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2월2일 [(백) 주님 봉헌 축일 (봉헌 생활의 날)]
제1독서 말라키 예언서 3,1-4
복음 루카 2,22-40
◈ [서울] 주님 봉헌 축일
2019년 다해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Those were The Days’라는 노래를 우연히 들었습니다. 감성적인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가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땐 그랬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젊은 날에 패기도 있었고, 정열도 있었고, 우정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다 지나간 추억이고, 지금
나의 모습은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순수했던, 사랑했던, 젊은 날이
있었습니다.” 추억과 기억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인간은
추억과 기억을 씨실과 날실로 삼아 역사와 문명을 만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원체험’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무엘의 체험이 있습니다.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모세의 체험이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ㄹ다.’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체험이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체험이 있습니다. 다마스코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오로 사도의 체험이 있습니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셨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순간순간들이 제게는 원체험이
되었습니다. 길을 잃어서 파출소에서 하루 지내고 있을 때 아버님이
저를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다. 유행성 출혈열로 중환자실에 있을 때
어머님은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고 돌봐 주셨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제게는 원체험입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신앙이 제게는
원체험입니다. 여러분들의 원체험은 무엇인지요?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을 인생길에서도,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도,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팔랑거릴 때도 원체험이 있는 사람은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험난함이 삶의 거름이 되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희망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진지 40일이 되는 날, 성모님과 요셉은 예수님을
성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예물을 바쳤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봉헌에는 크게 3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치’입니다. 국민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국민은 국가에 세금을 냅니다. 이는 국가와 국민이 일치하는 한
방법입니다. 국민과 국가의 일치는 자발적인 것은 아니고
강제적입니다.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국가는 강제적인 방법으로
징수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은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를
대상으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의 일치는
자발적입니다. 가장 큰 일치는 나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봉헌입니다. 우리가 이웃과 하나가 되는 것은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셨습니다. ‘제자들의 배반, 율법학자들의
모함,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고독’ 이런 것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의 결말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무겁기 마련입니다. 십자가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십자가는 나를 구속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열쇠입니다.
세 번째는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찬의 전례’의 핵심은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변화되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이 기도를 ‘감사송’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과 피를 봉헌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름다운 성찬기도문은 이렇습니다.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자,
예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저녁을 잡수시고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다시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악의 유혹은 ‘교만, 욕심,
시기’입니다. 이것을 이겨내는 것은 ‘정결, 가난, 순명’의 복음
삼덕입니다. 이 복음삼덕을 가장 잘 보여 주신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일치, 십자가의 희생, 하느님께 감사’하는
진정한 봉헌을 통해서 악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솔직하게 아프다고, 원망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이제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신앙이 있는 곳에, 당신의 몸을 성체의 모습으로 나누어
주십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봉헌축일을 지내면서 참된 '봉헌‘의 의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봉헌은 단순히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일부를 남과 나누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봉헌은 나의 욕심과 잘못을 비워내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입니다. 봉헌은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협상의 기술: 요구가 아닌
욕구에 집중하라
2019년 다해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봉헌 생활의 날)
<협상의 기술: 요구가 아닌 욕구에 집중하라>
복음: 루카 2,22-40
허브 코웬이란 작가는 “인생의 8할은 협상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협상은 회사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전반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와 어느 정도 협상을 하게 됩니다. 이 협상의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매일 싸우느냐, 사이좋게 지내느냐가 결정됩니다.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천재적인 물리학자라 불리는 파인만이
있습니다. 그는 천재였지만 성격이 고약하여 그의 기행만 따로
모아놓은 책이 있을 정도랍니다. 특별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1965년 전화 한 통화가 걸려옵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니 상을 받으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타면서 만나야 할 사람들, 일주일 동안 여행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도
끔찍하여 이렇게 응답합니다.
“됐어요. 상 받으려면 북유럽까지 오가느라 비행기를 10시간이나
타야하고 일주일이란 시간을 써야 하는데 ... 귀찮아요. 받지
않겠습니다.”
이에 놀란 노벨상 재단 측에서는 갖은 회유와 협박을 가했습니다.
“이 상은 초등학교 우등상이 아닙니다. 받으시면 국가의 영광이 되는
상입니다. 그리고 교수님, 일주일 씩 있을 필요는 없고요, 상만 받고
바로 가셔도 됩니다. 교수님이 이러시면 앞으로 다른 미국 노벨상
후보자들에게도 지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인만은 “됐습니다. 귀찮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이들은 협상이 아니라 협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협상과 협박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협박은 쌍방이 둘 다 기분 좋게 끝날 수는
없습니다.
