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1월28일 [(녹)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요한 묵시록 15,1-4
복음 루카 21,12-19
◈ [서울]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11월28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요즘 느끼는 감정은 두 가지입니다. 3달간의 제주도 생활이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정들었던 신부님들과의 헤어짐입니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과 기대입니다. 알은 깨져야만 새가될 수
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이 있겠지만 깨져야만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고,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날 수 있습니다. 3달간의 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각자 삶의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함께한 모든 시간들
감사드립니다. 저도 아쉬움은 간직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목민 생활을 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느님은
양들을 돌보는 목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신들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양이라고 여겼습니다. 목자의 임무는 양들을 푸른 풀밭,
시내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자가 있다면 양들은 아쉬움이 없을
것입니다. 양들은 그런 목자를 신뢰할 것입니다. 사막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목자는 지팡이로 방향을 지시하고, 막대기로 적들을
물리치면서 양들을 보호합니다. 좋은 목자 밑에 있는 양들은 안심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목자요, 자신들을 양이라고
표현한 아름다운 시는 시편 23장입니다. 단순한 형식이지만 풍요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가장 널리 소개되는 시입니다.
예수님도 착한 목자임을 이야기합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십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나선다고
하십니다. 악한 목자는 양을 잡아서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해 입고,
맹수가 오면 달아난다고 하십니다.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볼 수
있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예 사랑합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께서는 3번 물어보셨습니다. 양을 치는 기술,
방법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충성도입니다. 붓글씨는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손은 붓을 잡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손으로
하는 것은 기술의 단계이며, 그것은 대부분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 다음이 예술의 단계인데 거기에는 혼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있어야 하고, 인품 수양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목은 기술, 재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인품, 인격이 묻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련과 수양이
있어야 하며, 영혼이 담겨야 참된 사목을 할 수 있습니다. 기술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인격의
문제입니다. 주인은 기술이 뛰어난 목자에게 양을 맡기기 보다는
기술은 뛰어나지 않지만 주인을 신뢰하고, 주인이 양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는 목자에게 양을 맡긴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던 것은 사랑, 충성심, 신뢰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늘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제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질문입니다.
사목자의 첫 번째 자질은 주님께 대한 충성심, 주님께 대한 신뢰,
주님이 얼마나 양들을 사랑하시는지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이 가장 원하는 사목자는 누구일까요? 사목의 기술과 말솜씨는
아닐 것입니다. 기도하고, 영적인 깊이가 있으며,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제를 원할 것입니다. 교우들은 그런 사제에게
감동하며 그런 사목자를 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첫
번째입니다. 사목적인 기술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묵시문학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조직과 나라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악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나약하고, 작은 나라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니, 강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돋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분들을 만나면서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자녀문제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부의 불화로 힘들고 어렵게 지내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문제들로 가슴아파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묵시문학은 이야기
합니다. ‘이 모든 것들도 다 지나가리라.’ 결국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밝은 빛을 보리라고 말을 합니다.
“인내로서 생명을 얻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가 생각납니다.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상처 받아야 하는 이유
2018년 나해 11월28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상처 받아야 하는 이유>
복음:루카 21,12-19
정신분석 전문의 김해남 씨의 ‘어른으로 산다는 것’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학생 실습을 할 때 소아과에 네 살 된 사내아이를 안은 젊은
엄마가 들어왔고 그 뒤로 어른들 대여섯 명이 함께 따라 들어왔습니다.
아이가 네 돌이 다 지나도록 기본적인 단어 몇 개 외에는 통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 원인이 어른들에게 있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
아이는 5대 독자였고 그 집엔 증조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고모 둘이 함께 대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워낙 귀하게 얻은
아들이라 어른들은 24시간 그 아이 곁에서 아이가 불편하지 않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거의 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울기 전에 모든 것이 다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욕구가 다 충족되면 아이에겐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표현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아기가 태어나 우는 것은 편안한 곳에서 나와
원하지 않는 환경에 접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울음은 첫
번째 욕구불만의 표출입니다. 그것을 통해 아이의 허파가 작동하게
되고 뇌에 산소가 공급되게 됩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것은 분명
상처가 되지만 그 상처가 아이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아이는 각기 다른 울음으로 자신의 욕구불만을
표출합니다. 그러면 욕구가 타인에 의해 충족됨을 느끼고 그럼으로써
타인과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표현을 통해 타인과 하나가
됨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고 나서는 자신과의 대화인 생각을 통해 ‘나’라는
자아인식이 생겨나고 타인과 나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나와의 대화를 통해 나를 하나로 여기게 되어 자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과 내가 구별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욕구불만을 표현하기 위한 더 고급수단인 언어의 사용이 전제됩니다.
