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3월11일 [(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레위기 19,1-2.11-18
복음 마태오 복음 25,31-46
◈ [서울] 사순 제1주간 월요일
2019년 다해 3월11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결정을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기업에서 일하던 젊은이가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였습니다. 충분한 보수와 미래가 약속된
일자리를 그만두고 선택한 새로운 일은 청소부였습니다. 이유는
있었습니다. 대기업에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원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경쟁하는 과정에서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비록 보수는 적었지만, 시간에 여유가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새벽에 건물에 들어가서 청소를
하기에 사람을 마주칠 일도 없었고, 남는 시간에는 청소하면서 느낀
경험과 감정을 만화로 그렸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청소하는 것도
즐거움이었다고 합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았고, 딸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던 어머니의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당당하게
하는 젊은이의 선택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런 딸의 결정을 존중하고
함께하는 어머니의 사랑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김난도 교수님이 중심이 되어 펴낸 ‘2019년도 대한민국의 트렌드’
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대기업, 공동체, 기존 질서와 틀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인터넷과 정보의 세상에서 존재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합니다. 혼밥, 혼술, 혼집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에 맞춘
상품, 주택, 오락, 예술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밥을
해주는 엄마가 필요했지만, 밥을 사주는 엄마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가족끼리도 단체 카톡방이 만들어지고, 개인의 시간을
존중해주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기존의 질서와 틀은 인터넷과
디지털의 시대에서 자란 세대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교회는 2019년도의 트렌드를 잘 읽고 있는가?
2019년도의 트렌드에 맞는 새로운 처방을 내리고 있는가? 인터넷과
디지털의 세상에 사는 이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교회는 사순시기의
의미를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상선벌악, 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의 교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앨빈 토플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변화는 삶의 필요성이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농경과 목축의 시대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과의 관계가
중요했습니다. 외부의 공격을 함께 막아내야 했습니다.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을 도와야 했습니다. 나도 언제 그런 상황에
부닥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통제가 느슨한 곳에서는
공동체의 질서와 윤리가 필요했습니다. 부당한 폭력을 통제해야
했습니다. 인간에게 내재한 거룩함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큰 덕목이었습니다. 나에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보답할 수 없는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나도 보답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터넷과 디지털의 시대에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 이, 아픈 이, 헐벗은 이는 우리
주변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거지 모습을 한
왕자가 많습니다. 거지 모습을 한 왕자에게 따뜻한 물을 준다면, 옷을
나누어 준다면, 아픈 곳을 치료해 준다면 왕자가 왕이 될 때 반드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거지인지, 거지 모습을 한
왕자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한 친구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군에 입대한 친구는 본당의
자매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습니다. 본당의 자매도 답장을 해주곤
했습니다. 힘든 군 생활에서 본당 자매의 편지는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 같았고,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자매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제 곧 결혼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편지를, 받은 친구는 마음이 아프고, 아쉬웠지만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결혼 후 1년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친구는 자매님을
위해서 1년 동안 묵주기도 5단을 하기로 했습니다. 친구의 기도가
도움이 되었는지 자매님은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고, 친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껴서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기에, 그 친구는 아름다운 사제가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야기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을 말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굶주리고, 아픈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생각이 곧 유혹이다
2019년 다해 3월11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사랑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복음: 마태오 25,31-46
영화 ‘완벽한 타인’(2018)에 유해진과 염정아 커플이 나옵니다.
유해진은 아내에게 애정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아내를 매우 엄격하게
대합니다. 뭐든지 트집을 잡습니다. 염정아는 무슨 빚이나 진 듯
남편에게 주눅이 들어있습니다. 유해진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여자와
몰래 외도를 합니다. 자신을 잘 이해해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염정아는 이렇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결혼 초에 염정아가 징역을 살아야 할 정도의 큰 교통사고를
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필요했기에 유해진은 자신이 운전한
것으로 가장하여 대신 징역을 삽니다. 그 이후부터 아내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염정아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그때 내가 그냥 징역을 살았어야 했어요.”
유해진은 자신이 가정을 위해 대신 징역을 살아준 것에 대해 아내를
원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한없는 사랑을 줍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아까워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사랑하면서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서
행복하지 않다면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이집트의 신화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이 두 질문에 모두 “예!”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인생에서 기쁜 일을 찾았습니까?”
