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1월20일 [(녹) 연중 제2주일]
제1독서 이사야서 62,1-5
제2독서 코린토 1서 12,4-11
복음 요한 2,1-11
◈ [서울] 연중 제2 주일
2019년 다해 1월20일 연중 제2주일
이곳 댈러스의 겨울도 제법 춥지만 한국의 겨울은 몹시 춥습니다.
예전 본당에서의 추억입니다. 복사 서는 아이들이 추운 겨울에 이렇게
이야길 했습니다. 6학년 건회가 4학년 진성이에게 물었습니다.
“야 너도 춥냐.” 4학년 진성이가 6학년 건회에게 대답합니다.
“안 춥습니다.” 그러자 6학년 건회가 대답합니다. “젊음이 좋기는
좋다.” 제가 볼 때는 6학년이나 4학년이나 거기가 거기인데 참
우스웠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의 지위,
능력, 재산, 학력은 다 거기서 거길 일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았다면 충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하느님 앞에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3가지 차원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첫째는 물질의 풍요함을 얻는 것입니다. 농업혁명, 산업혁명,
기술혁명, 인공지능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물질을 풍요롭게 하는
인간 노력의 결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는 걱정을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새도, 들의
꽃도 모두 먹게 하시고, 입혀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문화, 역사, 전통, 예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지구를 넘어
우주로까지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단순한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으며, 앉은뱅이는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는 걷도록 해
주셨습니다. 땅을 보고 걷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꿈꾸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듯이, 천사보다 못한 인간이 존귀의 관과 영광을 얻도록 해
주셨습니다.
셋째는 잘못된 관습과 제도를 개선하는 것입니다. 노예제도,
신분제도, 남녀차별, 인종차별과 같은 인간의 존엄과 인권을 억누르는
제도와 조직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소중하며, 모든
인간은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억눌린 이, 묶인 이, 갇힌 이에게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하느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강도 당한 이의
이웃이 되어주는 이가 하느님의 이웃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댈러스 본당은 41년 역사를 지니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다운타운 성전의 시기가 있었고, 임시 성전의 시기가 있었고, 지금의
아름다운 성전의 시기가 있습니다. 모든 시기는 각자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신앙공동체 였습니다.
다운타운 성전에서는 신앙 공동체의 씨앗이 심어졌습니다. 독일 이민
공동체가 세운 성당이라고 들었습니다. 공동체가 커졌고, 주차공간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해서 다른 곳을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성전을
위한 땅은 마련했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서 임시성전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임시성전에서의 추억도 많았을 것입니다. 공동체가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여러분은 드디어 여러분의
땀과 노력으로 새로운 성전을 신축했고,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신앙 공동체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 물을 주는 사람, 키우는
사람이 있지만 결국 모든 열매를 맺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다운타운 성전에서 씨앗은 뿌려졌고, 임시 성전에서 자라났고,
새로운 성전을 신축했지만 결국 신앙 공동체를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저의 큰 형은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글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음악도 잘해서 곡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형의
예술적인 재능이 부럽기도 했고,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작은 형은
운동 신경이 좋았습니다. 체격도 좋았고 양복을 입으면 잘
어울렸습니다. 싸움도 잘해서 형과 다니면 걱정이 없었습니다.
여동생은 무엇보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습니다. 어머니와
30분을 통화하는 가족은 동생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동생에게 이야기하시고 좋아하십니다.
큰 형처럼 예술적인 재능이 없었기에, 작은 형처럼 좋은 체격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처럼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미운오리새끼’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도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글 읽는 것을 좋아하고,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들었던 것처럼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능력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꽃밭을 꾸미는 아름다운 꽃이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시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는
원리
2019년 다해 1월20일 연중 제2주일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는 원리>
복음: 요한 2,1-11
가족모임을 하면서 우리 형제들이 나이가 들어가며 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자신감이 점점 사라져가고 가족이 전부가
되어갑니다. 이것에 비해 자라나는 조카들은 가족을 떠나 독립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작은 형은 만날 때마다 “나는 캠핑카 사서 여행이나 다니며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제주도에 집 사서 놀고먹으며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 꿈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모임에서 형은 뒤에 한 마디를 덧 붙였습니다. 저는 참
기분이 좋았고 지금보다는 일이 잘 될 것임을 느꼈습니다.