이때 파인만의 아내가 나섭니다.
“여보,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그런데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번에 당신이 상을 거부하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발적으로
노벨상을 거부한 첫 인물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누가 관심을
가질까요? 바로 기자들이겠죠. 그냥 며칠 고생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파인만은 아내의 말에 설득당해 노벨상을 수상하러 떠났습니다.
[참조: ‘거절할 수 없는 협상의 신이 되는 법’, 웅이사의 하루 공부,
유튜브]
이 이야기는 최철규 작가의 ‘협상의 신’이란 책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최철규 작가는 협상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요구에 집중하지 말고
욕구에 집중하라.’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파인만이 제시했던 요구는 오랜 시간 여행하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만 듣고 날짜를 줄이려는 노력과 더
나아가 협박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파인만의 아내는 남편의 욕구에
집중하였습니다. 남편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 않으면 기자들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말하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상대의 욕구에 집중해야 상대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상대도 즐겁게 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도 통용됩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께서 아드님 예수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한 것입니다. 이제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들을 쓰시라는 뜻입니다. 당신을 참
주님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님 뜻에
맡기는데 주님께서 즐겁지 않으실까요?
아무래도 주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사 때 무언가를 청할 때 돈과 함께 청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통틀어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해 가장 즐거워하시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인간에게 감사의 봉헌을 받는 것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주님께 봉헌되어져야 했던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기에 모든 죄가 들어왔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에 그 죄가 사해졌습니다. 무엇을 얻어내려면 그
무언가를 주시려는 분의 욕구를 올바로 알고 그 욕구에 합당한 것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주님께는 그것이 ‘봉헌’입니다.
어떤 아이가 땀을 흘리며 슈퍼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콜라 하나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아저씨는 콜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할까요? 콜라 없다고 가라고 해야
할까요? 그 아이는 콜라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구가 아니라 욕구를 볼 줄 아는 주인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콜라 몸에 안 좋아. 완전 설탕 덩어리야. 물이나 이온음료가
어떻겠니?”
상대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상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성당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내가 원하는 것만 줄기차게 청해봐야 그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먼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그러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봉헌’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주님 봉헌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복음: 루카 2,22-4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오늘은 그리스도 예수를 낳으신 마리아가
모세 율법을 따라 정결예식을 행한 것과 예수님의 성전 봉헌을
기념한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 날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봉헌한 것을
따라 참회행렬을 했었는데, 이 행렬에 사용된 초를 장엄하게 축복하던
전통이 일 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성하는 것으로 전례 안에
정착되었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이것은 또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맏아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고 그 대가로 커다란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 때에 그것이 내가
모든 것을 잘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해서 주위의 칭송이나 칭찬을
바라게 되고,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리지 못하면,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의미마저 잃게 될 것이다.
작은 것이나 큰 기쁨이나,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으로 우리의 유한한
것이라도 그분에게 닿기만 하면 즉시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체를 받아 모시듯이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시고
나서 제단으로 나가신다. 율법을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
(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노인인 시메온과 한나는 깊은 신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맞았다. 그들은
아직 아기인 그분을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진닌 분임을
알아보았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주님을 기다려 왔고 그분이
오시자마자 신심 깊은 행실이란 두 팔과 꾸밈없는 믿음인 목소리로
그분을 찬미할 준비가 되어있는 모든 남녀 백성들을 나타낸다.
의인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구원은
먼 훗날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현재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구원을 이렇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그분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조롱했기 때문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처녀가 어머니라는 사실이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그리스도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마르키온파가 있으며 에비온파는 남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의 영혼을 꿰찌르는 칼은 그의 슬픔을
가리킨다. 마리아는 당신의 일생 동안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예언자 한나가 등장하고 있다. 먼저 시메온이
아기를 뵙고 품에 안아 본 다음에 한나가 나타났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38절)고 한다. 복음에 그녀의 조상과
지파를 밝힘으로써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그들이 증인이 되는 것이다.
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한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84세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그 할머니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안나 할머니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습니다!
2019년 다해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완벽한 인간 존재로서의
삶을 지향하고 추구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전혀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우리와 똑같이 마굿간 탄생을 통해 요셉 가문과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께서 키를
낮추셔서 우리와 시선을 맞추시고,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상류층 명망가들이나 고관대작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과 운명을 공유하셨습니다. 율법의
주인이시기에 율법의 지배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율법 규정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때로 너무 비이성적으로
몰상식할 정도로 세분화된 다양한 규정들을 정확하게
준수하셨습니다.
