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3월2일 [(녹)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집회서 17,1-15
복음 마르코 10,13-16
◈ [서울] 연중 제7주간 토요일
2019년 다해 3월2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고 최인호 선생의 ‘나는 나를 기억한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유년시절의 이야기부터 작가로서 살아온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글을 통해서 50년대와 60년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씨 안에
뿌리, 줄기, 꽃, 열매가 담겨있듯이 지금 나의 모습은 유년시절의
기억들 속에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자상함,
어머니의 사랑, 형제들의 따뜻함이 지금 나의 삶 속에 함께 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동생과 함께 고양이 앞에서 찍었던 5살 무렵의 사진도 기억납니다.
형들과 함께 집 앞 뜰에서 찍었던 7살 무렵의 사진도 기억납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길가에는 큰 천막이 쳐졌고,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음식을 먹었던 모습도 기억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이면
시골에서 친척들이 오셨고, 또래의 사촌들과 좁은 방에서 함께 자던
것도 기억납니다. 동네에서 하루 종일 놀았고, 가끔 개울에 가서
수영을 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지금처럼 화장실이 수세식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처럼 모든 정보가
빛의 속도로 전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샤워꼭지만 틀면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집집마다 보물 상자인 텔레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이 풍족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나비와 꽃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 꿈과 희망이 마음 안에 가득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빠른 비행기와 우주선으로는
태양계를 벗어나기도 힘이 들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업적으로는
피라미드 이상 높은 건축물도 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년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올
수 있도록 어머니가 10개월 동안 나를 품고 있었음을 감사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일어날 수 있도록, 걸을 수 있도록
나를 먹여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이 있었음을 감사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무상으로 모든 것을 받았으니,
나도 무상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많은 능력을
주셨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있으며,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 감성이 있습니다. 우주와 세상의
시작을 사유할 수 있는 오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 분노, 미움, 원한’의 쓰레기를 담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 희생, 나눔, 배려, 인내, 사랑’의 보석을 담으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하늘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의 것|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2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하늘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의 것
복음: 마르 10,13-16: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놓고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자세를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조건은 아무 것도 없다. 단순히 어린이처럼
처신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15절).
어린이들이 부모를 바라보듯이 제자들도 하느님을 그렇게 바라보고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받아들이고 행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스승이 제자나 어린이를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아이들이 축복을 받도록
예수님께 데려왔던 것 같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나무랐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 때문에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짢아하시면서
어린이들을 맞아주시고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이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14절)
그 어린이는 하느님을 거슬러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일 수도 있고, 갓
태어난 아이나,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수도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로 누구든지 믿음을 갖고 세례를 받는 은총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온
아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어린이는 벌어먹지 않고 부모가 주는 대로 받는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든지 또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벌어들인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과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자세이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에 걸려
넘어진다. 하느님의 자비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 선물을 어떻게 샤용 하느냐가
문제이다.
그것은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 역시 세상의 지혜와 명예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에 있음을 우리도 알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주님이 가신 길이 어떠한 길이었는지 묵상하며 순간순간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가는가?
2019년 다해 3월2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가는가?>
복음: 마르코 10,13-16
제가 소년원에서 고해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하는 고해를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두 번 놀랐는데 처음은 ‘어떻게 아이들이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였습니다. 뉴스에서나 볼듯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과 단 둘이 앉아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두
번째 놀란 것은 ‘그런 아이들이 어쩌면 이리 마음이 깨끗할까?’
였습니다. 그런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답지 않게 고해하는 내용과
주님께 바라는 내용은 매우 순진하고 단순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을 키워주신 할머니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었고 어떤
아이는 자신이 아프게 한 친구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전부였습니다. 본당에서 듣던 아이들의 고해성사와는 차이가
났습니다. 그 아이들은 무언가를 갖고 싶다거나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것에 비해 소년원 안에 있는 아이들의
바람이 지극히 단순하다는 사실에 그들이 어쩌면 밖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보다 더 깨끗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아이들을 막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런 아이들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아이들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가진 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떤 자세로
예수님께 다가왔는지를 알면 우리 또한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수님께
다가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공부를 잘 하게 해 달라는 것도, 건강하게 해 달라는 것도, 성공하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다만 ‘쓰다듬어’달라고 주님께 오는
아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쓰다듬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개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세상을 가진 듯이 꼬리를 흔들며 기뻐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음식을 준 것도 아니고 잠자리를 준 것도 아닌데 그저 또
한 번 쓰다듬어 달라고 쫓아옵니다. 그저 사랑을 받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 주인의 개라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쓰다듬어 주는 주인이 그 개를 굶길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개가 주인에게 먼저 음식을 달라는 마음으로 다가온다면
주인은 그 개가 어떻게 느껴질까요? 무섭게 느껴질 것입니다. 음식을
주지 않으면 물어버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미사에 나가면서
예수님께 이것저것 청할 것을 들고 나가면서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실망하고 화를 낼 마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쓰다듬과 인정받음만을 바라며
나아가야합니다. 그러면 다른 것까지도 다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어떤 분이 “왜 자식보다 손주가 더 예쁜지 아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녀에게는 바라는 것이 많고
손주에게는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바라는 것이 많다는 것은 더 불만이 많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바라야합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이 우선이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라는 것을 들어주지 않더라도 그분의 쓰다듬만 있으면
만족할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미처 청하지 못한
것도 들어주실 것입니다. 사랑받아 기분 좋은 느낌, 그것만을 바라며
기도하고 그것만을 위해 미사에 나아갑시다.
(기도해 주신 분들 덕분에 성지순례 잘 하고 왔습니다. 계속
복음묵상 안에서 뵙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진정성 있는 사죄와 보상,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노라는 결심!