“나는 캠핑카 사서 여행 다니며 살고 싶어. 엄마와...”
저희는 아직도 어머니를 엄마라 부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우리의 꿈이 그저 놀고 편히 쉬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꿈은 하늘이 이루어주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돈을 벌어 이러저러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살고
싶다.’라는 꿈을 가져야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내어주려는 사람에게
더 주시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돈을 벌려고 하면 우울증과
화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물론 하는 일도 안 됩니다. 돈도 자신을 잘
사용해 줄 사람을 찾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지도자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도의 디팩 쵸프라는
어린 아들 둘에게 “너희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질게.”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남을 도와주다가 학교도 안 가고, 남의 공부를
가르쳐주다가 자신은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 아들은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고 다른 아들은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내어주려는 사람에게 더 주시고, 가르치려는 사람에게 더 알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통로를 넓히는 일이어야 합니다. 통로가 막혀 물이 고여
썩어버리면 그 통로로 물을 다시 흘려보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막혀서 꼭 필요한 곳에 흘러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통로는 버려지고 맙니다.
저도 묵상을 매일 쓰지만 이 묵상을 쓰는 것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받는 은총이 더 많다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그리고 제 묵상을 받아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50명, 100명씩 보내신다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자신만 읽고 마는 사람들보다는 이렇게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에게
더 보내주고 싶은 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아내가 자신만 돈을 쓰고 자녀는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더 이상 돈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가 자신은 아끼고
자녀를 위해 돈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때 남편은 일하는 것이 힘이
납니다. 모든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랑은 흐르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가두고 멈추게 하는 사람은 자신도 못 받고 남에게도
내어줄 것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받은 것을 다 내어주려고 하는
마음을 영성적으로는 ‘가난(청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총이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런 가난의 모델이 나옵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술이 필요한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 술을 주실 수 있는 당신 아드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당신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청하는 것이 아님을 아십니다.
그렇더라도 포도주는 성령을 상징하고 당신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연상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여인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이제 성모 마리아께서 받으셔야 하는
아내의 입장이고 예수님께서 주셔야 하는 남편의 입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자녀를 위해 남편에게 돈을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은 남편의 피땀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위해 청하는 것이기에 당당하게
이렇게 응대하실 수 있으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그러자 순종하는 하인들을 보고 예수님은 당신 피를 내어주십니다.
순종하는 하인들은 교회의 성직자들입니다. 교회는 무조건 하라는
대로 하는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살과 피의
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의 본성을 입게 되어 참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을
상징하는 카나의 혼인잔치는 가난한 한 여인 때문에 성취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지금 얼마만큼만 있으면 살 수 있느냐?’가 가난의 척도입니다.
집도 있어야하고, 옷도 있어야하고, TV도 있어야하고, 여가생활도
기본적으로 해야 한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것이 없어도, 길거리에 살아도, 굶어도,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가난해지면 돈도 부족해지지 않습니다.
