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4월4일 [(자)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탈출기 32,7-14
복음 요한 복음 5,31-47
◈ [서울] 사순 제4주간 목요일
2019년 다해 4월4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젊은이들이 우리가 사는 이 땅을 ‘Hell 조선’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Hell은 지옥을 뜻하는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젊은이들은 우리가 사는
땅을 지옥처럼 느낄까요? ‘취직, 결혼, 출산, 주택마련’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겼든 시간을 살았던 분이
있습니다.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전쟁의 시간을 살았던
분이 있습니다. 타국의 탄광에서 검은 석탄을 캐야 했던 분이
있습니다. 중동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땀을 흘렸던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고, 오늘 우리는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국민의 뜻으로 권력을 바꿀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오천 년을 살아온 이 땅은,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오천 년을 살아갈 이 땅은 Hell 조선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강산이며, 희망의 땅입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은 희망을 버리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합니다. 마치 별이 없는 밤하늘과 같다고 합니다. 연옥은 그릇된
희망을 품은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우정을 배신한 사람이
가는 곳이 지옥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황금으로 소를 만들어서 숭배했습니다.
그릇된 희망을 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연옥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유다는 별이 없는 밤하늘과 같은 지옥을 체험했습니다.
바빌론으로 유배 가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바빌론이 지옥이 아니라, 희망이 사라진 현실이
지옥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희망을 걸었던 모세는 비록 광야에서
방황하였지만, 형 아론이 동족을 선동해서 황금 소를 만들어
경배하였지만, 지옥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희망에
응답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바빌론 유배지에서 하느님의 침묵을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탓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불신
(不信)을 처절하게 반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빌론은 이제 지옥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희망은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전과
땅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에서 말씀과 실천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함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구원은 단순히 생명 활동을 이어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가치와
의미의 문제이며, 구원은 존재의 변화를 뜻합니다. 구원은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구원은 깨달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순간을 살았어도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은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했어도 주어지는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구원은 유전적인
형질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 정신, 의미,
영혼의 문제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되었을까요?
첫째는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셨고, 죄인들은 치유되었으며 구원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둘째는 우리를 죄악으로 이끄는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악의 세력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이겨내셨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구원은 나의 문제를 넘어서
공동체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모든 생명이 두려워하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용기와 평화를 주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일어설 수 있게 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생명의 활동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따름으로
우리에게도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위선의 스트레스가 죄의 원인이다.
2019년 다해 4월4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위선의 스트레스가 죄의 원인이다>
복음: 요한 5,31-47
범고래는 덩치가 7~8미터에 달하는 검은 색 등과 흰색 배를 지닌
동물입니다. 그런데 2010년 틸리쿰이라는 한 고래가 그의 조련사
‘돈 브랜쇼’를 공연 도중 물어서 사망하게 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착하던 범고래가 여 조련사를 물고 이리저리 휘저으며 풀장 안을
돌아다닌 것입니다. 브랜쇼는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왼쪽 팔은 골절되고 팔꿈치는 탈구되어 잔인하게
죽었습니다. 브랜쇼는 시월드에서 16년 일한 베테랑 조련사였고
틸리쿰과는 14년을 함께 일했을 정도로 친했습니다. 시월드 측은
사고라고 주장했지만 야생에서 범고래에게 인간이 공격당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범고래는 왜 그 오랜 우정을 깨고 자신의 조련사를 죽였던
것일까요? 범고래는 어미와 새끼의 교감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런데
틸리쿰은 어렸을 때부터 어미와의 교감 없이 수족관에서 훈련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가족의 애착형성 없이 그저 인간을 위한 쇼와
번식용으로 사용되었던 틸리쿰은 그 쌓인 스트레스를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2살 무렵 포획되어 다른 범고래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좁은
물탱크에 수용되어 살았던 틸리쿰의 저 행동을 우리는 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본성대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본성대로 살지 못하게 강요한 인간의 죄가 더 클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이유도 이와 같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사람인데 자꾸 하느님처럼 살라고 하니까 힘이 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쌓이는 스트레스를 죄로 푸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모르는 아이는
욕심을 부려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남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법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기처럼 남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다시 말해 어른이 되어야하는데 자신을
여전히 아기처럼 여기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인간이라
여기면서 하느님처럼 살려는 이들이 짓게 됩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을 인간이라 여기면서도 하느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하느님이라 믿었으면 그런 행동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믿음이 없으면서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려고 했던
이들이 사제들과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본성적으로는 그렇지 못한데 남들 보는 앞에서 그렇게 살려다보니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낮과 밤은 매우 달랐을
것입니다. 낮에는 하느님의 자녀로, 밤에는 죄인으로 산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합니다. 사람이 하루 종일 두 발로 걸었다고
그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본성이란 자신이 편해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은 것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됩니다.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세리와 창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죄는 짓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자신들이 속아서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상태면 구원 받기 매우
어렵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큰 죄가 아니면 자신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도 마치 아버지가 유산을 달라는 작은 아들에게
유산을 준 것처럼 인간이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인간이 죄인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단식하면서 얼굴을 찌푸리면 안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일을 죽음까지 무릅쓰며 해내십니다.