2019년 다해 3월2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진정성 있는 사죄와 보상,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노라는 결심!
3•1절 맞아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이 이왕이면 편안하고
마음씨 좋은 이웃, 서로의 아픔을 덜어주고, 서로의 상처를 따뜻히
보듬어 주는 그런 친형제보다 가까운 이웃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우리 나라는 정말이지 지지리도 이웃 복이 없습니다.
하필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호전적이고 야비한 하이에나 같은 이웃을
제대로 만난 것입니다. 틈만 나면 쳐들어와 우리 것을 깡그리 다
수탈해갔습니다. 채 피어나지도 않은 우리 꽃같은 소년 소녀들을
이역만리 낯선 곳으로 끌고가, 혹독한 고통과 죽음을 겪게 했습니다.
그 정도 큰 잘못을 저질렀으면 백번 천번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마땅한데, 그들은 아마 인간이기를 포기했나 봅니다.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예의를 망각하고, 군국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아베 수상을 비롯한 군국주의자들의 파렴치함을
도무지 용서할수 없었던 하루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용서와 화해에 대한 가르침도 사실은
상식적인 것이고 일반적인 토대 위해 성립됩니다. 용납할 수 없는
굴욕적이면서도 일방통행식의 용서와 화해로는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자명합니다.
상대방의 인생, 상대 국가의 얼굴에 평생 씻지 못할 치명적 과오와
상처를 입혔다면, 그에 합당한 방식과 절차에 따른 진정성 있는
사죄와 보상, 다시는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노라는 결심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절차가 이루어진 다음에 용서나 화해라는
단어가 사용 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리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 오랜 굴욕과 슬픔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사과
하는듯 하지만, 돌아서서 우리를 비웃고 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먼저 떠나신 순국
선열들이 그 모습을 보신다면, 정말이지 눈을 감지 못하실 것입니다.
오늘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3•1절을 맞아 위안부 할머님들의
억울함을 기억하며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과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천주교
전국행동’에서는 또 다른 가슴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하는 작업을 진행 중인데, 이에 맞서 일본 정부는 다양한
압력과 금권을 앞세워, 노골적인 방해 공작을 계속해 왔더군요.
멀고도 가까운 이웃의 끝까지 뉘우치지 않는 모습 앞에 분노를 금할
길 없습니다. 우리 민족과 세계 앞에 씻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질러
놓고도 끝끝내 제대로 된 사과 한번 하지 않는 그들, 자위(自衛)라는
미명 아래 자위대(自衛隊)를 창설하고, 또 다른 군사 강국을 꿈꾸는
그들을 어떻게 인간이라고 할수 있을까 싶습니다.
순풍에 돛단듯 순조롭게 이루어질듯 보이던 북미간 정상 회담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는 배경에 대해서도 진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신속히 진행되고 있던 한민족 간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위대한 여정에, 철저하게도 패스 당했다고 여기며 배아파하던 그
사악한 무리들의 음흉한 권모술수가 떠오르는 것은 저만의
상상일까요?
오늘 3•1절을 지내며, 항일 항쟁의 최선봉에 선 투사들의 면면을 보니
다들 그렇게 청춘의 나이였습니다. 그들만의 특권인 젊음, 그 젊음이
발산하는 순수함, 그 순수함이 지향하는 정의로움과 용기가 그들을
목숨 건 애국 투쟁으로 이끌었는가 봅니다. 그들의 어린이와 같은
순진무구함이 나라와 겨레를 위한 혁명과 희생으로 인도했나 봅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코 복음 10장 14~15절)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2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 15)
어린이에겐 오늘이 중요합니다.
어린이는 오늘도 즐겁게 꿈을 꿉니다.
자유롭게 이쪽과 저쪽을 드나듭니다.
존재하는 하나하나가 너무 궁금합니다.
하나하나가 중요하듯 물음을 던집니다.
어린이는 기쁘게 놀 줄 압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어린이는 집으로 돌아갈 줄을 압니다.
어린이는 그냥 좋아하고 그냥 사랑합니다.
어린이는 안길줄 압니다.
어린이는 오늘의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랑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맑은 날 되십시오.
어린이와 예수님의 관계안에서 맑은 하느님 나라를 보게됩니다.
어린이의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부산] 연중 제7주간 토요일 / 염철호 요한 신부 강론 묵상
2019년 다해 3월2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인 집회서는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알려 줍니다. 그것은 바로 때를 알아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권한을 가지는 것이고, 모든 생물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도록 하여 모든 것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지성과 하느님의 능력을 해석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게 된
것이며, 분별력과 혀와 눈을 가지고 귀와 마음으로 하느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흙에서 창조된 피조물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의탁하며 그분 앞에서 그분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율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심으로써, 인간 스스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사람은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이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음을 깨달아 언제나 하느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모습을 닮아
태어나 부모에게 사랑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아울러 어린이는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들과 우애를 나누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창조된 모습대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사람,
철저히 하느님의 피조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 부산 교구 가톨릭 대 신학 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 -
◈ [기타] 3월 2일 (토) - 강한 나라 이룰 성도
오늘은 “강한 나라 이룰 성도”에 대하여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민수기 14장 12절 말씀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정적인 소리를 하는 자들을 정말 싫어하십니다. 조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염병을 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들을 멸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도 한 번 보십시오. 부정적인 소리하는 사람치고 잘
되는 것을 보셨습니까? 원망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은 표정을
보셨습니까?
그들의 얼굴은 어둡고 그들의 모습은 결코 따라 배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 긍정의 말을 하는 자들을 사용하시지요.
그리고 크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캄캄한 얼굴로 부정적인 소리를 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멸망당하기를 원하십니까? 절대 긍정의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강한 나라를 만들고 잘 사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