“그리고 그 기쁜 일이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습니까?”
사랑의 희생적인 면만 보고 자신은 고생만 했다고 여기면 그것은
사랑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은
걸 해 줬는데!”라며 보답이 작은 것에 대해 원망스러운 말을 합니다.
보답을 바랄 것이면 해주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흘려보내는 것이기에 어차피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것을 받아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어서 사랑이 자신 안에도 찰 수 있음에 감사해야합니다. 사랑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웃에게 감사하지 못하다면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본성은 내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기억을 잘
못합니다.
염소는 모기와 같습니다. 모기는 남의 피를 빨아먹으면서도 그 피해를
준 것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기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무관심했어도
죄책감을 못 느낍니다. 그냥 자기가 좋은 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들도 착한 일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행복해서 한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비는 꿀을 먹기 위해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꽃들을 수정시켜줍니다. 그것들이 열매 맺게 도와주었대도
나비는 그 좋은 일을 한 것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자신에게
꿀처럼 행복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좋아서 하는 행위들이 사랑이어야 합니다. 태양은
자기가 좋아서 타지만 지구의 생명체를 살립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내가 행복해서 하는 것이기에 남에게 공치사를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주면서도 모두에게 빚쟁이처럼 고개를
숙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유언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는 톤즈에서 여러 해 지내면서 톤즈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제가 그들에게 얻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작은 것에감사할 줄 알았고 부족한 가운데 나눌
줄 알았습니다. 톤즈 사람들과 아이들은 저를 사제로서 교육자로서
믿어줬고 친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톤즈의 친구들에게
감사하면서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채권자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채무자입니다. 해주면서도 빚쟁이처럼 느낍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사랑을 받아주는 사람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언가 더 해 주었다고
생각하면서부터 본성이 양에서 염소로 바뀝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래서 항상 행복하십시오. 그것 때문에 이웃에게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천국의 열쇠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사순 제1주 월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11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25,31-46: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순절에 어떠한 마음으로 이 시기를 살고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 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으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축복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시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이 당신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심판하시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계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본성 안에서 굶주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안에서 굶주리신다. 또한 당신의 가난한 이들
안에서 목말라 하시고, 당신의 종들 안에서 헐벗으신 분이시다.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신 분은 당신의 종들 안에서 병드셨다. 모든 사람을
해방하시는 분이 당신의 신자들 안에서 감옥에 계시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혼자가 아니다. 주님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겪는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그들과 함께 겪으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 주님께서는 옳은 일을 한 그들을
칭찬하셨다. 아버지께 복을 받는다는 것! 이렇게 큰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35절). 얼마나 대단한 영예인가! 얼마나 큰 복됨인가! 그분은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신다.
그러나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은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41절)고 하신다. 영원한 불은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지, 인간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저주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다만
그들의 행실을 단죄하신다.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아닌데
그들 자신이 스스로 그 속으로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단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내가 나의
종들 안에서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보살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릇된 일을 저지르지 않은 자들이 이런 단죄를 받았다면 악마의 일을
행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46절)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영원할 것이다.
죄인들은 영원한 벌을 받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해 줄 것이고, 그분을 닮게
하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이 사순시기에
실천하도록 은총을 구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 45)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11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 45)
가장 가까이에 우리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주저앉아 있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우리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사랑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의 얼굴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로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가난한 이들로 계십니다.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따뜻이 맞아들이고
입을 것을 드리는 것이 복음적 사랑입니다.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가는 것이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반대편에는 또다른 우리들이 있습니다.
가장 가치있고 아름다운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을 내어주어야 할 우리의 사순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먼저
우리의 모진 마음을 뚫으며 희망의 자리로 바꾸어주십니다.
가장 가난한 자리가 실은 사랑을 나누어야 할
가장 뜨거운 자리입니다.
모든 것이 나눔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통해 잊어버리고 산 나눔이 다시 살아납니다.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매일 매 순간을 기쁨과 사랑 속에 살아가는 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2019년 다해 3월11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매일 매 순간을 기쁨과 사랑 속에 살아가는 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신
성덕에로의 초대장인 사도적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Gaudete et Exsultate)에 이어, 저희 살레시오회 총장 앙헬
페르난데스 신부님께서도 ‘당신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교황님과 총장님께서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내용이 있더군요.
