가 광야입니다.
광야의 삶을 거부하는 이가 길 잃은 양입니다. 광야의 양떼는 바로
현재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사랑이라는 가치를 위해 세상
명예와 재물과 가치들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 위해 모인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 광야의 양떼 가운데로 데려오면
그 사람은 거의 안전하게 주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라는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온 곳도 광야이고,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을 불러낸 곳도 광야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머물러야 할 가장 안전한 곳은 광야입니다. 그리고 길 잃은 양을
데려와야 할 곳도 광야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8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5,1-10: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투덜거린 것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비우고 우리처럼 되시어 인간의 남루함을 입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에게 비유들을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목자는 크나큰 인내를 보이고 있다. 길 잃고
헤매는 양을 찾아 나서 결국 찾아내고야 마는 목자의 인내이다.
참을성이 없으면 양 한 마리쯤 쉽게 포기했겠지만, 목자는 참고
견디며 끝까지 찾아다녔다. 그러고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그분의 양
어깨는 십자가의 두 팔이다. 거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얹어 놓았다.
길 잃고 헤매지 않는 이들을 남겨 두고, 착한 목자는 우리를 찾아
나서신다. 우리가 마음을 고치고 돌아오면 그분은 등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친절하게 우리를 자기 어깨에 태우고는 잃었던 양을
찾았다며 기뻐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안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10절)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에서 그 은전은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 그
은전은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진 것이기에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입은 존재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타락하여
길을 잃은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께 발견되어 그분의 모습을
되찾았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은전이다. 그러니 그 값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녀들이다. 그러니 언제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잃은 것을 찾기 위해 부인은 등불을 밝혔다. 길 잃은 자들이 그 불빛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되자 하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그렇게 기뻐한다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면 하늘의 천사들이 얼마나 크게 기뻐하겠는가? 그 때 사람들은
방랑과 타락에서 나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부자이시다. 우리는 그의 재산 중 백분의 일이다. 그분에게는
산에 남겨둔 양 떼, 곧 대천사들과 권세들, 권력들, 주권들(콜로 1,16)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천사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구원을
기쁨으로 여긴다고 했다. 우리의 회개가 하늘의 천사들을 기쁘게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더욱 정직해지려고 노력하지 않겠는가?
천사들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회개와
돌아옴을 기뻐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항상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은혜롭게도 내게 와주신 예수 그리스도!
2018년 나해 11월28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은혜롭게도 내게 와주신 예수 그리스도!
살아생전 단 한번도 직접 대면한적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유일한 의미요, 삶의 전부인 주님으로 확신하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기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바오로 사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분께 완전
매료되었으며, 홀딱 빠져버렸습니다. 그 결과 연인(戀人) 사이에서도
주고 받기 힘든 사랑 고백을 서슴치 않게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필리피서 2장 7~8절)
바오로 사도의 개과천선, 일생일대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하게 된
배경에 과연 무엇이 자리잡고 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겪었던 낙마 체험 이후 바오로 사도는 즉시 파악하게 된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내게 와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고대해왔던 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분은 종래 다른
예언자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신 분, 사랑 그 자체이신 분, 자비 그
자체이신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고 박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려 주시고,
깨닫게 해주신 분, 마침내 보잘 것 없는 죄인인 자신에게 당신의 실체
전부를 온전히 드러내주신 분, 죄인들과 세리들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한 식탁에 앉도록 초대하시는 분이 그분임을 깨달은 바오로 사도는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소중한 깨달음 이후, 바오로 사도의 내면 질서는 완전히
뒤바뀌어버렸습니다. 그가 그토록 큰 의미를 부여했던 율법이나, 유다
사회 안에서 촉망받던 청년 지도자로서의 위치, 계획했던 대단한 꿈,
사랑, 청춘...
그 모든 것들이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대신 첫번째
자리에 오직 주님 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말끔히 비우고 버린 자리에
가장 중요한 대상이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빌 브라이슨(1951~)이 쓴 ‘나를 부르는 숲’은 이른바
‘애팔래치아 산맥 종주 실패기’입니다. 350개나 되는 산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며, 총길이 3,600 Km에 이르는 트래킹 코스를 종주하던
그는 이런 체험담을 남겼습니다.
“나는 애팔래치아 종주의 백미가 ‘상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모든 경험이 내 스스로를 일상생활의 편리함으로부터
철저히 격리시켰다. 가공 처리된 치즈나 사탕 한 봉지에 감읍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고, 코카콜라 한잔에 마치 처음 마셔보는 음료수인
것처럼 넋이 나갔다.”
더 큰 대상, 더 소중한 대상, 더 가치있는 대상, 더 아름다운 궁극의
대상이신 주님을 온전히 파악하고, 내 전부로 모시기를 원한다면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대상들에 대한 포기나 상실은 반드시 필요한
노력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11월8일 (목) - 부름 받은 자
오늘은 “부름 받은 자”에 대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마서 1장 6절 말씀에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것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교회를 나오면 내가 선택해서 교회를 나온 줄로 착각합니다.
대체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마음을 먹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할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 자신이 선택해서 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내 몸을 내 맘대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 1차원적인 단순한 생각입니다.
이것은 마치 금과 사탕이 있을 때 사탕이 입안에서 달기 때문에
사탕을 선호하지만 실상 금이 우리에게 훨씬 더 좋다는 것을 어릴
때는 모르지만 훗날에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 내 삶을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서 부름 받은 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권태일 목사 -
◈ [청주]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1월8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루가15,1-10)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기를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가 참으로 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가15,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 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를 입는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가23,42).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가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반기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죄인의 모습과
하느님께 드러나는 죄인의 모습은 분명히 다릅니다.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이다”(요엘2,12-13).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5,32).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성녀 소화데레사).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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