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다해 12월31일 월. [(백)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제1독서 요한 1서 2,18-21
복음 요한 1,1-18
◈ [서울]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오늘은 한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이고,
고마운 일들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 감사드리며,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대학교수들이 2018년을 보내면서 정한
4자성어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고 합니다. ‘해야 할 일은 아직
많은데 갈 길은 멀다.’는 뜻입니다. 경제상황을 좋게 해야 하지만
방법을 찾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남과 북의 문제를 평화와
화합으로 풀어야 하지만 주변국의 이해관계가 있고,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가시적인 조치가 있어야 하고, 안보와 이념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불안을 해소해야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경쟁과 자본의 ‘틀’을
벗어나 복지와 나눔의 ‘틀’을 만들어가야 하지만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것,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은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수들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4자성어도
제시하였습니다. ‘공재불사(功在不舍)’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공은 그만두지 않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운무청천(雲霧靑天)’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구름과 안개를 헤치고 푸른 하늘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갈 길은 멀고 땅거미는 지지만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2018년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적은 7죄종이라고 합니다.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많이
배운 사람들을 쓰러뜨리기도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영적인 스승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끊임없이 공격하였습니다. 복음은 신앙인이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름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슬기, 통달, 의견, 지식, 굳셈, 효경,
두려워함’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줍니다.
성령의 은사는 죄지은 이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용기를
줍니다. 성령의 은사는 겸손한 이들이 열매를 맺도록 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함께하는 2018년의 마지막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2018년 한 해 동안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신 분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봉사하신 분들, 절망 중에 있는 분들에게 위로를 주신 분들,
고통 중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새해에는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빛을 맞이하는 자세
2018년 다해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빛을 맞이하는 자세>
복음: 요한 1,1-18
한 처음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생명이고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 안엔 반대로 죽음과
어둠만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둠이 죽음인데도 어둠을
좋아하도록 학습돼 있습니다. 그래서 빛이 와도 숨어버립니다.
변화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이 학습된 무기력을 ‘원죄’라
부릅니다. 이 원죄가 우리를 어떻게 사로잡고 있는지를 바닷가재를
통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영역다툼을 합니다. 자신의 안전과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 싸움은 형식적인 선에서 멈춥니다.
싸워서 둘 다 치명상을 입으면 제3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바닷가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닷가재에게는 딱딱한
껍질을 벗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 안전하게 숨어있을 바위 밑을
좋아합니다. 그 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대부분은
몸집이나 집게의 크기, 혹은 분비물의 양 등에 의해 큰 싸움 없이
서열이 정해집니다. 하지만 싸우지 않고서는 서열이 정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힘이 비슷할 때입니다. 그때는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끊어버리도록 싸웁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가재 속에서는 세로토닌이란 호르몬이 더
분비되고 패하면 옥토파민 호르몬 비율이 더 높아집니다. 세로토닌
호르몬이 더 많은 가재는 서열이 높아져 암가재들을 모조리
차지하지만 옥토파민이 높아진 가재들은 싸워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작은 가재들 앞에서도 고개를 숙입니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연애하다
실패했을 때 누구도 만날 자신감이 없어져 무기력해지는 인간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 우두머리와 가장 대등했던
가재가 자신이었고 다시 싸워 운만 있으면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가재가 자신인데도 그 패배감 때문에 가장 못난 가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호기심 많은 인간들이 이런 상황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습니다.
패배자 가재에게 세로토닌 호르몬을 주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울증 환자에게 처방되는 약물과 같은 것입니다. 이 호르몬이 주입된
패배자 가재는 다시 어깨를 펴고 싸움을 시작합니다.
