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1월11일 [(녹)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제1독서 열왕기 상권 17,10-16
제2독서 히브리서 9,24-28
복음 마르코 12,38-44
◈ [서울]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2018년 나해 11월11일 연중 제32주긴(평신도 주일)
전주의 치명자산 성지엘 다녀왔습니다. 성지에 있는 신부님께서 매월
영성피정을 기획하였고, 제게 11월 영성 강화를 부탁했습니다. 성지는
순례하는 장소이기도하지만, 성지에서 신앙을 돌아보고 주님과 함께
머물 수 있는 피정 장소가 되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순교자들께서도 순교의 장소에서 영성의 꽃이 피는 것을 보면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성시간,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영성피정 등을 마련하였습니다. 성지는 시간이 나면 찾아가는 순례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삶에서 지친 신앙인들이 위로와 용기를
얻는 장소가 되는 것도 좋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 내려오셨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체험하고,
언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교회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상처를 입고,
옷에 흙이 묻을지라도 교회는 세상 속에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산위에 있는 성전도 필요하지만 산
아래에도 성전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분, 단체로
오신 분, 영적인 갈증이 있는 분들에게는 산위의 성전이 너무 높았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산 아래에 장막성전을 마련하였고, 많은
분들이 장막성전에서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간이 아닙니다. 그 공간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위선, 시기, 질투,
욕망으로 채워지는 공간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나눔, 희생, 봉사, 사랑으로 채워지며 영성으로 꽃이 피는
곳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사렙타의 과부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모두가
힘들어 했습니다. 사렙타의 과부는 엘리야에게 빵과 과자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빵과 과자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렙타 과부의 따뜻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였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가뭄이 끝날
때까지 밀가루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눔이 있었던 사렙타 과부의
집은 비록 누추하였지만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장막성전이 아름다운 것은 규모와 외관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하는 영성 팀이었습니다. 성지의 모습을 전해주는 소식지를
만들어가는 분이 있습니다. 전례와 행사를 진행하는 분이 있습니다.
피정에 참가하는 분들을 안내하고, 간식을 준비하는 분이 있습니다.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연도를 주관하는 분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분이 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봉사하는
영성 팀이 있기에 장막성전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남자 분이나 여자 분의 손가락에 대게는 아름다운 반지가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주기도 했고, 결혼을 약속한 반지일수도
있고 , 길거리에서 예쁜 모습을 보고 산 경우도 있습니다. 반지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어서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동료 사제가
본당에서 저녁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두 젊은이가 면담을 요청해
왔답니다. 낯선 얼굴들인지라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이들을
맞았답니다. 자리에 앉은 그들은 불쑥 금반지 두 개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금반지 2개, 그것을 축성 해 달라는 얘기인가 하고
의아해 하는 사제에게 이것을 가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무슨 영문인가
하여 물었더니 이들의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그들 둘은 오랫동안 사귄 친구로서 한해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남자 친구는 대학에 합격하여 입학을 했고, 여자 친구는 합격을 하지
못하였노라 하면서 이들은 여자 친구가 내년엔 꼭 합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우정의 뜻을 깊이 간직하고 격려하기 위해 서로
금반지를 선물하면서 여자 친구가 합격하는 날, 이 반지를 필요로
하는 이에게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여자 친구도 합격을
했고그래서 오늘 저녁 기쁨과 감사의 미사를 드렸고, 작은 것이긴
하지만 이 반지를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저는 나름대로의 고통과 기쁨을 승화시켜 주었던 아름다운 이 추억의
반지를 선뜻 내어놓은 이들의 마음이 퍽 고왔고,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굳이 돈이 아니더라도 재능을 나누는 분들도 있습니다.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의 말벗이 되어 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외로움에 지친
어르신들에게는 빵을 나누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렇게 변한 벽지를 벗겨내고 화사한 벽지로 바꾸어 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고장 난 보일러를 고쳐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여름
물난리로 못쓰게 된 물건들을 고쳐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성모병원의 의료진들은 약품을 가지고 매년 가난한 나라로 의료
봉사를 가고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작은 병에도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교구의 사회
사목국에서도 청년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떠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라오스로 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집을 지어주기도 하고, 샘을
파주기도 합니다. 이 또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찬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쌀쌀한 날에, 순수함을 잃어 가는
세상에 그저 단순한 우정이 아닌, 이웃으로 마음이 열린 아름다운
우정의 모습을 보여준 젊은 친구들이 반지를 주기 위해 내밀었던
아름다운 손을 그려봅니다. 틀림없이 그 젊은이들은 사회를 아름답게
비추는 촛불로 살아가리라 믿으며, 관대함에로 열린 우정이 아름답게
지속되길 바랍니다. 이 세상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에, 그 마음을 이웃과 나누는 이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봉헌의 보상, 함께 머무심
2018년 나해 11월11일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봉헌의 보상, 함께 머무심>
복음:마르코 12,38-44
공민왕 때에 의좋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제가 함께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웠습니다. 그리고 그 한 덩이를 형에게 주었습니다.