성덕(聖德)이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는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성덕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는 성경에서부터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19장 2절)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5장 48절)
이러한 흐름은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교회
헌장에서는 성덕에 대한 보편성을 결연히 강조하면서, 이 세상 그
누구도 성화의 길에서 배제되지 않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러한 우리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얼마나 고맙고 은혜로운 것인지
모릅니다.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위대하시지만 우리
인간도 위대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떠나지 않을 떄, 그분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실때, 그분이 우리 안에 점점 커지고 내가 작아질 때,
우리 역시 신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때 신적인 품위의 찬란함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 우리 인간이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우리 역시 하느님을 향해 발돋움 할 수 있다는 것, 그분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것, 그분과 혼연일체, 일심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결국 성화될 수 있다는 것,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교황님과 총장님께서 거듭 외치시는 또 하나의 강조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성인(聖人)이 되는 것,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옆집에 사는 성인들’ ‘담 너머 성인들’이라는 표현까지
쓰십니다. 그렇다면 성인의 길은 오늘 우리에게도 활짝 열려있는
것입니다.
성녀 에디트 슈타인이 아직 무신론자였을 때, 두번의 특별한 만남을
통해 결정적 회심의 기회를 잡았다고 회상합니다.
첫번째 만남은, 전쟁에 참여했다가 젊은 나이에 죽은 친구의 부인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은 사랑하는 남편과의 사별로 인한
사무치는 고통 속에서도 놀라운 신앙의 빛을 드러내보인 한 젊은
과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답니다. 젊은 과부의 삶 안에 깃든
성덕의 향기를 느낀 것입니다.
또 한번의 만남은, 단지 유명한 예술품에 대한 관심 때문에 찾아갔던
한 성당 안에서 한 노부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날 따라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던 노부인은 그 바쁜 와중에도 쇼핑백을 들고
성당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에디트 슈타인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성체 안에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흠숨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노부인의 깊은
신앙에서 큰 감화를 받았답니다. 노부인의 삶안에서 매일 반복되고
축척된 성덕의 흔적을 발견한 것입니다.
성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미온적인 삶, 물에 물탄 듯한
삶, 실체가 없는 실존에 만족하는 삶, 근근이 마지못해 살아가는
삶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덕의 도전은 매일의 삶에서 벗어난
특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성화된다면 매일의 삶을 통해
성화됩니다. 매일 매 순간을 기쁨과 사랑 속에 살아가는 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석방을 기다리는데 나 자신을 소모시키기를 중지하고,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가리라. 날마다 주어지는 기회를
붙들리라. 일상의 행동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수행하리라.”
(가경자 구엔 반 투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추기경)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심판의 기준은 사랑|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3월11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마태25,31-46)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다.
허름한 옷을 입고 술에 취한 상태로 성당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행려자인 듯 했습니다. 은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성당에
어떤 해가 되는 일을 하면 어쩌나? 마침 몇몇 신자들이 돈을 주어
보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지
않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움이 큽니다. 그들이 예수님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5-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이냐 염소냐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듯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그러나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 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 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성 그레고리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
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행동으로 사랑하는 날
되시길 희망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한 사람 한사람이 나그네
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믿음과
사랑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3월 11일 (월) - 지혜로운 네 곤충
오늘은 ‘지혜로운 네 곤충’에 대해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잠언 30장 24~28절 말씀에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25.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26.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27.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28.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자 아굴은 겨울을 위하여 여름을 준비하는 개미에 대하여, 큰 바위
사이의 보호를 활용하는 사반에 대하여, 모두가 다 힘을 모아 떼로
다니는 메뚜기에 대하여, 약하지만 사람 손보다 빠른 도마뱀에 대하여
지혜로운 네 짐승의 삶의 법칙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알려줍니다.
즉, 우리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 때 미리 개미처럼 부지런히 준비
하라는 뜻이고, 사반처럼 주위에 강하고 튼튼한 사람의 도움을
활용하고, 또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서로가 힘을 모아 공동체로
메뚜기처럼 살라는 것이고, 기민하고 재빠르게 도마뱀처럼 살아갈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귀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배울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배우려고 하지 않고 무심코 그냥 스쳐버리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28절 말씀에서도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고 충만하고 정복하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기 위하여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배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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