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
석오균
고군산 열도의 간판스타인 대장봉에 오르기로 4인이 머리를 맞대었다. 고작 해발 142.8m이다. 마을 주민들은 ‘구불길’로 올라가 대장봉 정상을 거쳐 ‘나무 계단’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추천한다. 초행이라 권하는 대로 오르기로 했다. L교수의 사모가 앞장서고 나의, 아랍어로 먼길을 함께하는 동반자라는 뜻을 지닌 라피크(Rafiq)가, L교수는 맨 후미에서 나를 컨트롤 하며 연신 이마의 땀방울을 훔치며 올랐다.
평탄한 길은 처음 출발할 때 50여 m이고 폭우로 흙을 빼앗긴 자갈밭에 가파른 길을 틈틈이 참나무 가지의 도움 받아 오르기를 한 시간여 되었을까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한 다스해 전 두타산 8시간 등정의 에너지를 소모한듯하다. 거기엔 50대 남자 한 분은 비타민 D를 만끽하며 서성이고, 어린 소녀로 보이는 학생은 뭔가 메모를 하고 있었다. 우선 출발하기 전 가게에서 준비한 비스켓을 나눠 먹었다. 주변의 노간주 나무 두 그루에서 품어 나오는 쥬피터향과 어우러져 헐떡거리던 숨을 진정시켜 주는 듯하다.
L교수는 나보다 10살 정도 젊다. 평소에 술·담배를 안 하고 체력관리를 잘 해서 인지 아니면 구룡포 뱃사람 기질이 있어서 인지 몸을 안 아끼고 체력 또한 다이나믹하다. 그는 그 여학생에게 말을 건냈다.
“중학생인가?”
“아~뇨~.”
“그럼 고등학생?”
“대학생인걸요~.”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러나 기분만은 나쁘지 않은 듯 부단히 메모하며 옆도 보지 않는다.
여대생의 모습에서 적자생존(適者生存)이란 표현이 또오른다.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 (H. Spencer)가 제창한,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멸망하는 현상을 뜻하지 않던가. 그런데 수필 강좌 시간에 강사님이 느닷없이 '적자생존'의 새로운 버전을 알겠느냐고 말문을 던졌다. 백 명 넘는 수강생들이 동공을 크게 할 즈음
“적는 자 만이 살아남는다!”
정말로 기발하였다. 전라도 강진 처갓곳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한 다산 정약용에 흠뻑 젖어 두 차례 문학기행을 다녀온 후로 궁금한 것이 쌓여 검색하다가 ‘둔필승총 (鈍筆勝聰)'이란 다이아몬드를 발견하고는 수필교실 강사님의 박학다식함과 재치 있는 유머에 감탄할 수밖엔. 이는 '천재의 기억력 보다 둔재의 메모가 낫다.' 풀이하면 기록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환언하면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 따라서 '적자 생존'인 셈이다. 한번 더 군더더기를 추가한다면, ‘무딘 붓이 더 총명하다.’ 다시 말해 서툰 글씨라도 기록하는 것이 기억보다 낫다는 말일진저. 중학생 같던 여대학생에게서 다산의 ‘둔필승총’이 연상되었다.
《비행기 일등석 사람들》의 저자 국제 승무원 미즈키 아키코 스튜어디스에 의하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인 비행기 일등석 이용객의 7가지 특징 중 하나이자 첫 번째가 ‘Pen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항상 메모하는 습관이 있고 모두 자신만의 필기도구를 지니고 다니더란다. 메모는 최강의 성공 도구로 봤다고 했다. 기록하는 행위는 상대에게 신뢰를 주고, 아이디어를 동결 건조시켜 보존해 준다는 것이다.
대장봉 정상에서 굽어보는 고군산 군도!
유인도 37개 섬과 무인도 26개 섬으로 모두 63개의 섬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친구들이 다정하게 이웃하고 있다. 산 정상에 오르긴 우여곡절 끝에 정신없이 올랐지만 내려갈 일 또한 걱정이 뇌리를 압박해 온다.
데크 계단이 잘 조성되어 있고 좌·우측에 로프마저 설치되어 있어 등산객을 많이 배려해 주어 고맙기 그지없다. 아내는 무릎 관절이 염려되어 하산할 땐 살얼음판을 걷는 듯 한다. 헛디디면 낭패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조심하며 내려오다가 잠시 숨을 돌리고 사방을 살피니 왼편에 바다로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상투에 갓을 쓴 형상을 한 ‘할매 바위’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조망하였다.