양천강(陽川江)에 이르러 같이 배를 타고 건너다가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에 던지니, 형이 괴이하게 생각하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나는 평소 형을 사랑함이 심히 돈독하였는데 이제 금을 나누고 보니
문득 형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므로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이를 강에 던져 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형이 “너의 말이 진실로 옳다.”하고 말하며 역시 금을 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재물을 좋아하는 마음으로는 누구와도 친해질 수 없습니다. 상대를
자신의 재물을 불리는 도구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재물에 대한
욕구만이 아닌 세상 것에 대한 어떠한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도구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봉헌’이라는 제도를 마련하셔서 세상 모든 것들은
관계를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이지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됨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 때부터 당신이 주신 것 가운데 일부를
다시 당신께 바치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서 재물에 대한 욕심을
줄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봉헌되어졌어야 할 선악과까지
인간이 차지하게 됨으로써 하느님은 그들의 도구로 전락되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머무실 수가 없게
되셨습니다.
이에 주님은 카인과 아벨의 사례는 물론이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외아들을 당신께 봉헌하라 하심으로써 끊임없이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세상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멜키체덱에게 축복을 청하며 자신 소유의 1/10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재개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소유의 1/10을 선악과에 비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십일조는 그저 구약의 법이고 예수님의 희생으로 더 이상
그런 봉헌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신앙의 표시를 에덴동산에서부터 배우게 하셨고 아벨의
제사를 거쳐 아브라함을 통해 일깨워주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 훨씬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고 모세 때 율법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
십분의 일을 봉헌하는 것은 율법이 아닌 보다 훨씬 근원적인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위한 절대적 요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바쳤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생활비 모두를 바치는 신앙을 지닌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담으로 말하자면 에덴동산에 있었던 모든 과실나무들을
봉헌한 셈이고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것과 맞먹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봉헌을 통해 축복을 얻었는데,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침으로써 어떤 축복을 얻게 될까요? 돈을 많이 벌게
될까요? 오래 살게 될까요? 자손이 잘 될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남겨졌던 하느님의 가장 큰
축복은 ‘그들과 함께 계셔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큰 축복이 과연 아버지가 사 오시는 선물이나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맛있는 밥상일까요? 아이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어머니,
아버지가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존재자체가 자녀에겐
더없는 축복입니다. 아무리 그런 것들이 잘 제공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부모 없이 살며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봉헌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가 자신을 얼마나 믿고
의탁하는지에 대한 척도가 됩니다. 아이가 자신의 용돈을 모두 다
부모에게 맡기면 부모는 그 작은 것을 받고 자녀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작은 용돈으로 부모 몰래 무언가
하려고 한다면 부모는 아무래도 신경을 덜 쓰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자신들의 도움이 더 필요한 자녀에게 더 머물려고 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불쌍한 이에게 가장 시선이 많이 갈
것이 뻔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생활비까지 다
봉헌한 과부에게 사로잡혀 계십니다. 그녀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실 기세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당장 먹을 것도 없는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봉헌할 줄 아는
사람에게 오는 축복은 주님께서 함께 계셔주심인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에서 히피문화가 급속도로 퍼졌다고 합니다.
수많은 친구들이 전쟁 통에 목숨을 잃고 자신들만 살아남은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큰 정신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집을 나와 머리를
기르고 길거리 생활을 하며 기타를 치면서 참 삶의 의미를
찾으려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교회에 찾아왔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는 옷과
머리를 단정하게 하지 않으면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어떤 교회는
그들을 따듯이 맞아주었습니다. 물론 젊은이들은 자신들에게 단정한
옷차림을 강요하는 교회를 더 이상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히피를 받아들은 교회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찬송가로 충만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히피문화가 시들고 젊은이들은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미국의 큰 기둥들이 됩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교회들은 노인들만이 남아있었고 그들을 받아들였던 교회는 주요
미국 인사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둘이나 셋이 함께 모인 곳에는 당신도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둘이나 셋이 모이는 것은 혼자 있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와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상대를 위한
‘배려’의 정신이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위한 배려가 상대가
나에게 머물게 만드는 ‘봉헌’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참아주는 것이
봉헌입니다. 그래야 둘이 함께 머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관계를 위해
자신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함께 모였다면 당연히 당신께도
봉헌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 당신께서 함께
머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봉헌의 보상은 그분께서 함께 머무심이고
그분께서 함께 머무시면 그 공동체는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사목자, 흠잡을 데 없는 하느님의 관리인
2018년 나해 11월11일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사목자, 흠잡을 데 없는 하느님의 관리인
한국에서의 선교를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계신 한 외국 수녀님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한국 말 배우기 정말 어렵죠?” 수녀님께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너무 너무
어려워요.”