언어의 구사와 사고체계의 형성을 통해 아이가 도달하게 되는 곳은
바로 자아의 명확한 인식입니다. 이때를 사춘기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욕구불만 때문에 언어가 발달하게 되고 사고체계도 형성되었는데 더
큰 욕구불만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아가 욕구불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으로 보자면 자아는 뱀이고 하느님께서
하와가 뱀과 대화하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와 같습니다.
뱀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자아의 욕구를 상징합니다. 이 자아와
접촉하게 하시는 이유는 그래야 ‘자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유라기보다는 자아의 욕구에 지배받는 것입니다. 참 자유는
자아로부터의 벗어남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사람 안에 양심이란 것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양심이 하느님의 법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자아의 욕구와 반대됩니다.
인간은 자아와 접촉하며 이제 본격적인 선택의 자유가 생긴 것입니다.
만약 그 자유를 주지 않고 하느님께서 인간과 관계 맺기를 원하셨다면
사람을 못 나가게 집에다 가둬놓고 사귀자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온전한 인격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느님 뜻과
반대되는 자아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욕구불만과 상처를 통해
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춘기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이 명확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습니다.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자기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부터 해 나가야하는 일은 다시 어린이와 같이 자아
없이 하느님과 내가, 이웃과 내가 하나가 되는 단계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당신의 뱀을 발로 밟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힘겹게 만난 자아를 통제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이처럼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앞으로 있을 박해를 예언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말라는 뜻은 자신을 믿지 말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뜻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려면 지금까지 자신을
더 믿게 만들었던 상처가 치유되어야합니다. 상처가 더 자아에게
집중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상처를 받게 하셨음을 알아야합니다.
자신을 덜 믿기 위해서는 어린이처럼 내 자신의 신뢰를 다시
누군가에게 온전히 두어야하는데 신앙인들에겐 그분이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으면 그 자리를 성령께서 차지하시고 성령께서
이끄십니다. 우리 자신을 다시 상처가 없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어린아이처럼 만들면 그것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완전한 준비가 된
상태가 됩니다
모든 상처는 흉터를 남깁니다. 그러나 그 흉터는 다 필요가 있어서
생긴 것입니다. 김혜남 씨의 딸아이도 심장수술 자국이 가슴에 길게
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흉터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불만족과 상처를 통해 자신 속으로 빠져든 것입니다. 김혜남 씨는 딸
아이를 꼭 안아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흉터는 바로 네가 큰 병을 이겨냈다는 징표란다. 어린 나이에 그
큰 수술을 견뎌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난 네
흉터가 오히려 자랑스럽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자랑스러워하실 이유는 바로 당신께서 만나게
하신 자아를 우리가 극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말을 들어도
되지만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처에 대해
아파하는 것보다 상처가 더 큰 축복의 준비단계였음을 아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치유되었다면 앞으로
받을 상처도 하나의 교육과정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상처가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임을 압니다. 주님께서 상처와 치유를 통해 당신께로 이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끊임없는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세상 종말의 표징: 박해/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28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21,12-19: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나는 표징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중간에 예루살렘 함락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12-13절)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박해를 당했고, 감옥에 갇히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재판관에게 넘기고 임금들에게로 끌고
갔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황제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온전하게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들이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죽음은 영혼에도 육신에도 올 수 있다. 영혼은 죽을 수 없지만,
하느님을 잃으면 죽을 수 있다. 영혼이 육신의 생명이듯 하느님은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명인 영혼이 육신을 버리면
육신이 죽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영혼을 버리시면 그 영혼은 죽는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버리시지 않도록 하려면 하느님을 위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을 버리지 않으시고, 따라서 그 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래도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을 안심시키신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보장해 주셨으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10,30-31)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굳은 신앙을 청하도록
하여야겠다.