세계의 대부분의 거부들은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주커버그, 심지어 영화배우인 주윤발 씨 등은 가진
재산 거의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3만 원짜리 시계를 차고 값싼 옷을 입으며 낭비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이 없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고 비싼 차를 몰며
거들먹거립니다. 그들에겐 돈이 전부입니다.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는 7조원 정도의 재산이 있으나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하루 1달러로 30일 동안 사는 연습을 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돈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거지가
되더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에 이들이 투자하는 돈은 힘이 있습니다. 남의
돈을 빌려서 투자하는 사람은 실패할 확률이 매우 큽니다. 갚아야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돈은 힘이 없습니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게임에서 돈을 딸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게임에서건 두려움 없는
사람이 승리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의 돈을 빌려서
투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절대 보증을 서 주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남을 도와주려다가 자신도 성공한 대표적인
성인입니다. 기차역에서 “목마르다.”는 행려자의 한 마디에 부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 직을 때려치우고 가난한 이에게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줄 줄 아는 사람에게 돈이
몰리게 돼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를 통해 흘러간 돈의 액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의 정신을 따르는 수도회가 여전히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의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며 어떻게
은총을 불러들일 수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얻으려면 반드시
내어주는 것을 좋아해야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다 잃고 아무 것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기도가
하루의 최고의 행복한 시간이 되게 하고, 단식으로 굶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몸을 길들여야 하며, 매달 일정액을 좋은 일을 위해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카나의 첫 번째 기적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20일 연중 제2주일: 다해: 카나의 첫 번째 기적
오늘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즉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부부관계처럼, 당신의 교회를 아내처럼
사랑하신다는 표징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마리아의
역할도 우리는 볼 수 있다.
제1독서: 이사 62,1-5: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 하시리라
우선 1독서에서는 고레스의 칙령(BC 538/37) 후에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재건되는 새로운 예루살렘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혼인식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하고 있다.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있는
화려한 면류관이 되고...다시는 네 땅이 ‘버림받은 여인’이라
일컬어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3-5절).
복음: 요한 2,1-11: 카나의 혼인잔치: 첫 번째 기적
카나의 혼인잔치의 기적 이야기는, 즉 그 표징은 혼인에 대한 축복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류와 맺으실 혼인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류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께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라고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때’는
아버지의 뜻을 결정적으로 이루시는 십자가의 때이다. 그러나 그
때는 그 십자가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에로
열려져 있다(요한 12,23.27-28; 17,1 참조).
원문에 보면 ‘그 때에’는 본래 ‘사흘째 되던 날’이다. 이
‘사흘째 되던 날’은 부활에 대한 어떤 암시적인 것이 있다고 본다.
또한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에서, 그 포도주가 그때까지 마셨던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였다는 사실에서 메시아가 와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의미를 알 수 있다. 많은 예언서에서 이 종말에
대해서 모든 결실이 풍성하고, 포도주가 넘쳐흐르게 되리라고 한다
(참조: 아모 9,13-14; 호세 14,7; 이사 25,9-10; 55,1).
오늘 복음의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구원의 장이 열리고 그것은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신비스러운 ‘회개’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잔치에 온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새로운’, ‘더 좋은’ 포도주를 주신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10절).
이러한 것을 성체성사에 대한 암시적인 내용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나오는 ‘새로운 것’에 대한
의미를 잘 알아들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그 가나 혼인잔치에
마리아께서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모습은 들러리의 모습이
아니라, 결정적이고 능동적이다. “포도주가 없구나.”(3절)는 말로
예수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시도록 하셨다. 이 말이 어떻게 해석되든지
간에 우리가 잘 보아야 할 것은 마리아께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와
어려움에 동참하는 사랑과 나아가 아드님까지도 그 일에
개입시키려는 그 노력이다. 즉 마리아의 깊은 사랑과 신뢰심의
태도이다. 이 신뢰심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완전히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4절)는 것은 거절의 의미로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
‘때’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는 그 ‘때’이며, 당신이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때’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든 삶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신이
끝까지 따르고 일치해야할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거절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5절) 이 말은 시나이 산에서 백성들이 응답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
(탈출 19,8),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따라야 한다. 그
때에 우리는 구원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였을 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메시아적 포도주'를 얻는다.