특히 배우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동일한 의미인데, 너무 다양한
표현들이 사용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그랬습니다.
‘죽었다’라는 말만 해도 그렇습니다. 너무나 많은 표현들을 우리가
쓰고 있더군요. ‘돌아가셨다.’ ‘사망하셨다.’ ‘운명하셨다’
‘별세하셨다’ ‘작고하셨다.’ ‘선종하셨다.’ ‘귀천하셨다.’ ‘요르단강
건너가셨다.’ ‘밥숟가락 놓으셨다.’...
베네딕토 15세께서 ‘선교에 관하여’라는 서한에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선교사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선교사를 교육시켜야 합니다.
오늘도 수많은 해외 선교 지망자들이 물설고 낯선 땅에서, 생소한
언어를 배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존경스런 분들이 아닐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몇몇 훌륭한 선교사들은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수많은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합니다.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독어, 불어, 포르투갈어...
인도 동북부 지역 선교에 큰 족적을 남기셨던 살레시오 회원
오레스트 마렝고(Orest Marengo) 주교님께서는 22개 언어로 소통이
가능하셨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언어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일단 토착민들과
소통이 가능해야,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언어가 되야 제대로 된
복음 선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지 언어를 잘 습득하는 것은 선교지 백성들의 마음과 역사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선교사들이 현지 언어를 배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자유자재로 언어를 구사할 때, 선교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수많은 선교 지역에 그리스도교 교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심혈을 기울이셨던 작업이, 훌륭한 자질을 갖춘 선교사
양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선발한 지도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이었습니다.
이번 주간 우리가 봉독하게 될 티토서, 그리고 티모테오 1서와 2서는
바오로 사도가 각 지역의 사목자들을 양성시키고 교육시키기 위해
집필하신 사목서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티토서의 수신자는 바오로 사도의 최측근이요, 충실한 협조자였던
티토지만, 동시에 초대 교회 여러 공동체 지도자들을 생각하며 보낸
서한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서간을 보내면서 사목자로서의
티토를 아주 높이 평가하며 극찬합니다.
“그가 여러분의 그리움과 여러분의 한탄, 그리고 나에 대한 여러분의
열정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기뻐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이 위로 말고도,
우리는 티토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이 여러분 모두 덕분에 안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코린토 2서 7장 7절, 13절)
티토서는 아주 짧은 분량으로 유명합니다. 총 3장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짧고 굵게 사목자들을 가르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기승을 부리는 이단자들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아주
친절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 교회 사목자들, 지도자들도 반드시 경청하고
유념해야 할 내용들입니다. 오늘 우리 사목자들이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 따라 상냥하고 예의바르며,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티토 1장 7~9절)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11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 44)
가톨릭의 빛깔은 십자가의 빛깔이며
평신도의 색깔은 촛불과 묵주의 색채입니다.
촛불과 묵주는 한낱 장식으로만 전락될 수 없습니다.
빛을 밝히고 힘을 주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으로 나가야합니다.
1. 평신도는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복음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상 생활안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는 결코 일상 생활과 동떨어진
신앙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이란 소중한 나와 너를
아끼며 사랑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같은 소중한 삶입니다.
착한 삶 착한 행동은 형제의 단점과 약점까지도 껴안아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와같이 실천이 중요합니다.
실천은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기본입니다.
2.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자기성찰에서 출발합니다.
자기성찰은 자기정화입니다. 자기정화는 공동체를 살리는 생명의
참된 양식입니다.
함께 나누지 않고서는 또한 기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3. 첫마음으로 돌아가 첫마음을 되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힘차게 생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합니다.
생동하는 신앙인의 첫마음은 기도의 삶이며 봉헌의 삶입니다.
매일 기도속에서 감사의 의미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4. 하느님의 부르심인 소명에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소명은 희생과 인내로써 자라납니다.
희생과 인내는 교회공동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큰 강을 이루듯 작지만 주님의 뜻이 사랑과
나눔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기쁘게 실천하는 평신도들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이 땅의 모든 평신도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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