우리의 육신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 가톨릭의 신앙이요 사도들의 신앙이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가벼이 보시지 않는 주님께서 우리를 가벼이 보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돌아가심으로써 그 육신을 잠깐 내려 놓으셨다가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그분에게서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이들의 머리카락 수효가
얼마인지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할까 까지도 일러주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시련과 갈등 없이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굳은 신앙을 주시기를 청하고 매일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굳게 해 주시도록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카 21, 18)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28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카 21, 18)
여기까지 오는 동안 주님의 수많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불안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오면서
수없이 껴안아 주셨고 수없이 이끌어 주셨습니다.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하여 주십니다.
과거도 미래도 우리의 앞도 뒤도 우리의 모든 시간을
돌보아주셨습니다.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잃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은 우리를 편안함으로 이끕니다.
머리카락까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감싸주십니다.
우리를 제대로 아시는 유일한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잃지 않게 지켜주시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매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주님께서 나의 등 뒤에 든든하게 서 계십니다!
2018년 나해 11월28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주님께서 나의 등 뒤에 든든하게 서 계십니다!
연극이나 오페라의 성공적인 공연을 위해서는, 무대 위에서 열연을
펼치는 배우나 가수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대 뒤나
무대 아래서 비지땀을 흘리는 도우미들의 역할 역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감독, 조감독, 대본 작가, 무대 연출, 조명 연출, 의상 담당, 소품 담당,
홍보 담당 등등, 그리고 아주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는 도우미가
있는데, 바로 프롬터(prompter)란 역할입니다.
프롬터들은 관객들이 안보이는 무대 뒤나 사각 지대에 몸을 숨기고,
배우들에게 대사나 동작을 조용히 일러주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들은 무대 뒤로 철저히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만, 살인적인 스케줄로
대본을 미처 다 소화하지 못한 배우들에게는 큰 힘이요 의지가
됩니다.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게 한계가 있지요. 어떤 때 무대 위 배우들은
머릿 속이 하얗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어떤 동작을
취해야 할지? 까마득히 잊어먹는 버릴 때, 배우 입장에서 프롬터의
존재는 참으로 고마울 것입니다.
때로 우리 역시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 다행스럽게도 우리 삶의 무대 뒤에 든든하게도
주님께서 서계십니다. 무대 뒤 프롬터처럼 할 말을 잊어버린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명확히 알려주십니다.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온몸으로 보여주십니다.
연중시기가 거의 끝나가는 요즘,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큰 사랑의
마음으로 경고도 하시고 질책도 하십니다. 박해와 환난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런저런 정보도 주시며,
당신께서 뒷받침할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복음 21장 15절, 18~19절)
이 세상에 딸랑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쓸쓸해하고 외로워하며, 밤마다 홀로 고독을 곱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허전함에 발버둥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을 바꿔 먹을 일입니다. 우리 모두의 절친한 친구요 든든한
언덕이 되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께서는, 이 세상 그 누구든
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낯선 곳을 향해 떠나갈 때, 부담스런 사람을 만날 때, 중요한 순간을
앞두었을 때, 더 이상 나혼자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내 바로 등 뒤에 든든하신 주님께서 나를 떠받치고 계시고, 내 왼쪽에
성모님께서, 내 오른쪽에 성령께서, 그리고 내 수호천사께서, 나란히
함께 서서 나를 지켜주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11월28일 (수) - 외모를 사용하시는 하나님
오늘은 “외모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마서 2장 11절 말씀에 “이는 여호와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오감을 가지고 살지요. 미각, 청각, 촉각, 후각, 시각 이렇게
우리는 오감으로 판단을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경우가 우선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에는 외모를 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분명히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외모를 모티브로 하여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즉 잘 생긴 사람은 잘생긴 값을 해야 합니다. 잘생긴 값이
무엇입니까? 그 잘 생긴 모양대로 사람들 앞에 많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타내 보임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따르고 싶어지는 행동 또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모가 사람들에게 내놓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은 외모 외에 다른 재능이나 뛰어난 기술로
잘생긴 사람들 보다 월등한 것으로 또한 인정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외모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기능으로 사용 되어지는 것 바로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기능을 보십니다.
그 자세를 보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하느님의 사람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1월28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루카21,12-19)
하느님의 사람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야 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8장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감옥에 갇혀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믿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 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2).
이제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6,15)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6),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1,12).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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