탄생 8일째 되던 날, 예수님께서는 다른 아기들과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할례를 받으셨다고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준수는 그분 일생에
있어서 기본 토대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순명하셨습니다. 순명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정신과 의미가 그분 안에 온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 세상에로의 완벽한 적응은 할례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탈출기 13장에는 맏아들과
맏배에 대한 봉헌 세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것을 모두 주님께 바쳐야 한다. 너희
가축이 처음 낳은 것으로 수컷은 모두 주님의 것이다. 너희 자식들
가운데 맏아들은 모두 대속해야 한다.”(탈출기 13장 12~13절)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떄,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수컷을 모두 주님께 바친다.”(탈출기 13장 15절)
가축의 맏배들은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 했지만, 사람의 맏아들은
그대신 속전(贖錢)이 치러져야만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정결례
제물 등급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인 산 비둘기 한 쌍을 바쳤는데, 그
중 한 마리는 번제물고, 다른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바쳤습니다.
제사와 제물의 주인이요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좌정하셔서, 제물을 받으셔야 마땅한 일인데,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겸손하게도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제사상 앞에 서신 것입니다. 놀라운 겸손이요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완벽하게 순결하신 분이시기, 정결 예식이 전혀 필요 없으신 분께서,
겸손하게도 죄투성이인 인간들이 제정해 놓은 정결예식에 기꺼이
참여하셨습니다.
틈만 나면 죄의 깊은 구렁 속으로 떨어지는 우리들입니다. 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언제나 정결 예식이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럽지만 틈만 나면 정결 예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습니다.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통해서, 그것이 힘들다면,
미사 앞부분의, ‘작은 고백 성사’라고 할 수 있는 참회예절을 통해서,
그 순간도 놓쳤다면, 또 다른 기회인‘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씻고 또 씻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습니다. 지속적으로 거룩한
상태를 유지할 것을 원하십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19장 2절)
씻고 또 씻어 정결하게 된 우리 자신을 이제 감사의 정을 담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해야 겠습니다. 매일의 정결 예식, 매일의 봉헌,
그것이야말로 주님 앞에 늘 깨어있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수도회]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 2,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2일 토.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 2, 23)
봉헌이 일상이며 봉헌이 우리 생활이 되어야합니다.
봉헌으로 우리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게됩니다.
함께 하는 믿음이 진정한 봉헌입니다.
흐트러진 우리 삶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봉헌입니다.
삶의 모든 배경이 되어줍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봉헌으로 더욱 깊어집니다.
봉헌 안에 존엄함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봉헌이 우리를 정화시켜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봉헌으로 당신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봉헌으로 모인 공동체가 바로 수도 공동체입니다.
구원을 가능케하는 것은 봉헌입니다.
나약함과 두려움속에 있는 우리를 봉헌이 주님께로 데려갑니다.
가야할 길을 아름답게 하는 봉헌이 있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는 봉헌입니다.
봉헌은 모든 일상임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2월 2일 (토) - 가로등 같은 하나님
오늘은 "가로등 같은 하나님"에 대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 말씀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1900년 4월 10일 전구 3개가 달린 민간 가로등이 종로에
설치되었습니다. 바로 이날이 바로 ‘전기의 날’ 기념일 입니다. 희미한
등불을 보다가 대낮처럼 밝은 가로등은 천지가 개벽하듯이 온
대한민국이 변화가 되는 첫 출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에 우리는 어른들의 가르침이나 명심보감이나 각종 교양도서로
우리의 삶에 희미하나마 등불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내가 어디서 왔으며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들에게 호롱불에서 전깃불 켜지듯이 우리 인생의 앞날을 대낮처럼
밝게 비춰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가는 곳에는 변화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글을
모르는 이에게 글을 가르쳐 줍니다. 음악을 모르는 이에게 음악을
가르쳐 줍니다. 사랑을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심어
줍니다.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던 그들이 타인을 사랑하는 이웃사랑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 삶이야말로 너무나도 값지고
귀한 삶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누구도 우리의 확실한 안내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 우리의 등불이 되고 우리의 가로등이
되어서 우리의 앞날이 대낮처럼 밝은 새로운 삶으로 안내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기다림의 기쁨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2월2일 토. 주님 봉헌 축일 (루카2,22-40)
기다림의 기쁨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는“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한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기에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고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12,1).라고 말합니다. 사실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 되었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을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만민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령 아무
것도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
(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신앙과 삶은 하나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기다림이든지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 기쁨이
되고 복이 되길 바랍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려고 일어서신다. 주님은 공정의
하느님이시다. 행복하여라, 그분을 기다리는 이들 모두!(이사30,18)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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