이 메시아적 포도주는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차원에서의 기쁨의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와 함께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세상을 위해
봉헌되는 잔치가 벌어질 갈바리아에 오르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러한
깊은 신비가 오늘 복음에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11절)고 하였다. 이것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권능 때문이 아니라, 더 큰 기적 즉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딱딱한 침대 위에서 혼인식을 치르게 되는 십자가의
기적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11절). 그 기적은 신앙을 불러 일으켰고, 그 기적을 더 큰
기적에 대한 ‘표징’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신앙은 참된 신앙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드님 예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이러한 신뢰심은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고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우리가 만일 형제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리하여 그들의 기쁨 또는
고통까지도 함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2독서: 1고린 12,4-11: 각자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은 공동체를
위한 것
바오로 사도께서는 각자가 받은 성령의 크고 작은 은총의 선물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 선물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공동체를
위하여 쓰라고 권고한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7절). 이 말씀은 정확히 말하면
가나에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잔칫집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당신 자신의 신적 모성의 ‘은총’을 사용한
마리아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총을 사용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치르실 거룩한 혼인잔치에
합당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갖고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성령의 은총을 잘 사용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즉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확실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2019년 다해 1월20일 연중 제2주일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확실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수도회 입회 전 청년 시절, 갑작스레 신앙의 불꽃이 확 타올라, 뭐든
열심히 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3박 4일 일정의 성령묵상회에
참석했습니다. 강도 높은 과정을 이수하고 난 뒤, 참석자들이
둘러앉아 자신이 체험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서로 나누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평소 엄청 과묵하셔서, 웬만하면 입 한번 안 여시던 할아버님께서
엄청 달라지신 것입니다. 얼굴도 환해지시고, 활기차게 말씀도
하시고, 기도도 일사천리로 술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혹시 할아버님께서 아침에 나오실 때, 실수로 할머님
틀니(^^)를 끼고 나오신 것은 아닐가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할아버님은 제대로 성령의 은사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말씀의 은사를 말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혹은 지식의 말씀이, 믿음이, 병을 고치는 은사가,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코린토 1서 12장 7~10절)
오늘 우리 각자는 과연 어떤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받았는지,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뭔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공동선을 위해 봉사할 특별한 은총, 재능, 장점, 강점을 선물로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이 아직 덜 뜨여서, 우리가 너무
둔감해서, 우리의 안테나가 너무 세상 쪽으로 치우쳐서, 그 선물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고 있지 못할 따름입니다.
중요한 것 한가지!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확실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걷고 있는 인생길에
늘 동반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사형통할 때도 현존하시지만, 깊은
고통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현존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보다 역동적이고
활기차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어디에 현존하시는 것입니까? 그 어디나! 때로 지금
내 손에 들린 영성 서적의 한 문장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들이 매일 아웅다웅하는
일터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통
속에 현존하십니다.
인사이동철을 맞아 또 다시 한줄기 바람처럼, 그간 정들었던 소임지를
뒤로하고 홀연히 떠나가는 사목자, 수도자들의 눈부신 뒷모습에서
성령의 현존을 느낍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기에 낯설고 두려운 길, 그러나 평생토록
갈구하고 기다려왔던 길이기에, 기쁨 가득찬 얼굴로 떠나가는
임종자들의 얼굴에서 성령의 현존을 느낍니다.
겸손하고 영성적이며, 품격있는 사목자, 수도자, 어른들의 깊은
배려로 양떼들이 주인이요 주체가 되고, 구성원들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어난 본당 공동체, 수도 공동체, 가정 공동체의 모습에서
성령의 강한 손길을 느낍니다.
성령께서 자꾸만 외곽으로 밀려나고 우리들이 중심에 자리잡을 때,
우리 교회는 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변방으로
밀려나고 우리들이 주인공이 될 때, 공동체는 그저 숙식만 함께
해결하는 기숙사나 여인숙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수도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20일 연중 제2주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
믿음은 삶을 성장시키고 삶은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삶도 깊어집니다.
믿음 안에서 삶의 잔치를 다시 보게됩니다.
우리에겐 믿음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거기에서 우리 믿음은 다시 시작합니다.
믿음이 우리 삶을 뜨겁게 물들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듯 믿음은 변화의 시간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삶이란 계속되어야 할 믿음의 잔치입니다.
채워야 할 믿음이며 새로워져야 할 우리의 믿음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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