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3월29일 [(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 호세아 예언서 14,2-10
복음 마르코 복음 12,28ㄱㄷ-34
◈ [서울] 사순 제3주간 금요일
2019년 다해 3월2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안식년을 지내면서 신부님들의 강론을 듣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대구
범어동 성당에서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신부님은 도와주는
것과 섬기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도와주는 것도, 신앙인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강도를 맞아 피를 흘리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도와주는 것은 힘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약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섬기는 것은 도와주는 것과는 또 다른 덕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삶을 이야기하셨고, 제자들에게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도와주는 신앙, 도와주는 삶도 충분히 가치가 있고,
의미 있는 삶입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존경받을 수 있고, 그렇게만
살아도 세상은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으려면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친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명동 성당에 오셔서
‘대림 특강’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법정
스님이 주지 스님으로 있었던 ‘길상사’에 가셔서 말씀하시고, 길상사의
발전을 위해 기도를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종교를 넘어서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볼 수 있었나 봅니다.
불교의 계율과 가톨릭의 율법에 따르면 서로 다른 종교의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계율과 율법을
넘어서 ‘자비와 사랑’은 서로 통하기 때문에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법과 계율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아닐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밤새 울어도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엘 가야 할 때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먼 길을 바래다주면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몇 시간씩 공항 대합실에서 출장 갔다 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비행기가 연착되었다고 해서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다림은 설레임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중요한 것을 선택하기 위해 우리는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기러기 엄마, 아빠가 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기도
합니다. 좋은 일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도, 건강도, 사랑스러운 자녀들도 온전히 나를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나를 온전히 채우는 것은 나를 만드신 분에게서 오는
것이며, 나를 만드신 분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힘입니다.
오늘 성서는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립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온 마음과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전해 주는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결승점을 보지 말고 한 발 앞만 보라
2019년 다해 3월2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결승점을 보지 말고 한 발 앞만 보라>
복음: 마르코 12,28ㄱㄷ-34
아라비아에 세헤라제드란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임금의 호출을 받게 됩니다. 이 호출은 죽음의 부르심입니다.
왜냐하면 그 못된 임금은 누구든 하룻밤을 지낸 뒤에는 반드시 죽이기
때문입니다.
세헤라제드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첫날 밤
임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하고는 끝을 맺지 않습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임금은 세헤라제드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천 일을 넘겼습니다. 그렇게 ‘천일야화’ 혹은
‘아라비안나이트’가 탄생한 것입니다.
세헤라제드의 이야기는 천 하루 만에 끝났지만 임금은 그녀를 여전히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임금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임금은 더 이상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처음부터 그녀 머릿속에 천 일 동안 할 이야기가 다 담겨있었을까?’
아닐 것입니다. 하루 이야기하고 나면 그 다음 날 것을 또 생각해내야
했을 것입니다. 줄거리는 있었을 지언 정 자세한 내용은 그때그때
생각해내야 했을 것입니다. 며칠 만에 천일동안 할 이야기를 자세하게
지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할 때도 그렇게 말하셨습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그녀에게는 별거 아닌 날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들이 모여 마데 데레사 성녀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에 대해 말씀하시며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님께 모든 마음을 다 쓰고 항상
주님생각만을 하지는 못합니다. 또한 나의 힘도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쓰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참
행복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연옥에 가지 않기 위해 ‘비르짓다의 7기도’를 매일 바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에게도 하루의 15분만 할애하여 이
기도를 바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그런 식으로 연옥에
안 가려고 하는 것은 너무 비겁한 거 같아요.”라고 말하고, 어떤 분은
“그거 바친다고 연옥에 안 가겠어요?”라고 말하며, 또 어떤 분은
“저는 의지가 약해서요.”라고 말합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이 기도를
바치기 전에는 이런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작을 해보니 ‘끝까지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년 넘게 매일 바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연옥에 가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약속, 혹은 치명자의
지위에 올려주신다는 약속 등은 바치면서 더 믿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도 좋지만 주님은 이 기도를 바칠 수 있는 나의 의지를
보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걸음부터
매일 하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좀 그렇기는 합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자랑스럽게 꾸준히 하는 것 중의 하나는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매일 읽는다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 항상 이 책을
조금이라도 읽고 잡니다. 거의 30년을 그렇게 해 왔습니다. 10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이었고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책을 제일 싫어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펴 놓고 잠들기 전에 한 줄이라도
읽으려고 하였습니다. 처음 책들은 본래 두께보다 두 배는
두꺼워졌습니다. 한 줄 읽고 얼굴을 책에 파묻고 잔 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침 때문에 책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하다 보니 5년이 걸려 10권을 달 읽게 되었고 그 사이에 사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정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단거리도 뛰어보지 않은 사람이 마라톤을
생각하면 숨이 막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만 1초라도 매일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을 한다면 이미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하게 되는
완전함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먼 거리도 한
걸음부터 시작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완전하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며 망설이고만 있다면 영원히 시작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운동도 처음부터 너무 무리해서 하면 며칠 버티지 못합니다. 누워서
식은 죽 먹기만큼만 시작해야합니다. 팔 굽혀펴기도 두 개를 목표로,
달리기도 5분을 목표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매일 해도 1년 후면
상당히 달라져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출발점입니다. 시작도 하지 않았다면
관심도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매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양 만큼만
정하여 무엇이든 오늘부터 시작해봅시다. 그 별거 아닌 것이 매일
되풀이되면 내가 바뀌고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사순 제3주간 금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2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12,28-34: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하라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하신다. 이 사랑의 계명은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이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 모든 계명들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신명6,4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29절) 라고 대답해 주신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며 인간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고
하신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체하지 않고, 돈을 자기
몸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만물의 주님께서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비롭게 행한 것을 바로 당신께 해드린 것으로
여기심을 알고 있다. 그리고는 열심히 그 선행을 실천한다.
