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2월2일 [(자) 대림 제1주일]
제1독서 예레미야서 33,14-16
제2독서 테살로니카 1서 3,12―4,2
복음 루카 21,25-28.34-36
◈ [서울] 대림 제1주일
2018년 나해 12월2일 대림 제1주일
새벽 알람 소리를 들으면서 잠시 망설였습니다. 안식년인데 그냥 더
자도 되지 않을까? 아니야 그래도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야하지
않을까? 문득 생각했습니다. 하늘의 해는 몇 십 억년을 어김없이 뜨고
지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달도 언제나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에도 죽기까지 실을 뽑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초는 다 타야만
비로소 눈물이 마르는 것을 봅니다.
베들레헴 성전의 입구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당신이
여행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순례와 여행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행의 중심이 ‘나’라면 순례의 중심은 ‘하느님’입니다. 여행은 내가
기쁘면 좋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면 좋고, 내가 채워가는
것입니다. 순례는 힘들어도 받아들이고, 만나는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고, 하느님의 뜻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여행은 이 세상에 속해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내가 건강하고,
내가 살아 있을 때만 볼 수 있습니다. 여행은 여유가 있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비용을 마련해야 하고, 친구가 있으면 좋습니다.
순례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세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다 보지 않아도 됩니다. 여유가 없는 사람도, 아픈 사람도, 비용이
없어도, 친구가 없어도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꿈꾼다면 우리는
순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행의 목적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것입니다. 인류의 문화와 유적을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삶의 동반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여행을 통해서 삶의 시야가 넓어지고, 삶의 활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례의 목적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픈
이웃을 보듬어 주고, 굶주린 이웃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외로운
이의 손을 잡아 준다면 이미 순례자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사랑으로
받아주는 아버지의 자비로움이 있다면, 강도당한 이를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다주는 연민이 있다면 이 세상은 순례자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이미 하느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대림시기를 시작하고 있으며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순례자가 되면 좋겠다고 합니다. 순례자인
우리들은 모두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면 그곳이 순례자의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례자가 가져야 할 태도를 이야기 하십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십시오.” 세상에는 깨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공을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깨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어
있음으로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깨어 있음으로 양심을 속이고,
깨어 있음으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음의 목적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
것이며 그것이 순례자의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주
예수님의 권위로 여러분에게 지시해 준 것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아름다운 가사가 기억나는 ‘순례자의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찬란한 꿈마저 말없이
사라지고 언젠가 떠나리라.
인생은 나뭇잎 바람이 부는 대로 가네. 잔잔한 바람아 살며시
불어다오 언젠가 떠나리라.
인생은 들의 꽃 피었다 사라져 가는 것,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세상을 언젠가 떠나리라.
인생은 언제나 주님을 그리는가 보다. 영원한 고향을 찾고 있는
사람들 언젠가 만나리라.
순례자가 되어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분의 오심이 곧 나의 종말
2018년 다해 12월2일 대림 제1주일
<그분의 오심이 곧 나의 종말>
복음:루카 21,25-28. 34-36
2018년 다해 대림 제1주일 – 그분이 오심이 곧 나의 종말
돈키호테는 기사에 관한 영웅소설을 하도 많은 읽어서 자신이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지닌 기사라고 믿어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시골 주막 처녀를 공주로 여기고 그녀를
위해 악의 무리를 무찌르겠다고 풍차와 싸웁니다. 그리고 자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진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거울의 기사입니다.
거울은 자신을 보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기사라는 것은 없고 그런
제도도 3백 년 전에나 있었던 것이라는 진실을 아는 것은
돈키호테에게 죽음과 같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거울의 기사와
싸웁니다. 하지만 결국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자
돈키호테는 정말 침대에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종말을 맞고, 진실이 오면 거짓은 죽습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시작인 대림 1주일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시기이지만 복음말씀은 세상 종말에 대해 설명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세상은 그 닥쳐오는 예감 때문에 두려움에 까무러칠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방탕과 만취와
세상 근심으로 무뎌지지 않게 하라고 충고합니다. 깨어 있으며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 종말을 맞는 이들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우리 각자도 종말의 두려움을 넘어서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진리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 모두가 믿고 있었던 것들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진리가
오시는데 이미 세상에 진리가 있었다면 그분은 굳이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로 오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은 거짓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었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요? 그리고
그 고통을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城)’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계속
만나야 할 분을 만나지 못하고 헤매는 한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K는
측량기사입니다. 그리고 한 성주인 백작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성으로
향합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K는 밤늦은 시각에 도착했다. 마을은 깊이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안개와 어둠에 둘러싸여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았고,
커다란 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아주 희미한 불빛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K는 국도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 속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가 숙소를 찾아 여관으로 들어가는데 성의 집사 아들이라는
사람에게 이상한 얘기를 듣습니다.