[참조: ‘12가지 인생의 법칙 – 1.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조던
피터슨]
인간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어둠과 죽음에
사로잡혀 태어납니다. 본래부터 패배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둠인
동물의 본성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믿습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과
싸워 이길 수 있음을 믿지 못합니다. 사실 자신과 싸워야 되는지도
모릅니다. 뱀이 싸워야 할 상대인 줄도 모르고 친하게 지냈던 하와나,
물리쳐야 할 대상이 하와였음에도 그를 받아들인 아담과 다를 바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원죄에 물들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싸워 이기신 분으로 당신 안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을 우리에게 주입시켜주시러 오셨습니다. 죄는 죽음이고
어둠이기에,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세로토닌은 생명이고 빛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주사를 맞기를 거부합니다. 죄와 싸워 이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가 주는 짧은 쾌감만으로 만족하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죄 때문에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도 죄에 패하다보면 세로토닌 수치가 낮아지는데
그러면 패배자 바닷가재처럼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며 자신감이
없어져 결국 다른 인간들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입니다. 자신에게
당함을 허락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당신 승리의 호르몬을 우리는 성혈이라 부르고
또 성령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에너지를 통해 우리
자신과 싸워 이길 수 있음을 믿어야합니다. 마크 트웨인은 “우리가 뭘
몰라서 곤경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알고 있다면 곤경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착각 때문에 곤경에 빠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을 너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원죄에 중독되어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상태로는 절대 우리의 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적을 이긴
분의 호르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호르몬이 곧 우리 어둠 안으로
들어오는 빛입니다.
우리는 그 빛을 더욱더 믿기 위해 죄와 싸워 이겨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먼저 작은 것들과 싸워 이겨나가는 습관을 길러야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불 먼저 정돈할 줄 알게 되고 그런 승리들이
싸이게 될 때 그리스도처럼 가장 강력한 적인 내 자신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총과 진리를 받았습니다.
진리는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은총은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완전히 승리하게 될 때 우리는 또 다른 빛을 증언하는 작은 세례자
요한들이 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말씀이신 그리스도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다해 12월31일
복음: 요한 1,1-18: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3-4)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자면 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말이란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의지, 즉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말에 있어서, 그 말에 참으로 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하는 말이 진실성이 있느냐 하는 것은 그 말을 하는 그 당사자가
얼마만큼 성실하냐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활 속에서 체험한
정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은 말을 들을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올바로
알아들어야 상대방의 생각을 알 수 있고 나의 생각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이란 서로를 이어주고 서로의 뜻을 나눌 수 있는 고마운
수단이다.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말의 역할이 그러하다면, 바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역할을 해주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 요한의 소개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시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따르며 아버지께로 갈 수 있으며
친교를 맺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대로 이루어지는가? 백퍼센트의
효과를 낼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모든
느낌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인간의
말로는 부족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말로 인해서 상대방에게
큰 영향을 끼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순간 지난 일 년을
되돌아보며 어떠한 말을 어떻게 해서 얼마나 타인에게 도움이 되어
왔고 해가 되어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아들이 말씀 자체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의 뜻을 모두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오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한
점, 한 획도 그르침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진리 앞에, 그 말씀 앞에
숙연하도록 하자.
또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닮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을 새해에는 살아가도록 결심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어제의 것들은 어제의 땅에 내려놓읍시다!
2018년 다해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어제의 것들은 어제의 땅에 내려놓읍시다!
또 다시 한해의 마지막 날에 서 있습니다. 딸랑 한장 남은 달력을
걷어내다보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한숨과 동시에 드는 생각은? 저나 여러분들이나 비슷할 것입니다.
‘끔찍하다. 끔찍해! 이렇게 또 다시 나이 한 살을 더 먹는구나!’
‘아무것도 이뤄논 것도 없는데, 또 이렇게 한해와 작별하는구나!’