그리고 그 하시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어디 다른 데 풀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존경하라고도, 당신의 행동에 감사하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살지 않는 이들도 탓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그 일을 함으로써 만족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행동을
하면서도 만족하신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데로 하나도 빠짐없이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면 그분은 본성이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도 예수 그리스도가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서도 그 스트레스로 다른 풀 거리를 찾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온전한 믿음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그분처럼 사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의 수준을 알면 됩니다. 믿음을 더
증가시키려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면 마치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 등을 보며 사람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사순 제4주간 목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4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
복음: 요한 5,31-47: 너희를 고발할 사람은 모세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32절) 그분은 믿지 않을 수 없는 진실한 증인이시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한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음을
상기시키신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35절) 바로 그 요한이
주님을 증언하였다.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
(요한 1,33)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36절) 예수님께서는 권능을 증거로 대시면서 당신이
아들이시라고 입증하신다. 그분이 하느님의 권능으로 하신 일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37절) 이 말씀은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이 모두 그분에 관한
아버지의 증언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일들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즉 아들이 행하는 일은 아버지의
증언이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같은 본성이 작용하고 있으며
아버지께서는 그 일들로 인해 그분을 증언하신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는다.
또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39절) 그들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분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40절)
그렇기 때문에 그들 마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다.(42절) 이 말씀은 믿음 없이 단지 성경을 읽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진정한 성경의 열매는 거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을 그들은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43절) 성경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이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시편 118,26)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에게 나타나신 바로 그 주 하느님, 곧 하느님의
말씀이셨다. 그분이 바로 복되신 분이시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람들 가운데 오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었던 모세이다.”(45절) 그들은 모세를
믿는다고 하면서 감히 모세가 기록해 놓은 그분을 거스르고 있다.
그것은 모세를 잘못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을 고소할 이는
그들에게 율법을 준 모세가 될 것이다. 그들이 모세를 올바로
알았더라면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46절)에
그리스도를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글을 믿지
않기에 예수님의 말도 믿지 못한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다 이루신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분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생활해야
한다. 이 사순시기에 더욱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 36)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4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 36)
온전히 하느님께 의지하는 믿음을 청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은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위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전부이십니다.
은총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우리를 향한 놀라우신 사랑을 확신합니다.
나약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놀라우신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기에 희망과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이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소중하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음을 진실로 진실로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청주] 눈 먼 열심|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4월4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요한 5,31-47)
눈 먼 열심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풍성한
수확도 기대할 수 있으니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는 하지만 눈먼 열심으로 쉽게 지치고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 안에 화를 쌓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열심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5,39-40). 유다인들은 열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하느님에 관해서, 메시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루두루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심지어 하느님의
의를 세우고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처형
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연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헛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참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합니다.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우리는 실상 많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일에는 소홀합니다. 많은
지식을 쌓으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 서적을 보는 시간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신심서적을
읽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는 몇 시간을
보내지만 성경을 펴 들고 있는 시간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관해서 열심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12,11) .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한 오늘이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이들을 살리려고 무던히도
애쓰셨습니다. 그러한 큰마음으로 갈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전주] 사순 제4주간 목요일|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다해 4월4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은 유다인들의 불신과 불충을 다룹니다.
계약을 맺자마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수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였을
때 모세는 하느님 앞에서 불충한 백성을 위하여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메시아를 당신 안에서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이해 부족과 사악한 뜻에 맞서셔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의 넓은 의미에서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적대자들 간에 전개되는 재판 과정을 강조합니다.
안식일에 벳자타 못의 병자를 낫게 해 주신 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증인들을 나열하십니다. 그리스도와 당신 인격, 당신 사명을 위한
증언에는 먼저 세례자 요한, 그다음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활동, 곧 파견받은 이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아버지의 활동, 끝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미리 앞선 성경 전체의 보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대자들은 모세에게 고소당하여 재판에 넘겨질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인간의 협력, 그분께 열려 있는 겸손한
마음을 요구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그들 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가 없고 동시에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교만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빛보다 어둠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의 행실이 사악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믿음으로만 예수님 안에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활동이며 동시에 아버지의
활동이지만, 유다인들의 불신으로 거부당하고 맙니다.
-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4월 4일(목) - 살아있는 믿음
오늘은 “살아있는 믿음”에 대해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3절 말씀에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심에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는 은사나 기적이 3가지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는 출애굽과 시내산에서의 율법전수가 초대계시의 한
봉우리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가 또 한 봉우리이며 예수님과
사도들의 계시 시대가 마지막 봉우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워필드는 하나님의 아들과 말씀을 통해 계시가 종료된
이후에는 군사와 기적들이 더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씀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너무나
많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세대를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고
연대를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고 정해진 날짜를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고 바로 눈앞의 현장에서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을 직접 체험한 수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와보라”고 큰 소리 칠 수 있었던 것은 그 현장에서
체험한 수많은 변화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바로 이러한 현장체험과 연대와 세대를 통한 이적과
기적을 체험하는 생생한 살아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