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4월5일 [(자)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지혜서 2,1ㄱ.12-22
복음 요한 복음 7,1-2.10.25-30
◈ [서울] 사순 제4주간 금요일
2019년 다해 4월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도스토프예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양파 한개'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평생 남을 도울
줄 모르던 할머니가 지옥엘 갔습니다. 할머니의 수호천사는 할머니의
삶을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천국은 단 하나라도 선행을 하면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할머니가 집으로 찾아온 거지에게 양파 한
개를 준 적이 있습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께 할머니의 선행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호천사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할머니에게 양파 한 개를 주어라. 할머니가 양파 한 개를
잡고 올라오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수호천사는 기쁜 마음으로 양파
한 개를 할머니에게 주면서 조심해서 잡고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그 양파를 잡고 조심스럽게 천국으로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양파의 뿌리는 너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할머니와 함께 지옥에 있던 사람들이 할머니의 발을 잡고 같이
올라가려 했습니다. 할머니는 '이 양파는 내 것이다.'라고 하면서 발을
잡고 올라오던 사람들을 걷어찼습니다. 사람들이 떨어지면서 그만
양파의 뿌리도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모두가 다시 지옥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수호천사는 울면서 돌아갔습니다.
양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은총으로 우리는
천국으로 갈 수 있지만, 은총은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천국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할머니가 다시
지옥으로 간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선행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은총을 물질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양파를 물질로
여긴다면 어차피 할머니도 올라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양파라는
물질은 할머니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은총이라는 단절이 할머니를 다시금 지옥으로 가게 했습니다. 은총을
물질로 여기는 욕심이 할머니를 다시금 지옥으로 가게 했습니다.
지옥은 무엇일까요? 욕망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증오하는 삶입니다.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과 단절된 삶입니다. 도스토프예스키는
시베리아의 유배지에서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 증오가 가득한 사람,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과 단절된 삶을 사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지옥을
체험했습니다.
무엇이 천국일까요?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를
안타까워하는 수호천사의 연민입니다. 울면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천사는 언제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천국은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보는 마음입니다. 천국은 양파 한 개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 있는 신앙입니다. 단 하나의 선행만으로도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합니다.
신부님들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신발을 벗었는데
냄새가 심했습니다. 다른 신부님들은 코를 막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이게 무슨 냄새냐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의 말이 분위기를 따뜻하게 바꾸었습니다. ‘오늘 일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온종일 신자들과 만나면서 열심히 일했기에 발에서
냄새가 난다고 이해하시는 신부님이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하느님께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정과 비난의 다리는 분노와 미움을
키우게 됩니다. 칭찬과 긍정의 다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비난과 부정의 다리가 있다면 그것을 치워버리고 칭찬과 격려, 긍정과
사랑의 다리를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신앙의 눈, 믿음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양파 한 개와 같은 은총을 이웃과 나누면 좋겠습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결말을 알면 두렵지 않다.
2019년 다해 4월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결말을 알면 두렵지 않다>
복음: 요한 7,1-2.10.25-30
제가 사제가 되어 로마로 다시 유학 갔을 때 신학생 때 다니던 대학에
그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신학생 때는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사제가
되어서는 교의신학으로 바꾸었습니다. 성경 석사를 그 학교에서 했기
때문에 교의 석사를 할 때 이득을 볼 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이미
들었던 겹치는 과목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학장은 깐깐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면담이
잘 안 되면 석사를 1년 더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유학이 싫었기 때문에 1년을 더 사는 것이 참으로
싫었습니다. 두려우니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막무가내로 따지기부터
시작하였습니다. 학장님은 약간 기분이 상했는지 절대 제가 요구하는
것은 들어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별 이유도 없었습니다.
두려워하니 두려운 일이 일어나고야만 것입니다.
저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일단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발행되는 책자를 면밀히 검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학장님의 말이
틀린 것을 알았습니다. 학장님은 석사 3년을 이야기했지만 학교에서
발행된 교칙에 의하면 2년 내에 끝낼 수 있게 되어있었습니다. 저는
형광색 펜으로 그런 내용들에 체크를 하여 다시 학장을 찾아갔습니다.
그 내용들을 보더니 학장은 이런 식으로 규칙을 정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화를 내면서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습니다. 규칙은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믿는 대로 되었습니다.
처음 학장을 만날 때는 1년이 더 늘어날까봐 매우 두려웠습니다. 그
다음 학장을 만나러 갈 때는 왠지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아는 것의 차이’였습니다. 알면 두렵지 않습니다.