“이 마을은 성의 영지입니다. 여기서 살거나 묵는 사람은 말하자면
성안에서 살거나 숙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은 측량기사로서의 자존심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이미 성 안에 들어와 있다니.’
분명 이들이 착각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사실 측량기사 K는 안개와
어둠 때문에 자신이 성문을 통과한 것을 모를 뿐이지 실제로 성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음날 K는 백작을 만나기 위해 성을 찾아
떠납니다.
“그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지만, 길은 길게 뻗어 있었다. 도로, 즉
마을의 큰길은 성이 잇는 산으로 나 있지 않았다.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하다가, 마치 일부러 그런 듯 구부러져버렸다.
성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K는 이 길이 결국에는 성으로 접어들 거라는 기대를 계속 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기대나 예상이 무너지는 것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믿음과 선택이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자괴감으로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교만함이 참으로 자신을 자괴감으로 빠뜨리는
것입니다. K는 결국 그 성에 정착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게 되었을 때 성에 머물 수 있는 허락이 떨어집니다.
진리 앞에서 우리도 죽어야합니다. 내가 믿던 것이 아니라 내가 믿던
것과 반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거부한다면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떤 모르는 분과 우연히 대화를 조금 나누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제라고 하니까,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종교가 아니냐고 조심스레
말합니다. 이전에 개신교 신자였던 것입니다. 저는 아니라고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눈치였습니다.
이어 마음이 조금 열렸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자신의 아내는 외도를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친구와 오랜 시간 외도를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둘은 태연하게 자신을 대하고 있었고 이에
분노가 타올라 살인까지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혼하여 살며 자녀가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쉽지 않겠지만 그것은 실수이고 하실 수 있으면 자녀를
위해서라도 용서를 하려고 노력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었고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먼저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하며 그런 말을 한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려던 말을 접고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아이는 홀어머니 밑에서 커야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모습으로 성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쩌면
그 아이도 결혼해서 이런 과정을 또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혼하여 사는 것이 당연하고 그 분노를 삭이게 만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수까지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그
사람에게 해 줄 수 없었습니다. 진리는 자신이 믿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겸손함이 스며들 때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종말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종말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심판관으로 오실 때도 그러하겠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날 때도 이런 자기 허물어짐의 경험을 꼭 겪게
됩니다.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야(밭에서 뽑힐 때, 칼로 쪼갤 때, 소금에 절일
때, 고추와 젓갈로 버무릴 때, 장독에서 발효될 때) 맛난 김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어쩌면 배추가 받아들이길 원치
않는 진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만나면 자신은 죽지만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행복인지 알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고통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참 진리는 나를 죽이게 만듭니다. 내가 믿는 돈,
쾌락, 교만을 죽이게 만듭니다. 그것들에 믿음을 계속 둘 때 아기
예수님으로 태어나셔서 가난하고, 겸손하고, 정결하게 구유 위에
양식이 되기 위해 놓이신 예수님을 만나기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믿고
쌓던 행복의 성을 모두 허물어야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하느님의 성
안에 이미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은 나를 죽이러 오십니다.
내가 믿는 행복을 죽이러 오시는 것입니다. 나를 죽여주시는 것이
그분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라는
거짓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오시는 날이 나의
종말입니다. 내가 종말을 맞지 않았으면 아직 그분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언제나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는 삶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2월2일 대림 제1주일: 다해: 언제나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는 삶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된다. 대림이란 인류가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그리스도께서 정의와 평화를 주시는
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준비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셨던”(요한 1,14) 그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그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그분이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분은 이제
매순간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대림”을 살아야
하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제1독서: 예레 33,14-16: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켜 주리라
주님의 선언은 다윗의 정통 후손에 대한 약속에 집중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신 백성의 운명에 더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유다가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살게”(16절) 되면 그것이 바로
메시아의 공로일 것이다.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다윗의 정통 왕손(싹)”(15절)으로 메마른
땅에서 생존의 희망인 생명의 “싹”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
메시아를 일으켜 주실 수 있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바로 이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적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
‘정의와 평화’를 이룰 사명, 민족과 민족을, 국가와 국가를 하나로
일치시켜야 할 사명, 정신적 육체적 모든 악을 치유해야할 사명은
우리가 느끼듯이 성취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림이란 신앙인의 본질적
차원인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현대를
살아가면서 제기되는 물질적인 문제로부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고, 모든 사람들에 대해 사랑과 헌신의 최고의
표현이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카 21,25-28.34-36: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복음도 ‘기다림’의 자세를 알려주고자 한다. 이 ‘기다림’은 성탄을
넘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담화’의 내용이다. 복음에서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들어 신앙인들의 준비된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
(25-26절).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27절) 이 때 세상은 새로워져, 낡은
세상은 가고, 악과 죽음의 세력은 더 이상 그 영광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28절).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세상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지만, 인간의
거룩한 삶과 깨어 기다림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절)라고 말씀하신다.