시작하면 끝이 반드시 있게 마련인가 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 계단을 ‘욕계단’이라 불렀다. 목책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는 코스도 시니어 에게는 쉬운 코스가 아니다. 계단이 가파른 데다 끝없이 이어지는듯해 ‘욕(하며 오르는) 계단'이란 악명이 지어졌나 보다. 그러나 길을 잘못들 일 없고 ’구불길‘ 보다는 비교적 수월하였다. 비록 야트막한 섬산이지만 악산을 너끈히 정복한 성취감은 안 올라본 이는 어찌 알려나?
미국 CNN 선정 ‘아시아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장소 18곳’ 중에서 우리나라 고군산 군도가 선정되었다. 군도에서 섬 여행 묘미가 가득한 것은 ‘무녀도’이고, 군도의 심장부는 하트 모양의 명사십리 해변 그리고 망주봉과 함께 ‘선유8경’이 볼만한 선유도 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고군산 군도의 간판스타인 ‘대장봉 등정’에 온 힘을 쏟았다.
고군산 군도는 20여 년 전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땐 대구에 살 때라 군산항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해 놓고 선박으로 선유도에 들러 걸어서 염전을 비롯해 몇 군데 구경을 무박으로 잠별하였지만 이번엔 바다 위 만리장성이라 부르는 새만금 방조제 (총 33.9 km) 중간쯤에서 신사도 사이를 잊은 연육교(連陸橋)와 섬과 섬을 잇는 다리 연도교(連島橋)를 바퀴로 여행하는 행운을 얻어 재미가 쏠쏠하였다. 과히 격세지감을 갖는데 충분하였다. 2박 일정을 다음엔 더 늘려야겠다.
여행은 새로운 곳을 탐방하는 것도 의미가 크다 하겠지만, 전에 간적이 있는 곳을 시차를 두고 방문하는 것도, 어떤 관심 있는 책을 1독 한 후 나중에 재독할 때의 묘미를 느끼는 듯 했다.
대장도의 대장봉 정상에서 한 애띈 소녀에게서 ‘적는 자 만이 살아남는다.’는 힌트를 얻었고,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가 제창한 ‘적자생존’을 확인하고, 정약용의 천재의 기억력 보다 둔재의 메모가 낫다는 '둔필승총'을 되새겼다. 일본의 미즈키 아키코 국제 승무원의 저서에서, 비행기 일등석 이용객은 자신만의 필기도구를 지니고 다닌데서 타산지석으로 삼음직하다.
십수년 전부터 알츠하이머 병고를 겪고 있는 아내와 생사를 같이 하는 친구는 아내의 핸드 백 마다 아파트 열쇠를 달아두었다고 했다. 난 계절마다 다른 외출복에 필기도구를 챙겨 둬야겠다. 적자생존이다!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석오균
《문장》 2012년 가을호 등단
수필집 《회초리》
* 농협 352-0373-1305-93
첫댓글 "적자생존" "둔필승총" 기억 해도 곧 잊어버릴 텐데
이게 현실인지도 모를일
친구야.
졸작이나마 읽어줘서 억시기 고맙네.언제나 건강하시게.
《대구문학》191호 2024년 1.2월호에 실린 작품일세.
많이 젊을 때 선유도에 청남회라는 모임에서 다녀 왔지만 푸른 바다와 회 먹은 기억 밖에는 별로 없는데
모재의 적자 생존을 읽으니 새삼 스럽네.모재의 수필을 여러 번 읽으면서 느낀바 있지만 적자 생존은 구성과
전개 작품에 담긴 의미 등이 아주 마음을 끌 까지 흥미 있게 하였네, 다시 한번 읽었네. 박식한 문장가의 면모가
뛰어난 작품이었네.
메모, 자네 글을 읽으면서 볼펜과 메모지를 항상 지니고 다니는 나를 발견 하고는 적자 생존 하고 싶어지네
좋은 글을 읽는 기쁨을 준 모재, 석오균 내 친구 에게 감사하네
나도 한참 물이 오를 때 다녀온 기억이 새삼 난다 마는
지금 모재가 다녀왔다니 건강이 부럽다. 더구나 내외가 ...
글도 물이 올라 싱싱하다. 역시 수필 회장 화이팅이다.
우리 언제 통일되면 백두산 한번 오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