위태로운 다리라도 처음이 겁나지 수십 번, 수천 번 건너면 안전하다는
믿음이 박혀 일반 다리처럼 건너게 됩니다. 두려움은 대부분 무지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첫 장면은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을 겁내시는 것처럼
비춰집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지방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초막절
축제가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유다의 중심 예루살렘을
활보하십니다. 그리고 드러내놓고 가르칩니다. 모든 사람이
의아해합니다. 급기야 사람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말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실상 아무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알고 유다인은 모르는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 파견 받았기에 그분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시니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먼저 하니 두려운 것입니다.
자기를 보면 하느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영화들을 볼 때 재미있는 것은 무서운 귀신들이 바로 죽이지
않고 죽여도 최대한 두렵게 만든 다음에 죽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장면들의 공통점은 최대한 예상과 어긋나는 설정을
하는 것입니다. 장롱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조심스레 열어보니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안심하며 뒤를 돌았을 때 바로 뒤에 있는 것입니다.
예상대로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라는 영화가
있는데 신의 딸이 사람들에게 문자로 그 사람들이 죽는 날짜를 다
보내버렸습니다. 그러자 살 날짜가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은 죽음의
준비를 하고 살 날짜가 많은 사람들은 정말 죽지 않는지 실험까지 해
봅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빌딩에서 떨어져보기도 합니다. 그러자 오늘
죽을 사람이 깔려 죽고 자신은 삽니다. 도로 위 높은 다리에서 떨어지면
곡물을 싣고 가는 트럭 위로 떨어집니다.
알면 두렵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의 결말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결말은 부활입니다. 그래서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믿으면 알게
됩니다. 그분을 알기 위해 하루에 단 5분도 투자하지 않으면서 계속
두렵다고만 하면 그건 그냥 두려운 것을 좋아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알려는 노력을 합시다. 그분을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알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사순 제4주간 금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유다인들
복음: 요한 7,1-2.10.25-30: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이제 당신 신변의 위협을 아시고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었으므로 갈릴래아 지방을 다니신다. 그리고 초막절이 되어
제자들과 따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그때와 같은 천막을 세우며, 9월말에서 10월 초순에 걸쳐 지냈다. 이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보여주신 때가 바로
초막절이었다. 이 초막절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겁내고 계시리라 생각했는데, 축제 때 드러내 놓고
말씀하시자 군중은 놀라워했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그분을 잡으려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26절) 하고
말했던 것이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7절) 이 말은 근거 없는 생각이다. 성경에는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2,23) 또 헤로데가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냐고
묻자 메시아는 유대아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자들의
증언을 증거로 제시하였다.(마태 2,6 참조) 메시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가 그의 가계를 말할 수 있으랴”
(이사 53,8 칠십인역 참조)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28절)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28절)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즉 그분의 가족들을 알고 고향을
아는 것뿐이며, 그분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거리가 말다는 뜻이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9절)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아버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본성으로
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분이시므로
그분만이 하느님을 아신다. 다른 모든 만물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그분 홀로 아시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있는가?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에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던
유다인들은 격노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시지 않으면 붙잡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때’란 그분께서 죽음에 처해지기로 결정하신 때를
말한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7, 29)|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7, 29)
사순시기는 특별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십자가라는 아픔을 통해 물음을 던지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관계의 결핍을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로 치유하여 주십니다.
폭 넓은 공동체의 관점으로 우리의 관계를 바라보십니다.
예수님또한 관계맺음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고
성장시켜주십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모두는 관계적 존재들입니다.
관계를 창조하시고 돌보아주시는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는 것은 어떤 관계의 열매를
맺어야 할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모든 관계의 첫시작입니다.
사랑의 관계가 관계의 결실입니다.
오늘도 서로 사랑하라는 내면의 울림이 하느님을 향하게합니다.
모든 관계의 여정을 이끌어가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압니다.
원천적 사랑의 관계인 하느님께로 돌아가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수도회] 목을 부드럽게 하며, 어깨에 힘을 빼고, 거품을 제거하는
시기, 사순절!
2019년 다해 4월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목을 부드럽게 하며, 어깨에 힘을 빼고, 거품을 제거하는 시기,
사순절!
