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한 다음날부터 하루돌이로 와룡산을 올랐다. 그 때 만난 사람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풍채가 좋은 호인처럼 생긴 나보단 한두 살 위로 보이는 분이었다. 어쩌다 보니 산마루 가까이에서 나는 오르고 그 분은 내려오면서 자주 만났다. 그때마다 그분은, 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정답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날씨 참 조오습니다!”
“아, 네, 그러네요.”
나는 건성으로 답하며 속으로는 구시렁거린 기억이 난다. ‘남 숨차 죽겠는데 인사는…. 날씨 좋은 거 누가 모르남.’그때만 해도 좀 외골수였던 나는 그 분을 만날 때마다 나누는 인사가 참 부담스러웠다. 낯선 사람과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은 한 10년 전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아 혹시나, 혹시나 한다, 대신에 이제는 내가 먼저 말을 건다. -산에 오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말을 걸지 않지만-
시간이 있어 아내에게 산에 오르자하면 다짐부터 한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따라가죠.”아내는 내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면 칠색 팔색을 한다.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그의 저서 ‘행복의 근원’이라는 책에서 ‘행복하려면 서로 조력해야한다’며 ’계단에서,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모르는 사람들과도 서로 행복신호를 켜는 작은 기쁨을 나누어야한다’고 권했다. 나는 서 교수의 말을 빌려 사람은 서로에게 반사되는 빛으로 가장 행복해 진다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신에 파리에 있는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벽에 붙은‘낯선 사람을 홀대하지 말라.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른다.’는 아포리즘을 하나님을 믿는 아내에게 농담으로 던진다.
’아웃라이어’를 쓴 맬컴 글래드웰은 ‘세상에서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일들의 대부분은 낯선 사람과 과감하게 말을 터보면서 시작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산에서 말을 터면서 일어난 일들이 수도 없지만 여기 생각나는 대로 두 가지만 적어 본다.
얼마 전 교직에 나와 총각시절 사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였다. 나는 술이 오른 김에 우리 집 위치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아파트 후문을 나서면 바로 숲길이 산자락까지 늘어서 있어 가을이면 목련꽃 그늘보다 더 진했던 잎들이 엄버지기로 노랗게 쌓여 있다. 그 노란 길을 걸으며 ‘낙엽 쌓인 그 길을 지금도 나 홀로 걷고 있네’ 하고 배호의 ‘고엽’을 흥얼거리며 정말로 나 홀로 걸을라치면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진다고. 하긴 나보다 2살 위인 허영자 시인의 시 ‘감’의 첫 구절처럼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헌데 친구들이 어느 날 오후 작당을 해 연락도 없이 쳐들어왔다. 산행을 한 후 식당에서 고기를 꾸었는데 이건 숫제 걸신 든 빚쟁이들처럼 마구 먹어치웠다. 계산을 하러 가면서 제법 나오겠다 싶었지만 나의 에어백들에게 이 정도 베푸는 건 약과다 싶었다. 헌데 웬일인가? 카운터의 아가씨가 누가 계산을 하였단다. 내가 어안이 벙벙해 하니 아가씨가 턱으로 내 등 뒤를 가리켰다. 돌아서 두리번거리니 중년의 사내가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얼핏 봐선 본 듯 만 듯했다. 그 사내는 가까이 다가와 펄쩍펄쩍 뛰며 말했다.
“덕분에 이렇게 건강해 졌습니다.”
그랬다. 나도 놀라웠다. 한해 전만 하여도 그는 풍을 맞아 온몸이 뒤틀리고 겨우 걸을 정도였다. 처음 만나는 날 그는 아내로 보이는 여인의 부축을 받아 뒤뚱뒤뚱 산을 오르고 있었다. 아내는 보기 드문 미녀였으나 격에 맞지 않았다. 짙은 화장을 한 얼굴에 자전거 휠만한 귀고리를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긴 어려워 보였지만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거짓말을 꾸며가며 격려해주었다.
“2년 전 난 당신보다 더 했어요. 그러나 보십시오. 지금은 이렇게 멀쩡합니다.”나는 그의 앞에서 펄쩍펄쩍 뛰며 말했다.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꾸준히 움직이십시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내 앞에서 펄쩍펄쩍 뛰며 말했다.
“어르신 덕분입니다.
청중의 질문에 호킹은 이렇게 답했다. “인간의 노력엔 어떤 한계도 없습니다. 삶이 아무리 험난해도 우린 뭔가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별은 가장 어두운 밤하늘에서 밝게 빛나고 희망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싹을 틔우는가보다. 말 한마디가 방아쇠가 되기도 한다, 했던가.
자리에 돌아와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며 스물여섯 살의 푸시킨이 이웃에 살던 열다섯 살짜리 귀족 소녀에게 써준 시를 읊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괴로운 법/ 모든 것이 순간이고 모든 것이 지나가리니/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우리.“
K가 웃으며 고소하다는 듯 이죽거렸다.
“청구서를 보니 가슴이 씨린 모양이지.”
노부부는 내게 아픔을 주면서 기쁨도 주었다. 풍상을 겪어온 경륜이 엿보이는 그들은 누가 갈라놓기라도 할까봐 언제나 손을 꼭 잡고 산을 오르내렸는데, 남자는 다리가 어둔했고 여자 분은 허리가 불편해 보였으나 아직도 꼬장꼬장해 보였다. 그 모습은 날것의 삶을 이겨낸 그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내 보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만났는데 그때마다 우린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젠 여자 분도 나를 만나면 반색을 하며,
“안사람 너무 아끼지 말고 데려와 봐요.”하고 농담을 할 정도다. 나도 며칠 못 만나면 장맞이를 할 정도다. 결혼 생활의 힘듦을 가장 유머러스하게 말한 사람은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다.
“결혼은 힘든 거야.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다고! 27년간 감옥에서 고문과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도 이겨낸 그도 출소 후 6개월 만에 아내와 이혼했다고!” 알랭 드 보통도 보탰다.
“독신에는 외로움이 결혼에는 괴로움이 있다.” 그의 말따나 인생은 외로움과 괴로움 사이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남녀가 서로 만나 한평생을 해로한다면 천국에 갈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굳게 믿는다.
어느 날 해질 녘 무렵 산마루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서있는 노부부의 실루엣을 먼빛으로 바라보다 이미 고인이 된 문인수 시인의 시집 '배꼽'의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도 좋은 풍경이 될 수 있음을 절감하고 나도 모르게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보기 조오습니다. 좋은 그림이 따로 없습니다. 어찌든동 그렇게 오래오래 다니십시오.”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청춘 남녀들보다 더 아름답게 두 손을 마주잡고 뒤뚱뒤뚱 걷는 노부부의 모습이야 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미국배우 잉그리드 버그만도 “나이 드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숨은 좀 가빠지지만 경관은 훨씬 더 좋아진다.” 했던가.
영국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참나무’가 떠올랐다.
네 인생을 살아라
젊거나 늙거나
저 참나무처럼,
…
나뭇잎들이
기어이 다 떨어지고
봐라, 그는 서있지
나무의 몸통과 가지
벌거벗은 맨몸의 힘으로.
첫댓글 말 한마디로 건강을 찾아준 기분 좋은 소식.
나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열심히 호의를 베풀어야겠네.
삶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찾아 가는 것
슬픔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찾아 오리라.
반석은 이미,
수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 놓고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