세상걱정에 휩싸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것에 매여 하느님께로 가기보다 죽음의 길로 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 날은 어느 때 올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때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이다. 즉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났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영광스러운 만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깨어있는 삶을 언제나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36절).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계속적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대림의 삶인 것이다.
제2독서: 1데살 3,12-4,2: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살라
그러므로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오로 사도는
2독서에서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계속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는 분이시며, 이제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하여
잘 준비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 준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쓸데없는 마지막 날에 대한 생각과 두려움 때문에 이 순간을 잃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까지 앓을 수도 있다.
주님께서 오심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체험할 수
있는 삶이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노력한다면
우리가 시간 안에 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며 사는 것이다. 나의 이
순간의 삶은 바로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이 세상을 새로운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즉 참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이러한 선물도
인간의 협력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분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 역시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이 삶은 구원을 체험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사랑의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이 사랑의 삶이 곧
깨어있는 삶이며, 깨어있을 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삶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삶이 사랑의
완성인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무슨 일이든 극복하십시오. 오물을 뒤집어써도
즐거워하십시오!
2018년 나해 12월2일 대림 제1주일
무슨 일이든 극복하십시오. 오물을 뒤집어써도 즐거워하십시오!
지난 세기 세상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된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분이 계십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산전수전,
우여곡절 다 겪으신 분, 그러나 그 수많은 고초와 시련을 초긍정
마인드로 극복하신분, 그 끔찍한 죽음의 수용소 트라우마와도 당당히
맞서 이겨내신 분, 바로 빅터 프랭클 박사님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워낙 극한 체험을 다 하셔서 그런지, 인생의 양 극단을
다 섭렵하셨습니다. 극단적 합리주의에서 예민한 감정주의에 이르는
폭넓은 기질을 지니고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죽음의 수용소
생활을 끝까지 견뎌내고, 그 죽음과도 같은 트라우마에서 완전
벗어나서, 충만하게 자신을 실현시키며 행복하게 산 비결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제게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 원칙은 바로 아주 작은 일도 가장
큰 일을 할 때 처럼 철저하게 하고, 가장 큰 일은 아주 작은 일을 할
때 처럼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이 나중에 유명인사가 되어, 전 세계를 다니면서 강연을
하실 때였습니다. 한 두마디 짧은 논평을 할때면 조목조목 세밀하게
따져본 뒤에 메모를 하는 등, 심혈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수천명이 모인 자리에서 강연을 할 때면, 물론 원고를
꼼꼼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강연이 시작되면 마치 열
두명 앞에서 발언을 할 때 처럼 편안하게 했습니다.
빅터 프랭클이 그 고통스런 환경 속에서도 극도의 낙천주의자로 살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좋은 행동을 하면 잊지 않지만, 나쁜 행동을 하면
절대로 담아두지 않습니다.”
빅터 프랭클이 그토록 관대하고 넓은 인생의 지평을 소유하게 된
배경에는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겪었던 그 끔찍한 환경, 그 미칠 것만
같았던 분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삶의 의미를 추구했고, 고통에 담긴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일상의 작은 소소한 기쁨꺼리를 끝없이
찾아나갔습니다. 그는 수용소 벽에 붙어있던 감명깊은 글들을 보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긍정화시키는 작업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무슨 일이든 극복하십시오. 오물을 뒤집어써도 즐거워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
또 다시 맞이한 대림 시기입니다. 올해도 예년처럼 다양한 고통과
삶의 결핍들이 끝도 없이 다가올 것입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기쁨꺼리들을 찾아나서야겠습니다. 결핍이 크면 클수록 더욱
삶에 대해 ‘예!’라고 대답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2월2일 대림 제1주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기다림으로 한 해를 시작합니다.
기다림이 오고 계십니다.
기다림이 우리를 설레게합니다.
기다림이 우리를 새롭게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은 언제나 기다림의 길입니다.
기다림자체가 아름다운 길이 됩니다.
기다림은 기도이며 기다림은 늘 함께하려는 사랑입니다.
기다림과 기다림의 만남이 탄생으로 드러납니다.
간절한 사랑이 기다림이고 이제 기다림으로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이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기다림이 간절할수록 우리의 속량또한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근원은 우리 인생전체를 정화시켜 나가십니다.
기다림의 맛이 믿음의 맛임을 압니다.
믿음으로 한 해를 기쁘게 시작합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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