어쩌다보니 본의 아니게 목이 엄청 뻣뻣해졌습니다. 좌우상하로
회전이 여의치 않다보니, 정면만 바라보게 되고, 자연스레 시야가
좁아지더군요. 제 앞만 바라보니, 다른 사람들 모습이나 세상 풍경을
돌아볼 여유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질타가 훨씬 실감나게
전해져왔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탈출기 32장 9절)
주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얼마나 하늘을 찔렀던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깨에는 너무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자신들만
의인이요, 주님 구원의 대상으로 여겼지, 이웃 나라 사람들은 그야말로
‘개무시’했습니다.
목에 잔뜩 기브스를 한 그들은 자신들보다 못한 사람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즉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비참함과 나약함도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은
목이 하도 뻣뻣하다보니 하늘도 올려다볼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었던
나머지, 참 주님이신 분,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 예수님조차도
몰라봤습니다. 몰라보는 것 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분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정말이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틈만 나면 당신이 누구신지?
어디서 왔는지? 당신의 신원에 대해 그리도 자주 가르쳤는데, 뿐만
아니라 그리도 수많은 기적과 표징들을 보여줬는데도 불구하고, 끝끝내
당신을 거부하고 죽이려고까지 하니, 답답해 돌아가실 지경이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셨던지 성전에서 가르치던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 10장 28~29절)
혹시 오늘 우리의 목과 어깨에도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진 게 좀 있다고 없는 사람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좀 배웠다고, 좀 높은 자리에 있다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우리, 목이 뻣뻣한 우리, 잔뜩 부풀어질대로
부푼 우리를 주님께서는 절대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조만간 크게
한방 제대로 치실 것입니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버리게 하겠다.”(탈출기 32장 10절)
사순시기는 목을 부드럽게 하는 시기, 어깨에 힘을 빼는 시기, 거품을
제거하는 회개의 순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4월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요한 7,1-2.10.25-30)
편견과 선입견에 갇히지 마라.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우리를 나무라고 탓하는
자, 그를 모욕으로 시험해 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당히 당신이 누구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서 왔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배경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메시아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야 하며 아무도 그의 출처를 몰라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숨겨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가난한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하게 알면 힘이요, 능력이지만 어설프게 알면 ‘아는 게
병’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비록 의문이 간다 할지라도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비로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또 확고히
믿게 됩니다. 존 포엘신부는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의심이 해소된 후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이 확인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믿음이 있어서 따르기보다 먼저 따름으로써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비록 저의 믿음이
부족하오나 당신을 주님으로 믿사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촌뜨기가 말하여도 그 말이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습니다.”
‘개천에서 용난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을 때 쓰는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어디에서 났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사느냐? 아니면
세상의 지식으로 사느냐가 믿음의 사람을 결정합니다. 요즘 세상은
‘얼짱’, ‘몸짱’을 선호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겸손하며 이해심 많은 ‘맘짱’에는
관심이 부족합니다. 용모나 신장의 선입견에 갇혀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교 교수보다도 훨씬 더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의 믿음을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의 벽을 넘어 ‘내가 만든 예수님 상’을 바로
세우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전주] 사순 제4주간 금요일|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다해 4월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헬레니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의 불신으로 박해당한
의인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의인에 대한 악인의 박해는 동시대인들에게 배척당한 예수님의 운명을
예고합니다. 의인은 성경을 왜곡하고 모세의 종교를 부패하게 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강하게 꾸짖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의인은 하느님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화답송 시편처럼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만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고,
초막절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그분의 때를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예언자처럼 당신의 기원에 대하여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성경을 안다는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님을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에 매우
위험한 인물로 여기는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악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하느님을 조롱합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 27,42).
하느님께서는 확실한 기적을 통하여 강요하는 믿음이 아니라 자유로운
믿음을 바라십니다.
-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4월 5일(금) - 기적과 영원하신 하나님
오늘은 “기적과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시편 136편 1절 말씀에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정통 기독교 견해와 달리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신유를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재 보여 지는 신유와 기적들뿐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과학과 이성의 눈으로 비평합니다.
특히 루돌프 불트만은 ‘비신화화’라는 설을 체계화했는데 당시
사람들의 지적수준으로는 이해할지 몰라도 현대인들에게는 신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기적들은 모두 ‘비신화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시편 136편에서 영원히 이적과 기적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홀로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지혜로 하늘을
지으셨다고 말씀하시고 땅을 물위에 펴셨다고 말씀하시고 빛을
지으셨다고 말씀하시고 해와 달과 별을 주관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오늘도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는
이적과 기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살아계신 모습을 구하는 자와
하나님께서 역사해야 될 환경 속에 있는 꼭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펼쳐 보이십니다.
찬찬히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죽을지 몰라 불안해하는 나의
모습을 점검해보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