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함께가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확증은 바로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꾸준히 일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주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당신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친밀한 사랑을 알고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처럼 진실해야 한다고 고백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한 율법학자의 대답은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도 자비를 가로막는 판단은 하지도 말고
듣지도 않아야 한다. 자비는 모든 번제물괴 희생제물보다 낫기
때문이다. 사순절의 모든 삶은 바로 이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이 말씀은
율법학자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아직도 떨어져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율법학자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말씀을, 그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아직 멀리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상대를 닮아간다고 한다. 부부의 모습이 닮은 것도
서로간의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 30)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2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 30)
참으로 중요한 것을 너무나 자주 우리는 잊고삽니다.
욕망에 묶인 우리를 풀어주어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놀라우신 하느님 사랑을 계명안에서 만나게됩니다.
하느님 사랑은 가장 중요한 사랑의 관계를 일깨워줍니다.
사랑의 관계회복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일상의 본뜻과 가치를 찾게됩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강력한 초대입니다.
사랑으로 새로워지고 사랑으로 성장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모두를 살립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정체성이 됩니다.
하느님 모상대로 빚어진 우리는 사랑으로 하느님을 만나게됩니다.
모든 계명의 완성은 분명 사랑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의 시간 삶의 자리 이 모두는 이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사랑의 관계임을 가르쳐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방향이며 목적이며 모든 것의 전부입니다.
사랑으로 나아갑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청주] 실천함으로써 완성됩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3월29일 사순 3주간 금요일 (마르12,28-34)
실천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일은 예수님시대 전후에 종종
있었던 일입니다. 유다교에는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 참조 : 신명6,4-5)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 참조: 레위19,18).는
사랑의 이중계명은 십계명의 핵심정신이고,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근본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하여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에 대하여 슬기롭게 말하고 동의한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천상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완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요, 알고만 있다면 멀리 있지 않은 밖이라는
사실입니다. 운동경기에서 골인을 한 것과 골인할 번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나무에
오른 자캐오에게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선언하셨고
율법학자에게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며 감히 예수님을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하며 즉시 변화된 행동을
보였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그러므로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부산] 사순 제3주간 금요일|염철호 요한 신부 강론 묵상
2019년 다해 3월2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이는 당시 율법
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던 주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기도문인 “쉐마, 이스라엘”, 곧 “이스라엘아, 들어라.”라고 시작하는
신명 6,4-5의 구절을 들어서 하느님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레위 19,18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계명이라고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서 잘 알고 계시다고
말하면서, 구약 성경 구절들
(1사무 15,22; 시편 40〔39〕,7-9; 이사 1,11-17; 호세 6,6)을 들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로 답하는 율법 학자를 보시고 그가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오늘 등장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을 그냥 떠보는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보니 모든 유다 지도자가 예수님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분을 올바로 깨닫는 이들이 있었기에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예수님
이야기는 당신을 올바로 깨닫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전파됩니다.
- 부산 가톨릭 대학교 성서신학 교수 염철호 요한 신부 -
◈ [기타] 3월 29일 (금) - 하나님의 택한 야곱
오늘은 ‘하나님의 택한 야곱’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창세기 28장 14절 말씀에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과 축복권까지 뺴앗는 이기적인
야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에게 천사까지 보여주며 이와 같이
자신에게도 축복을 받지만 자손에게도 축복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순종하는 사람도
쓰지만 이와 같이 세상적인 욕심을 가진 자도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어떤 모습이던, 어떤 모양이든 사람의 판단과
정죄로 시간낭비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도저히 쓸 수 없을 거 같은
욕심쟁이 야곱을 하나님이 쓰신 것을 볼 때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같이 않은 사람을 사용하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어떤 모습으로 쓸지 아무도 모릅니다. 본인
스스로를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좋은 점도 보지만 나쁜 점도
보십시오. 그렇게 좋지 못한 여러분을 교회로 인도하여 성도로
만들었지 않습니까? 참 하나님은 대단하신 분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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