‘그토록 발버둥 쳤지만, 다람쥐 챗바퀴 도는 듯한 한해였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가슴을 세게 치며,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슴은 치되, 아프지 않게 살살 치시기 바랍니다. 조금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양한
제약과 숱한 걸림돌, 부족함 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최선을
다한 스스로에게 ‘고생했다!’며 좀 쓰다듬어 주고, 따뜻히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우리 인간의 이 쓰라린 상처, 그 틈사이를 뚫고,
주님 자비의 빛이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 자책하고 부끄러워하는 우리, 슬퍼하고 외로워하는 우리들
등뒤로, 빛이신 주님께서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어둠이 빛을 이길 없습니다. 악의 세력이 주님의 사랑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오늘이 지나고 새해가 밝으면, 분명히 태양보다
더 밝은 주님의 빛이 우리의 어둠을 거둬가실 것입니다. 그분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의 깊은 상처를 말끔히 치유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마지막 밤에는, 은혜로운 파스카 축제를 잘 준비하고
만끽합시다. 파스카(Pascha) 축제는 ‘넘어가는’ 축제
‘건너가는’ 축제입니다. 우리 모두 이 밤, 새해를 앞두고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건너갑시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땅으로, 슬픔의 땅에서 기쁨의 땅으로...
새롭게 맞이한 새로운 한해,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어김없이 망쳐버린
헌 시험지를 거둬가시고, 새하얀 새시험지를 선물로 나눠주십니다.
그러니 어제의 과오, 어제의 깊은 상처, 어제의 산더미 같은 근심걱정,
그대로 안고 넘어가지 말고, 어제의 것들은 어제의 땅에
내려놓읍시다. 새마음, 새정신, 새영혼으로 내일의 광야로
건너갑시다.
생명, 나의 삶, 만남들 사랑, 우정, 도전들 유대감, 한계, 고향
이 모든 것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감사하면서 올해와 작별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희망을 품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새해로 넘어가는 순간에 더 이상 지키지 못하는 약속
여전히 바꾸지 않은 습관, 기존의 것과 작별합니다.
미처 이루지 못한 것들을 이루겠다는
희망을 품고.(안드레아, 슈바르츠, ‘성탄이 왔다!’, 바오로딸)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수도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 14)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다해 12월31일 월.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 14)
그리운 말씀입니다.
사람이 되신 육화의 근원지는 분명 말씀입니다.
말씀의 온기는 사람의 온기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이 말씀이십니다.
말씀이 자신을 비우고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오신 말씀은 우리의 본모습을 되찾아 주십니다.
우리 가운데 존재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은 내려놓고 비우는 삶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품습니다.
사람이 깊어진다는 건 말씀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랑이 되셨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말씀을 받아들이는 빈자리가 놓여있길 기도드립니다.
말씀으로 가야 할 우리의 시간입니다.
말씀으로 나와 너는 우리가 됩니다.
사람은 말씀임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12월31일(월) – 요셉의 형통
오늘은 “요셉의 형통”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창세기 39장 3절 말씀에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범사에 형통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주인에게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요셉은 노예 신분입니다. 종의 신분입니다. 그런데
형통하다는 표현이 말이 될까요? 하지만 주님이 볼 때 요셉은 참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눈에 띄었을까요?
3가지로 얼마든지 눈에 띌 수 있겠는데 하나는 먼저 기민한 동작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마디로 민첩한 거지요. 마지못해 움직이거나
게으르거나 느리지 않았습니다.
또 요셉은 사람들에게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종들의 총무가 된 것을 보면 종들과 주인에게 일하는 속도나
일하는 열심이나 그 어떤 누구보다도 솔선하여 눈에 뛴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은 그가 무슨 일을 할 때이든지 짧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므로 일하는 것이 눈에 보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눈에 종 요셉은 자기 지혜로 하는 것 같지 않고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일을 하는 것, 실제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요셉의 모습과 성도 여러분들의 모습!
한번 비교해보시지요.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생명 그리고 빛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다해 12월31일 월. 성탄8일 축제 제7일(요한1,1-18)
생명, 그리고 빛
한 해의 끝자락에 왔습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 큰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감정의 기복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며 당신의 품에 머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을 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대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속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하게 주님의 품을 읽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한
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목말라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1,3-5) 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려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요한1,10-11).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요한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생명은 곧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기를 빕니다.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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